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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1일의 일기: 옷 두 벌Vᵉ arrondissement de Paris/Janvier 2022. 1. 22. 00:49
사진을 찍으러 나갔던 어제는 가장 흐렸는데 오늘은 가장 화창하다 #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뭔가 놓친 행정업무가 없나 번뜩 정신이 든다.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가능하면 오전 중에 이런저런 행정업무들을 매듭지어 놓아야 할 것 같다. 어제 요청해둔 학생증의 결제기능 미인식 문제, 도서관 출입은 의외로 당일에 처리가 완료됐다. 다만 가장 중요한 수업과 관련해서 몇 가지 확인을 해둬야 할 것이 있어 늦지 않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 은행업무를 보고 왔다. 생각보다 길어졌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물론 한국과 비교한다면 한참 걸려도 매우 한참 걸렸다. 이곳은 라탕 지구이고 유학생이 많은 만큼 영어로 계좌를 개설하려고 했지만—정확히는 영어로 개설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담당자가 너무나 당연한 듯이 프랑스어로 말을 걸어왔고 그 길로 프랑스어로 계좌 개설을 진행했다. 적금 가입이 필요한지, 기숙사에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지 등등 이것저것 확인하면서 컴퓨터에 곰곰히 입력하더니 서류를 한 뭉텅이 뽑는다. 인쇄물이 계속 나와서 프린터가 고장난 줄 알았다. 계좌, 카드, 보험 등에 대한 안내 문구를 간략히 설명하면서 서명이 필요할 때만 서류를 넘겨준다. 내 서명을 보더니 내 글씨가 한자인지 한글인지 물어본다. 태어난 도시가 명시된 출생증명서가 빠져 있기 때문에 계좌개설은 완료되지 않았고, 출생증명서를 따로 보내야 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출생증명서 사본은 꼭 방문하지 않더라도 메일로 전송해도 된다는 점이다.
은행을 나오는 길에 앳된 프랑스 학생 대여섯 명이 도로 한가운데를 보면서 소란스럽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도로 한가운데 비둘기가 꼼짝 않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동물이 미동도 하지 않아서 이미 차에 치인 줄 알았는데, 학생들의 반응을 가만히 지켜보다보니 비둘기가 꼼지락거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날 줄 모르는 어린 비둘기인지 아니면 날개가 다쳤는지 도로 한 가운데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비둘기를 구하려고 무신경하게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를 향해 수신호를 보냈고 이어서 비둘기를 들어올리려고 했지만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내 비둘기가 뒤뚱거리며 도로변에 주차된 차량 밑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 오후에는 바르톨로메의 프랑스어 문법 수업을 들었다. 바르톨로메의 외모는 꼭 이탈리아 성악가 같다. 두 손에서는 서로 다른 손가락에 굵은 반지를 끼고 있다. 수업에는 이전에 같이 수업을 들었던 독일, 이탈리아, 잉글랜드 학생들이 있었다. 나는 잉글랜드 학생과 팀을 이뤄 과제를 수행했다. 답답해서 영어로 대화하다가 바르톨로메에게 프랑스어로 대화하라고 지적 아닌 지적을 받았다. 한국에서 수업을 들을 때보다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상황이 훨씬 많아서—상대가 가르치는 사람이든 배우는 사람이든—익숙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말을 하는 재미가 있다. 질문을 던지는 데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수업을 들으면 들을 수록 학교 생활에 안착해 가는 느낌이 들고, 그럴 수록 이 도시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수업에 적응하는 데에는 무척이나 힘이 든다.
# 저녁에는 다시 샤틀레에 가서 셔츠 한 벌과 풀오버 한 벌을 샀다. 크리스마스 세일이 아직 한창인지라 가게마다 고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팬데믹이 무색하다. 원래는 이불을 사려고 했지만 같은 브랜드인데 한국보다 턱없이 비싼 것 같아 한참을 고민하다 물건을 내려놨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마존 프랑스로 구매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프랑스에 머무르는 동안 다시 개방하려나 모르겠다 # 이곳에 와서 발견한 것 중 하나는 3D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대개 흑인—아마도 서아프리카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이나 더러 아랍인들이라는 점이다. (아랍인들이라고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기숙사를 청소하는 아주머니, 공중화장실의 계산원, 급식대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와 젊은이들, 배달원, 청소부 거의 모두가 흑인들이다. (그런데 급식 직원들을 관리하는 감독자는 백인 프랑스인이다.) 우리나라에도 주방업무나 공사현장에 동남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구호와는 영 딴 세계인 것이다.
샤틀레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벤토(弁当) 가게에서 테이크아웃 주문을 하고 앉아 있었다. 홀을 지키는 직원, 물건을 가지러 온 배달원 모두 역시나 흑인이구나,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홀을 지키는 젊은 여성은 작은 키에 배꼽이 보이는 짧은 회색 상의를 입고 타이트한 연청바지를 입고 있다. 그녀에게 음식이 나오기 전에 먼저 결제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대뜸 “한국 분이시죠?”라고 내게 묻는다.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사람 같은, 마치 아나운서가 쓰는 듯한 표준말이어서 내심 놀랐다. 한국에서 살다 오셨나고 묻는다는 게 운도 떼지 못했다. 고로 인종이나 외모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 늦은 밤 코인세탁소에 세탁물을 돌려놓고 아마존 프랑스에서 이불을 고르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문을 닫을 때가 다 되어서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세탁소에 뛰어갔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문을 닫을 시각까지는 아직 10분 여 남아 있던 상황이었다. 출입문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다행히도 수화기 저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제 휴대폰을 개통해 놓길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_=) 아직 10시가 안 되었다, 옷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런데 문이 잠겨 있다, 용건을 급히 말했다. 그랬더니 흑인 억양의 직원이 몇 구 어디에 있는 세탁소인지 확인하고서는 내게 다짜고짜 외치는 것이었다.
Tapez! Tapez! Tapez! 나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고 내 귀를 의심했다. 휴대전화를 끊지는 못하고 낑낑대며 문을 밀어붙여 보았다. 여전히 수화기에서 두들기라(Tapez!)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너무 황당하면서도 문이 조금씩 열렸고, 가게 안에 들어선 순간 안에 나이가 중후한 흑인 관리인 아저씨가 구석 어딘가에서 나오셨다. 그냥 문을 두드려보라는 말이었는데, 어쩔 줄 모르고 완력으로 문을 민 것이다. 아저씨가 세탁물을 돌리고 이렇게 오랫동안 세탁기에 두면 어쩌냐고 하는데, 그나저나 이 상황이 너무 웃기면서도 죄송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황망하게 기숙사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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