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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8일의 일기: 성(城)과 운하(運河)Vᵉ arrondissement de Paris/Février 2022. 3. 1. 02:16
# 집사 매튜가 오늘 아침 문틈을 비집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집 강아지를 떠올리면서 투덕투덕 쓰다듬어주니 녀석이 내 무릎 위에서 자세를 점점 고쳐 앉는다. 그러다 조금 이따가는 아예 퍼질러 앉았다. 집고양이를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고, 계속 보고 있자니 곰살맞은 우리집 강아지가 더 생각이 난다.
# 이른 아침 앙테흐시테(Intercité)—TER보다 지선(支線) 역할을 하는 노선—을 타고 카르카손으로 향했다. 카르카손(Carcassonne). 표준 프랑스어로 하면 ‘캬흐캬손’에 가깝겠지만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은 현재 우리말로는 카르카손으로 소개되고 있다. 사실 발음을 굳이 따질 필요도 없다. 옥시타니 지역의 방언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에는 ‘Carcassona’라는 명칭이 이탤릭체로 병기되어 있다.
# 모처럼 프랑스식 메뉴로 점심을 해결했다. 사실 프랑스에 있으면서도 프랑스 음식을 먹는 일은 쉽지 않다. (학생식당에서 나오는 프랑스식 구성이 제일 좋다.) 가장 큰 이유는 혼자서 식사를 해결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은 가정식 백반이든 정식이든, 아니면 그냥 국밥이든 혼자서 식사를 해결하기 비교적 편하지만 이곳의 메뉴 구성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일단 ‘반찬’이라는 개념이 없고 보통 정식(Formule)이 전식(Entrée)-본식(Plat)-후식(Dessert)로 이루어지는데, 하나하나 주문하기에는 혼자 먹기에 부담스러운 구성이 되어버리기 십상인데다 가격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이렇게 조그만 도시일 수록 혼자 배낭여행을 다니다보면 적당한 식당을 찾는 게 쉽지 않다.
한국에서도 혼자 지낼 때 밥을 먹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다. 1인분에 맞는 재료를 사는 일에서부터 설거지까지. 다만 프랑스에서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 편인 나도 계속 빵을 먹다보면 어는 순간 물리는 문제점이 있다. 생각을 바꾸는 것보다 어려운 게 식습관이라는 생각도 든다. 여기서는 식사 대용으로 샌드위치, 피자, 크레페, 더 멀게는 팔라펠도 있지만, 어쩐지 큰 걸 먹어도 식사를 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여하간 오늘의 식사(Au Fil du Temps)를 정식으로 주문하고 보니 점심을 먹는 데만 꼬박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곳 사람들이 밥 먹는 데 왜 시간을 그렇게 길게 쓰는지 알 것 같다. 전식으로는 연어가 곁들여진 퓌레(Voluté Duberry sommté de chou-fleur et saumon)가, 중식으로는 오리구이(Cuisse de canard rotié au miel purée salso sauce a l'orange)가, 후식으로는 무화과를 곁들인 아이스크림(poire pochée au vin rouge glace blanc)이 나왔다. 여기에 화이트와인도 한 잔 주문했다.
24유로 식사로는 괜찮은 구성이라고 생각하지만, 본식에서 오리를 자르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원래 이런 요리인가?) 결국 나이프를 바꿔달라고 했다. 혼자서 밥을 먹는데 이미 한 시간을 넘겼고 오는 기차 안에서 커피를 이미 마신 상태였기 때문에 커피는 생략하고 자리를 일어났다.
# 나는 오드 문(Porte de l’Aude)을 통해 카르카손 성(la Cité)에 들어섰다. 유럽에는 성도 교회도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지만, 막상 들어가보면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입장하길 잘했다 싶다. 9유로라는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다. 가장 먼저 성채에서 가장 높은 지점을 찌르는 백작성(Châteauu Comtal)을 둘러보게 탐방로가 짜여 있다. ㅁ자로 된 성채를 반시계 방향으로 돌게 되어 있는데, 동쪽을 돌 때에는 성안 마을의 풍경이, 서쪽을 돌 때에는 오드 강(Aude) 너머 카르카손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너무 경치를 감상하는 탐방로로만 구성되어 있다 싶으면, 아니나 다를까 중세 유물이 한가득 진열된 전시공간이 나타난다. 그리고 전시실을 빠져나오면 다시 성벽을 따라 걷게 되어 있다. 이제는 백작성을 빠져나와 성 전체를 에워싸는 성벽을 걷게 된다. 이 지점에서부터는 생 나제흐 대성당(Basilique Saint Nazaire)이 시야에 들어온다.
생 나제흐 광장이 나타나는 지점에서 탐방로가 끝났다. 나는 광장과 이어진 카르카손 벽(Murs de Carcassonne)을 통해 성을 빠져나왔다. 이제까지 성 안에 머물러 있었다면, 성벽 전체를 전망할 수 있는 지점으로 가보고 싶은 생각이었다. 동쪽으로 동쪽으로 포도밭 사이를 20여분 지나 전망지점에 도착했지만 경치는 생각보다 싱겁다. 나흐보네즈 문(Porte Narbonnaise)을 통해 다시 들어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뒤, 처음 왔던 것처럼 오드 문을 통해 성을 아주 빠져나왔다.
# 프랑스의 남쪽까지 내려왔지만, 여전히 옥시타니 지방의 위도는 서울보다도 높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부쩍 빠르게 낮이 길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게다가 남쪽으로 내려왔으니 날씨부터가 낮에는 푹푹 쪄서 파리에서부터 입고 온 겨울 점퍼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파리로 올라가면 옷차림부터 서서히 바꿀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카르카손을 올 때에 단지 성채(la Cité)만 둘러볼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다. 오드 강 중류에 미디 운하가 합류하는 지점이 나오는데 그 근방이 카르카손이다. 미디 운하(Canal du Midi)는 툴루즈에서 발원하는 걸 생토방 시장 일대에서 잠시 보기는 했지만, 카르카손 지역이 전원 풍경과 어우러져 운하를 거닐기에 더 좋을 것 같았다. 미디 운하는 툴루즈를 출발해 지중해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그 길이만도 360km에 달한다. 내가 원하는 지점을 골라 햇빛을 쬐며 둘러보기로 했고 그게 카르카손 지역이다.
미디 운하는 산책로이지 볼거리가 있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미디 운하를 가려고 한 또 다른 이유는 이곳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디 운하는 17세기 후반에 건설되었고, 프랑스의 산업혁명에 기여한 것을 인정받아 이미 1996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갑문, 수송로, 다리, 터널 등 운하를 이루는 구조물만 328개에 이른다고 한다. 일본에서 요즈음 근대 산업시설들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움직임이 아마 이런 추세를 참고한 게 아닐까 싶다. 일본의 사례는 문제되는 역사적 맥락이 결부되어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도 언젠가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던 산업시설들을 문화유산에 등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 월요일에는 카르카손 시내의 많은 상점들이 대부분 닫는 모양인지 저녁을 해결할 식당을 찾기 어려웠는데, 다행스럽게도 역 앞에 모로코 음식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샥슈카는 먹어봤어도 쿠스쿠스는 처음 먹었는데 입에 잘 맞았다. 으깬 밀의 일종인 세몰리나를 쪄서 요리가 나오는데, 처음에는 웬 거친 가루가 이렇게 많이 들어갔나 싶었는데 육수에 곁들여 먹다보니 뜨끈한 걸 찾는 내 입맛에 맞았다. 돌아오는 길은 가격이 반으로 할인된 TER 열차표를 골라 툴루즈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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