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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의 일기: 부지런함에 대하여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rs 2022. 3. 3. 22:09
# 늦잠을 자고 열한 시쯤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릴 겸 카페로 갔다. 연휴 기간이기는 하지만 부족한 공부는 해둬야 할 것 같아 논문을 읽다보니 오후 한 시를 훌쩍 넘겨 있었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보르도 시내를 걸어보기로 했다. 어젯밤 갸혼 강변과 생 미셸 성당을 중심으로 둘러보기는 했지만 어두워서 낮에 보는 보르도의 풍경은 전혀 달랐다.
가장 먼저 보르도의 상징과도 같은 보르도 대성당(Cathédrale Saint-André de Bordeaux)을 둘러보았다. 11세기에 지어진 성당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만큼 웅장하고 정교한 건축물이다. 내부는 장식이 화려하다고 할 수 없지만, 직선으로 뻗은 두 개의 첨탑만으로도 인간의 힘이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생각해보게 한다.
# 트램이 양방향으로 가로지르는 비탈 캬흘르 가(R Vital Carles)를 따라 북으로 쭉 걸어올라가다가 파란색 외관의 서점 하나를 발견했다. 그냥 지나칠 수야 없다. 모야(Mollat)라는 서점으로 입구에는 프랑스문학을 중심으로 서적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보니 서점이 매우 컸다. 서울의 웬만한 대형서점들과 비교해도 작지 않고 매우 다양한 책들을 취급하고 있었다. 포틀랜드의 파월 서점(Powell’s Bookstore)을 갔던게 생각났는데, 규모도 규모지만 책의 다양함에 깜짝 놀랐다. 활자도 각양각색이거니와 아주 작은 주머니에 넣어 다닐 만한 크기의 책에서부터 만화책에 이르기까지 온갖 책들이 진열되어 있어서 책을 사지는 않았지만 구경하기에도 좋았다. 중고책도 아닌 신간인데 과연 상품성이 있을까 싶은 책들도 너무 많아서 신기했다.
# 서점을 나와 도심의 북서 방면에 있는 광장(Pl. des Martyrs de la Résistance)의 생 쇠항 성당(Basilique Saint-Seurin)에 갔다. 계획에 있던 곳은 아니었는데, 생 엉드헤 성당에 소개된 문구를 보고 찾아가게 되었다. 안내문구에 따르면 보르도 시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때, 순례자의 길(chemin de Saint Jacque de compostelle)—우리나라에는 스페인 북부의 순례자의 길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테야(Santiago de Compostella)로 더 유명하다—이 그 가치를 인정받았는데, 길의 큰 축을 이루는 세 개의 성당이 남쪽에서부터 생 미셸 성당(Basilisque Saint Michel), 생 앙드헤 대성당(Cathédrale Saint-André), 그리고 생 쇠항 성당(Bailisque Saint Seurin)이다.
나중에 숙소 주인의 얘기를 들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생 쇠항 성당이 이 길목에 위치한 성당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여하간 생 미셸 성당이나 생 엉드헤 성당에 비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보르도의 시내도 둘러볼 겸 생 쇠항 성당까지 걸어가보았다. 보르도 도심으로부터는 약간 외곽에 위치한 곳인데 길을 잘 가고 있는 게 맞나 싶을 땐 주위에서 트램의 종소리가 들리는지 확인하면 된다. 보르도 시내에서는 어딜 가도 트램의 청아한 종소리가 들린다.
# 이어 갈리아 성(Palais Gallien), 공공정원(Jardin Publique), 생 루이 성당(Église Saint-Louis des Chartrons), 해양 주식거래소(Hôtel de la bourse maritime)를 차례로 둘러보며 갸혼 강으로 나왔다. 공원과 갸혼 강에는 평일 낮이지만 조깅하는 사람, 스케이드보드를 타는 사람,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사람, 자전거를 달리는 사람들이 많다. 프랑스 사람들을 보다 보면 종종 나의 부지런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일에 치여서 사는 프랑스 사람들도 있지만 이곳에서는 일반적으로 안달복달하며 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의 삶은 굴러가고.
툴루즈와 보르도에서 묵었던 가정집의 주인들은 각자의 생업이 있고 바쁘게 살아간다. 딱히 개인적인 여가를 즐기는 것 같지도 않다. 한편으로 학교의 교수들을 보면 일이 너무 바빠 찌든 웃음을 지어보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겉으로 보는 프랑스 사람들의 삶은 대체로 분주하거나 치닫거나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들 나름대로의 경쟁 논리가 있을 것이고, 내색을 안 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뭐든 개의치않고 자기 스타일대로 사는 게 자기들끼리 잘 통하는 건지도 모른다. 여하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기에는 투입하는 시간이나 노력에 비해 윤택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어젯밤 지나왔던 컁콩스 광장(Pl. des Quinconces)과 라 부흐스 광장(Pl. de la Bourse)을 둘러보는 것으로 일과를 마쳤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유산으로 오늘날까지 먹고 산다는 우스갯소리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절반이 맞는 까닭은 실제로 이들 국가들이 관광업으로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 이외 지역이 아니더라도 유럽 지역 안에서 또한 서로 관광에 대한 수요가 많다. 북유럽 사람들은 따듯한 햇살을 찾아 남유럽으로, 남유럽 사람들은 발달된 문화를 접하기 위해 서유럽을 찾는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이 틀린 까닭은 유럽 국가들만이 풍부한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중국의 병마용갱, 인도의 타지마할,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같이 초인간적인 건축물이 유럽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럽 역시 수많은 전쟁을 치렀고 그렇다고 자원이 풍부하다고 할 수 없다. 자연재해가 적은 온화한 기후와 도시가 발달하기에 안정적인 평지가 많다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하지만 이들은 대서양을 축으로 G7이라는 협의체를 만들어서 세계질서를 주도해 왔다. 물론 미국의 헤게모니가 도전 받는 상황에서 이러한 구도는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그럼에도 모바일로 받은 열차표 한 장을 보면서 생각을 하게 된다. 파리에서 툴루즈로 향하는 열차표에는 내가 이동하면서 발생시키는 탄소량이 초록색 나뭇잎 로고와 함께 표기되어 있다. 이를 보면서 참 남다르다고 느끼면서 약간은 유별나다는 생각과 함께 웃음이 난다. 조금이라도 환경을 생각하게끔 하는 이런 노력이 이들의 ‘뛰어난’ 사고방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더 정확히는 이들이 ‘주도’하고 싶은 담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쨌든 오늘날 환경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적어도 프랑스에서 활발히, 그리고 보편적으로 진행되고 있고, 자체적인 경제를 아주 크게 형성하고 있다. 무엇이 이 사람들이 ‘환경’에 대해서, 또는 ‘이전에 얘기해보지 않은 담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게 만드는 것일까. 그리 부지런하지 않은 이 사람들이 새로운 담론에 착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원동력이라는 게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 저녁에는 어제 갔던 작은 광장(Pl. Fernand Lafargue)의 이탈리아 음식점으로 갔다. 보르도에 왔으니 와인을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어디로 가야할지는 모르겠고, 주인에게 물어보니 이 광장 일대의 레스토랑 아무데나 들어가면 된다고 알려주었는데 알고 보니 어제 갔었던 그 광장이었다. 길게 고민하지 않고 어제 갔던 레스토랑을 다시 한 번 찾았는데, 어제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갔더니 테라스에는 이미 사람이 만원이었다.
어제는 음료로 맥주를 주문했지만 오늘은 레드와인을 주문했다. 와인은 강-중-약(Tonique-Equilibré-Léger) 중 약한 것으로 주문했다. 나는 술을 마셔도 티가 나지 않아 사람들이 술을 잘 마시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실제로는 술을 잘 하지 못해서 어지간해서는 청량감 있는 맥주 정도만 마시는 편이다. 와인도 레드와인은커녕 로즈와인도 잘 먹지 못하고 화이트와인을 마신다. 다만 저녁메뉴로 주문한 요리가 소고기로 만들어져서 메뉴에 맞춰 레드와인을 주문했고, 나중에 강한 걸 하나 더 마셨더니 취기가 올라왔다. 마침 부슬부슬비가 왔기에 가게를 나선 다음 생 엉드헤 성당까지 걸어간 다음 숙소가 있는 카푸상 시장 쪽으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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