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27일의 일기: 장밋빛을 담다Vᵉ arrondissement de Paris/Février 2022. 2. 27. 18:54
# 툴루즈는 파리와 마르세이유, 리옹에 이어 프랑스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지만, 걸어 다녀보면 막상 그리 큰 도시는 아니다. 지도로 보는 파리를 직접 걸어보면 되게 크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지만, 지도로 보는 툴루즈를 직접 걸어보면 그리 크지 않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오귀스탕 박물관(Musée des Augustins)이 문을 열었더라면 뛰어난 작품들도 원없이 볼 수 있었겠지만, 코로나 때문인지 임시휴업 중이어서도심을 산책(la flânerie)하는 일로 하루를 보냈다.
일요일 아침 거리는 한산하다. 가게들은 대부분이 문을 닫은 상태다. 생 세흐낭(Basilique Saint Sernin) 대성당을 지나 토흐 가(R du Taur)로 접어든 다음 캬피톨 광장에 들어서도 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빨간 모자를 쓴 백발의 남성이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름 아침부터 광장에 나와 스트리트 오르간(street organ)의 손잡이를 연신 돌린다. 그러면 아코디언 멜로디가 섞인 프랑스 특유의 청승맞은 음악이 흘러나와 광장 모퉁이에 잠시 넋놓고 앉아 있었다.
일요일이 되어서 한 가지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시장이 크게 열린다는 점이다. 생토방 성당(Église Saint-Aubin)을 에워싸고 제법 큰 장(場)이 선다. 길을 따라서 노점이 크게 열리는데, 파리에도 이런 곳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매우 활기가 넘친다. 물건을 사고 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인 작은 공연들이 열려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툴루즈는 규모가 있는 도시임에도 시골처럼 닭을 산 채로 가져와서 판다거나 하는 모습도 흥미로웠다.
# 나는 오스마니안 양식으로 지어진 파리의 건물들보다 장밋빛으로 지어진 툴루즈의 건물들이 더 마음에 든다. 숙소에서 바라보는 주홍빛 지붕들을 보면 스페인 가옥들을 보는 것 같기도 한데, 도로 사이를 다니며 벽면을 보면 스페인풍 건물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오히려 남부 이탈리아에서 볼 법한 색감이 나는 다홍, 갈색, 분홍이 뒤섞인 오묘한 파스텔톤이다. 그래서 툴루즈는 분홍색 도시(La ville rose)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 안에서도 도시마다 오래된 풍경에 큰 차이가 난다는 게 신기하다.
# 점심을 먹고 캬피톨 광장으로 나오니 오전과는 달리 사람으로 북적였다. 빠르게 인파가 늘어나서 무슨 일인가 했는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반전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유럽의회의 깃발, 우크라이나 깃발 등등 다양한 깃발이 모였다. 툴루즈 시청 앞에는 전쟁을 애도하는 듯한 서글픈 노래가 이어지고, 노래가 끝날 때마다 박수 갈채가 쏟아진다. 몇 곡 노래가 이어진 다음에는 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기 시작한다.
파리에서는 헤퓌블리크 광장에서 열리는 집회에 간다는 친구를 보았는데, 이미 여행을 계획해둔 상황이어서 집회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게 아쉬웠었다. 하지만 툴루즈에서도 반전 집회가 열리는 반가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람들이 정말 어느 정도로 전쟁의 희생자들에게 공감하고 동정심을 보내고 있는가 의문스럽기도 했다. 요새 수전 손택의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말대로 미디어를 통해 보도된 전쟁의 참상과 정의-부정의를 가르는 시선은 타인의 아픔을 공유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아픔을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 캬피톨 광장을 빠져나와 자코방 수도원(Couvent des Jacobins)을 잠시 들렀다. 기본적으로 수도원이기는 하지만 남는 공간을 활용해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장 디외제드(Jean Dieuzaide)라는 툴루즈 출신 작가의 작품으로, 많은 방문객들이 그가 사진기에 담은 툴루즈의 흑백풍경을 뚫어져라 관람하고 있었다. 수도원은 조금 독특하게도 본당 중심에 주축이 되는 열주(列柱)들이 늘어서 있었다.
툴루즈에는 생 세흐낭 성당과 자코방 수도원을 비롯해서 여러 종교건축물들이 있는데, 탑들이 대개 팔각형으로 만들어져서 독특한 인상을 준다. 파리에서 볼 수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이나 생트 샤펠 성당과 달리, 작은 파스텔톤 벽돌들이 사용되는데 마치 중국식 전탑(甎塔)을 보는 것처럼 동양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잠시 세비야에서 보았던 히랄다(Giralda)와 비교를 해보았는데, 스페인식 건축과는 또 다르다. 프랑스 수도원의 회랑은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스페인의 그것에 비해서는 평범한 편인 것 같다.
# 수도원을 빠져나온 다음에는 갸혼 강(La Garonne)을 따라 걸었다. 해가 정오를 넘기면서 우안 방면으로 강둑에 많은 사람들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반면 해를 등지고 있는 좌안으로는 라 그하브 병원(Hôpital La Grave)의 어두운 그림자가 보인다. 파리만큼 강에서 보이는 도시의 선이 예쁘지는 않지만, 다홍빛 색감이 주는 푸근함이 있다. 특히나 오전에 흐렸던 날씨가 해가 높아지면서 맑게 개였고, 몇 점 되지 않는 구름들이 강 위에 그대로 반사되어 하늘과 강이 구분되지 않는 풍경이 이어졌다. 처음에 퐁뇌프 다리를 통해 건넜던 게, 다시 돌아오는 길에는 생피에르 다리(Pont Saint-Pierre)를 통했다. 그리고선 레옹 겅베타 가(R Léon Gambetta)에 있는 한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오후를 보냈다.
# 다홍빛 벽돌들을 계속 좇으며 툴루즈 1대학까지 갔다가 미디 운하가 강이 합류하는 지점까지 내려온다. 아까 지나왔던 생피에르 광장에서 악단의 매우 흥겨운 선율이 들려온다. 20대 초반이나 되었을까, ‘Chez Tonton Toulouse’라고 해서 어떤 모임인지는 모르겠지만 툴루즈의 지역색을 드러내는 흰 티셔츠를 입고 쾌활하게 음악을 연주하다가 중간중간 노래를 부른다. 길을 가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시선을 빼앗기고 이따금 박수로 보조를 맞춘다. 앳된 청춘들의 박력 있는 연주를 듣고 있다보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한낮에는 프랑스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게 실감날 만큼 날씨가 꽤 더웠는데, 해가 저물어가면서 다시 아침의 추웠던 날씨로 되돌아간다.
'Vᵉ arrondissement de Paris > Févri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2월 28일의 일기: 성(城)과 운하(運河) (0) 2022.03.01 2월 26일의 일기: 환대(歓待) (0) 2022.02.26 2월 25일의 일기: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 (0) 2022.02.25 2월 24일의 일기: 타인(他人)으로 살아가는 것 (0) 2022.02.25 2월 23일의 일기: 생말로(St Malo) 가는 길 (0) 2022.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