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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의 일기: 반짝반짝Vᵉ arrondissement de Paris/Février 2022. 2. 1. 23:45
# 오늘 오전은 돌풍처럼 지나갔다. 화요일 노동경제학 수업은 내 관심사에 가장 부합하지만, 월요일의 빡빡한 시간표를 소화하고 난 뒤 가장 피곤한 상태로 들어가는 수업이기도 하다. 오늘의 주제는 임금불평등으로 이와 관련해서 상당히 다양한 주제가 다뤄졌다. 지난 학기 관심을 갖고 계속 찾던 주제들을 콕콕 집어서 다뤄서 내심 놀라기도 하고 재미있게 들었다. 과업요구(work demand)와 자율성(autonomy)에 대한 문제도 다뤄졌다.
이 대목에서 TB 교수가 유독 나를 지목해서 직장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먼 아시아에서 온 사람—정확히는 통계자료나 사례연구가 많은 일본은 아니지만 문화가 비슷한 한국 사람의 의견이 듣고 싶다고 했다—으로서 이 이론에 대해서 덧붙이고 싶은 의견이 없는지 물어왔다. 약간 넋을 놓고 있던 상태였는데 질문이 훅 들어왔고 교수는 내 한 마디를 기다리고 학생들의 시선이 쏠려서 뭐든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자율성 개념을 인식하는 한국의 조직문화, 단체협상에 임하는 태도, 이에 따른 업무 긴장감(Job strain) 등에 대해 얘기했는데, 맥락상 두 변인(과업요구와 자율성)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얘기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조금 엇나간 얘기였다. 엇나간 답변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남은 수업에 잘 집중이 되지도 않았다.
다시 5구로 되돌아올 때에는 예의 이탈리아인과 함께 걸어왔다. 케빈은 14구에서 머무르고 있는데, 마침내 학생증을 받기 위해 5구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 학생증이 없어서 생기는 학생의 불편함은 개의치 않고 국제처에서 오는 시간과 장소를 다 정해주었다고 한다. 오는 동안 이곳의 비효율적인 행정시스템, 학교 수업, 도시 분위기에 대해 얘기하다가 한 블럭을 더 걸어가 버렸다.
Fontaine de l'Observatoire Tour Montparnasse + Metro Raspail # 학식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오후에는 완전히 뻗어 있다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진짜 피곤했던 것 같다. 하지만 화요일은 주중에 유일하게 오후에 공백이 있는 날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퐁텐블로를 다녀올까도 생각을 했었지만, 오전 컨디션을 보고 그냥 쉬는 날이다 생각하고 있다가 에펠탑을 한 번 보러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지내는 5구에서는 밤에 에펠탑이 쏘는 광선만 나타났다 사라졌다 해서 저쯤에 에펠탑이 있겠구나 추측만 했었다. 오늘도 날은 참 흐리지만 겨울이 3월까지 이어진다니 매번 날씨 탓만 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한국은 설연휴인데 혼자 기분이라도 낼 겸 먼 길이지만 가보기로 했다.
먼서 6호선이 지나가는 하스파이(Raspail) 역으로 가서 나비고 1개월권을 구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새 방심하고 있었는데 역무실 직원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발급이 안 된단다. 내가 인터넷에서 찾아본 정보가 전부가 아닌 모양이다. 빨리 프랑스어를 터야 할 것 같아서 되는 대로 단어와 문장을 주워담아 질문을 하는데, 답변은 엄청 성실히 해주었다. 안 들린 말이 더 많지만 결론은 신상에 관한 서류 작성이 필요하고 구간을 설정할 때 기준이 되는 역으로 가라는 건데, 그래서 메트로를 운영하는 RATP에서 정기권 하나 끊어줄 통합시스템 정도도 없다는 건가.. 답답함은 사치요, 서둘러 수긍하기로 했다. 나비고 정기권을 끊으려고 줄곧해서 달이 바뀌기를 준비해 왔지만 뭔지는 몰라도 다시 확인해봐야 할 것 같다. 인터넷을 보고 증명사진만 달랑 챙겨온 나로서는 일단 승차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여서 일단은 까르네라도 구입했다.
Tour Eiffel Palais de Chaillot # 그대로 6호선을 타고 트호꺄데호(Trocadéro) 역에서 하차한 뒤 윌슨 대통령 가 방면으로 나온다. 샤이요 궁(Palais Chaillot)으로 온 것이다. 샤이요 궁은 에펠탑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곳인데, 지금은 한창 수리중이어서 에펠탑을 관람할 곳이 궁색하다. 올림픽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가 화재가 있었던 노트르담 대성당이 아니더라도 파리 전체가 수리중이다. 돌아다니다가 이곳에 관광 온 네팔인 커플과 서로 사진을 찍거니 찍어주거니 하며 잠시 머물다가 궁을 빠져나왔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팬데믹 이후로 이곳에 관광객이 자취를 감춰서, 몽마르트 일대 정도를 제외한다면 관광지가 대체로 한산한 점은 좋다. (나중에 현지인들에게 얘기를 듣고 보니 몽마르트는 너무 상업화되었다고들 한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지금 파리다운 파리를 보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센 강을 건너서 에펠탑 가까이까지 가볼까 하다가 생각을 접고 끌레베흐 대로(Av. Kléber)로 움직였다. 개선문(Arc de Triomphe de l'Étoile)을 보기 위해서였다. 중간에 카페에 들러 한 시간 반 정도 시간을 보냈다. 모처럼만의 여유다. 계속 수업을 들으러 다니고, 수업이 없을 때는 견문을 넓히겠다고 여기저기 쏘다니다보니 멍하니 앉아 있을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 앉아서 지인들에게 새해 인사 메시지도 보내고 창문밖으로 사진도 찍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파리에 도착한 뒤로 처음으로 생각 없이 보냈던 시간이 아닌가 싶다. 그러다가 나올 때 계산을 하면서 커피값이 5구 일대보다 1.5배 정도 비싸서 정신이 확 깼다. 개선문 쪽 물가가 비싼 것 같다. (론리플래닛에는 라탕지구 일대가 물가가 비교적 저렴한 편이라고 소개되어 있기는 하다. 기준 차이일지도.)
Arc de Triomphe 이름은 개선(凱旋)을 달고 있지만, 전몰(戰歿)한 사람들을 기리는 공간이기도 했다 개선문에 도착했을 때는 일몰이 시작될 즈음이었다. 물론 요새는 날씨가 엄청 흐리고 특히나 오늘은 비까지 오락가락하기 때문에 석양은 기대하기 어렵다. 원래는 개선문을 밖에서 보고 샹젤리제 거리를 쭉 걸어볼 생각이었는데, 충동적으로 개선문 전망대에 가보기로 했다. 날씨 탓에 그리 좋은 풍경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음에도 왠지 서쪽 높은 곳에서 파리를 한번 내려다보고 싶었다.
나는 이곳 지명에 수시로 별(Étoile)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이유를 개선문에 올라간 다음에야 알 수 있었다. 개선문 전망대에서 한 바퀴 빙 돌면서 파리 시내를 보면 정말 ‘별’이다. 말그대로 별처럼 대로들이 방사상으로 쭉 뻗어 있다. 라데팡스, 불로뉴 숲, 에펠탑, 몽파흐나스, 앙발리드, 루브르, 몽마르트, 몽소 공원이 차례차례 시야에 들어온다. 얼마전까지 바르셀로나에 머무르다 프랑스에 온 케빈은 이곳 행정시스템을 욕하면서도 고풍스런 건물만큼은 인정한다고 하는데, 나는 이곳 건물들의 미적인 면보다는 건물들을 적절히 배치한 도시계획이라는 측면에서 놀라게 된다. 파리 동부는 오래된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서 하나의 거대한 구역으로 뭉쳐진다는 게 인상적이라면, 라데팡스를 비롯한 파리 서부는 너무나 체계적으로 도시가 세워져 있어서 놀란다.
La Défense Av. des Champs-Élysées 초저녁이 되자 도시에 하나둘 조명이 들어오고 어느덧 에펠탑도 오렌지빛으로 물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펠탑이 반짝반짝 빛난다. 백색 조명들이 제각각 현란하게 명멸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참 유치해 보일 수 있는데, 희한하게 그 나름대로 감성을 자극한다. 국적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개선대 위에 올라와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나도 시선을 고정한 채, 빛이 들어온 에펠탑을 신기루처럼 바라보다가 '도대체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해냈을까' 하는 생각에 미쳤다. 애당초 에펠탑이라는 것부터가 도시의 미관을 한꺼번에 망칠 수 있는 철골 건축물이다. 그런데 그걸 곡선으로 만들었고 끝은 뾰족하게 두었다. 편평한 파리 시내 아래에 흐르는 무수히 많은 지류(支流)들을 그러모아 지상 위로 교묘히 엮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건축물에서 곡선이라는 건 보통 아치나 돔으로 이어져야 할 것 같은데, 에펠탑의 곡선은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선을 그린다. 사근사근하기는 하지만 매사에 제멋대로이고 필요 이상으로 낙관하거나 무시하고 어떤 때는 우쭐대는 사람들이 이런 구상(構想)을 한다는 게 신기하다.
개선문 위에서 몇 바퀴를 돌며 파리 시내를 구경한 다음 샹젤리제 거리로 내려왔을 때는 이미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진 뒤였다. 언뜻 보아도 수령(樹齡)이 오래된 샹젤리제 거리의 가로수들을 보면서, 아주 어렴풋이 이 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알 것 같았다. 또 이곳에서 인식하는 ‘시간’ 개념이 무엇인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이 도시는 세월이 오래된 사물과 건축물들로 빼곡해서 ‘시간’이 무상하다고 할 수가 없다. 이들이 그랑 팔레를 수리하고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를 수리할 때는 단순히 유적을 관리하는 것 이상으로, 그 자체가 도시를 먹여 살리는 사업이자 일자리가 된다. 콜로세움이나 피라미드, 마추픽추와 같은 고대 유적을 관광지로 활용하는 유수의 도시들과 달리, 17~19세기에 축조된 파리의 수많은 건물들은 파리 시민들이 매순간을 살아가는 공간이다. 그래서 오래되었으면서도 오래되었다고 하기가 어렵다. 시간이 오래되어도 여전히 가치가 충분하고 오히려 가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매순간에 기민하게 반응하고 매단계에 걸맞는 계획이 빨리 세워지지 않으면 조급해지는 한국인에게 그야말로 난해한 가치관이다.
이들 가치관에 우열은 없다. 그리고 각자 일장일단이 있을 것이다. 몇몇 프랑스 교수들은 EU 평균 대비 높은 프랑스의 사회보장 지출현황을 자조적으로 말한다. 당장 오전에 TB 교수만 해도 지난 반 세기 동안 주요 선진국 가운데 유일하게 프랑스만이 임금 격차가 줄어들었다는 통계를 보여준다. (미국뿐만 아니라 스웨덴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의 임금불평등 수준은 지난 반세기 꾸준히 그리고 높은 수준(대략 1.5배)으로 상승한다.)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단서가 붙는다. 프랑스는 정부지출을 충당하기 위해 소득세와 법인 부담을 계속 늘려왔고 프랑스의 정부지출 증가는 현재진행형이라는 것. 팬데믹이 겹치면서 G20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이 그러하지만 프랑스의 재정적자와 정부부채 또한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지금까지 프랑스가 거쳐온 오래된 서사는 그들의 강점이자 자부심이 되는 동시에, 방향을 잃은 타성이 될 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양극화로 고통받는 시점에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을 줄여나가야 한다는 건 더 강조할 필요도 없지만, 프랑스, 더 넓게는 EU의 주요 선진국들이 이를 풀어나가는 방식에 대해서는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오늘 개선문과 샹젤리제에서 목격한 것들은 충분히 인상적인 것이었다(!!) 벌써 수백 년 전 구체적으로 계획된 방사형의 도로 위에, 지금은 세계를 선도하는 명품 업체들의 부티끄들이 절제된 파사드를 은근하게 뽐내며 질서정연하게 들어서 있다. 그렇게 이런저런 잡념을 정리하면서 에투알 개선문에서부터 콩코드 광장까지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걸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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