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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의 일기: 툴루즈의 “먹거리”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rs 2022. 3. 2. 20:21
# 이틀 내리 맑던 툴루즈의 하늘도 점점 궂어지더니 오후부터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전에는 에어버스 공장 투어를 신청해 두어서, 툴루즈 공항이 위치한 블라냑(Blagnac) 지역에 다녀왔다. 배차간격이 미리 확인해 두었던 것과 달라서 도착지인 아에호스코피아(Aeroscopia)까지 가는 데 애를 먹었다. 또 아침시간의 만원 버스가 가는 길에 생각보다 우회를 하는 바람에 엉드호메드 고등학교(Andromède-Lycée)—안드로메다 고등학교—앞에서 하차한 다음 걸어서 이동했다.
# 공항을 누비는 동선의 특성상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간당간당하게 시간에 맞춰 도착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영어로 진행되는 투어는 오전 9시 30분 1회밖에 없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 없이 첫 세션을 신청했다. 항공학이나 기계와 관련된 전문용어가 많이 나오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해설사 바네사가 어렵지 않게 설명을 해주었다.
툴루즈는 비행기와 관련해서 아주 많은 일화를 가진 도시다. 일단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비행에 성공하고 비행기를 제작한 클레멍 아데흐(Clément Ader)라는 인물이 툴루즈 출신이다. 『어린왕자(Le petit prince)』의 작가로 너무나도 잘 알려진 앙투안 드 생텍쥐베리(Antoine de Saint-Exupéry)는 세계대전 기간 동안 툴루즈와 남미를 횡단하는 항공사였다. 사막에 불시착하는 『어린왕자』의 이야기는 경유지였던 북아프리카 일대에서의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쓰여진 것이다.
항공산업이라는 측면에서 툴루즈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부터다. 전쟁에서 공중전의 역할이 중요해졌고 툴루즈는 독일의 공격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기 때문에 일찍이 항공산업의 거점 지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지금도 툴루즈는 에어버스 생산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에어버스(Airbus)는 제살 깎아먹기 식 경쟁을 피하기 위해 70년대 프랑스와 영국, 독일, 스페인이 컨소시엄 형태로 출자한 회사로, 바퀴, 날개, 본체, 꼬리, 엔진 등이 유럽 각지에서 생산된다. 또 생산, 조립, 도색, 배송등 각 공정단계에 따라서도 도시별로 분업이 되어 있다. 영국 웨일즈에 접한 글로스터(Gloucester), 독일의 함부르그(Hambourg), 스페인의 헤타페(Getafe) 등지에서 다양한 작업이 이뤄진다.
프랑스에서도 툴루즈가 아니더라도 마르세이유, 생 나제흐(Saint Nazaire)에 에어버스 공장이 있다. 툴루즈는 민항기, 마르세이유는 헬리콥터를 주로 만들며, 툴루즈는 유럽에 위치한 에어버스 공장 중에서는 유일하게 민항기의 전(全) 모델을 생산하고 제작한다. 군항기, 특히 전투기가 아닌 군수항공기의 경우 스페인에서주로 생산된다고 한다. 한편 프랑스의 다목적 전투기 라팔(Rafale)은 다소(Dassault)에서 생산한다고 하니, 유럽의 항공산업이 골고루 발달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급망이 효율적으로 관리될 수 있을까 궁금증이 들기도 한다.
특히 벨루가(Beluga)라는 기종—말 그대로 돌고래를 닮은 항공기다—은 툴루즈에서만 제작된다고 한다. 벨루가는 우주항공기 부품, 대형화물, 헬리콥터 등을 싣기 때문에 기능상 항공기에 창문이 없다. 게다가 조종석이 밑에 달리고 짱구처럼 생긴 외모 때문에 꼭 돌고래처럼 생겨서 독특한 외관으로도 알려진 기종이라고 하는데, 나를 빼고 투어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 기종을 다들 알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공장 견학이기 때문에 공장에서 항공기를 제작하는 과정도 관람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데크에서 터키 항공의 후미(後尾)를 조립하는 과정이 한창이다. 현장에서 작업하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데, 해설사의 말에 따르면 많은 작업이 항공체 내부에서 이뤄진다고 한다. 그러면서 A350, A380 등 기체 모델에 붙는 이름이 좌석수, 사용되는 재료—알루미늄, 탄소섬유 등 자재—에 따라 지어지는 방식을 설명해 준다.
해설은 기본적으로 명확한 틀이 있었다. 고객사(항공사)로부터 주문을 받아 항공기 제작회사가 주문을 발주하고 최종적으로 배송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주문-모형 설계-시험-제작-배송 순으로 설명이 진행되고, 실제 공항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기 전까지는 시험(test)의 중요성에 관해 대부분의 시간이 할애되었다. 인테리어도 그렇지만 도색과정에서 주문제작이 많이 개입되기 때문에, 독특한 형태의 도색 사례들도 함께 소개해주었다.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 투어였다. 민항기가 마치 전투기처럼 기울어진 상태로 시운전하는 장면도 직접 볼수 있었다. 오늘 투어에서 가장 큰 소득이었다고 한다면, 벨루가를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벨루가는 민항기가 정차하는 터미널에서는 볼 일이 없는 항공기인데, 격납고로 정차하러 들어가는 벨루가와 이륙하는 벨루가를 한꺼번에 볼 수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커다란 격납고를 보면서 문득 군대에 생각이 났다. 격납고의 크기는 공간감각을 왜곡시켜서 서로 가까운 거리처럼 보이는 곳도 막상 이동하다보면 멀다는 걸 깨닫는다.
여하간 항공산업은 툴루즈를 먹여 살리는 일자리를 제공한다. 툴루즈 공항 일대의 광활한 부지에는 항공산업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회사들이 들어서 있다. 항공기에 직접 들어가는 부품을 다루는 회사도 있는가 하면, 물품을 조달하는 걸 전문으로 하는 회사들도 있다. 프랑스어로 비행기를 가리키는 ‘avion’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린 클레멍 아데흐와 그의 고장 툴루즈. 아침의 에어버스 투어는 유럽의 항공산업과 관련해 여러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 툴루즈의 마지막 식사로 어제 들렀던 Midi 37을 갔다. 툴루즈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어제와 같이 광장에서 햇빛을 쬐며 먹을 생각을 하지는 못하고, 매장에서 커피와 디저트를 시켜 정식 형태로 점심을 먹었다. 이 가게는 정해진 수량만 만들고 낮에만 가게를 연다. 툴루즈 시내 한복판에 이렇게 배짱 영업을 할 수 있다는 건, 달리 말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얘기다. 샌드위치가 8유로로 통일되어 있어서 싸다고는 할수 없지만, 다른 가게의 가격대와 비교해서 비싸다고 할 수도 없다. 파리의 기숙사 근처에도 이런 샌드위치 가게가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인에게 여기 정말 맛있었다고 하니 하하하 크게 웃는다.
# 큰 비가 쏟아지는 건 아니지만 계속해서 비를 흩뿌리던 툴루즈의 하늘은 아정(Agen) 역을 지나면서부터 아주 조금씩 맑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정 역을 지난 뒤에는 어느 순간부터 거대한 포도밭이 차창 너머 풍경을 차지하기 시작한다. 누벨르 아키텐(Nouvelle-Aquitaine) 지역이 들어온 건가, 하고 실감한다. 보르도 역시 예정에 있던 도시는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하다.
불과 그저께까지만 해도 그만 파리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는데, 어제 마음을 바꿔 보르도에 며칠 묵기로 한 것. 사실 내게는 파리도 외지이기는 마찬가지라 파리로 돌아간들 툴루즈보다 더 편한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툴루즈에 도착한 이후 한 번은 처음으로 여행도 지치는 일이라 느꼈고 파리에 두고 온 일들도 걱정이 되었다. 그러다가 알비를 다녀온 날 기운을 회복했고 프랑스 남서부에 또 내려올 일이 있을까 싶어 여행을 연장한 것인데, 결국은 파리에 쌓인 자질구레한 일들과 공부할 거리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건 아닐까, 하고 되돌아본다. 여하간 며칠간의 여유는 두고 파리로 돌아가야 한다.
# 보르도에 도착한 뒤 생트 크루아 성당(l’Église Sainte-Croix) 앞에서 열쇠를 건네받은 뒤 카푸상 시장(Marché des Capucins) 쪽에 위치한 숙소에서 뻗어버렸다. 샤워를 하고 밍기적거리다가 거대한 종탑(Gross Cloche)를 지나 Primi라는 이탈리아 음식점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갸혼 강변을 따라 보르도의 중심부를 슬렁슬렁 걸어보았는데, 밤에는 너무 어두워서 보르도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겠다. 내일 비 예보가있기는 한데 낮이 되면 천천히 둘러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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