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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의 일기: 시간의 육중함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rs 2022. 3. 1. 21:07
# 페후 광장(Pl. du Peyrou) 모퉁이의 한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앙젤로가 추천한 과학박물관(Cité d’espace)을 갈까도 몇 번인가 생각했지만 다음날 에어버스 공장 견학을 신청해 놓은 상태여서 가지 않기로 했다. 카페에는 인근 툴루즈 대학의 학생으로 보이는 듯한 손님들이 많아서, 커피 한두 잔을 시켜 놓고 여럿이 모여 앉아 있는 모습도 보인다.
정오가 되기 전에 카페를 나와 라파예트 가(R Lafayette)에서 비건 샌드위치를 사들고 피에흐 구둘리 정원(Jardin Pierre Goudouli)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이곳 정원에는 회전목마(Carousel)가 있다. 도시 어디를 가도 회전목마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데, 프랑스 사람들은 이런 감성을 좋아하는지 아이들도 타지만 가끔은 어른들도 탄다. 도시 한가운데에서 아이를 회전목마에 태워놓고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어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저 사람은 무슨 기분을 느끼고 있을까 생각한다.
# 프랑스어에는 ‘싸다(cheap)’를 가리키는 별도의 형용사가 없다. ‘비싸다’를 가리키는 ‘cher’가 있고, ‘싸다’는 여기에 부사 ‘덜(moins)’을 붙여 ‘moins cher’가 된다. 한 번은 좀 더 저렴한 걸 찾기 위해 ‘pas cher’라는 표현을 쓴다거나, 가장 저렴하더라는 최상급 표현을 만들려고 ‘le plus moins cher’라는 황당한 표현을 쓴 적도 있다. 같은 로망스어 계열에서도 스페인어(barato≠caro), 이탈리아어(economico≠costoso)에 값을 비교하는 형용사가 따로따로 있는 걸 생각하면 좀 독특하다.
일단 ‘싸다(moins cher)’는 표현에 부사가 붙으니 ‘비싸다’를 가리키는 ‘cher’가 먼저 있었다는 건 분명한 것 같다. 오늘 알비(Albi)의 길을 걷다가 문득 프랑스사람들에게는 왜 ‘cher’가 먼저 인식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보통 소도시이면서 유명한 유적이 있을 경우 관광에 의존한 상업시설들이 무질서하게 우후죽순 들어서게 마련이지만, 알비는 아주 작은 마을임에도 아기자기하고 독특한 가게들이 골목골목에 자리하고 있었다. 몽마르트 언덕 일대에서 물건을 덤핑으로 판매하는 가게들도 보았지만, 프랑스에서는 별 것 아닌 것들도 ‘값나가는(cher)’ 느낌이 들게 상품을 만들거나 진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툴루즈 마타비오 역을 출발한 열차는 한 시간여를 지나 알비 역(Albi Ville)에 도착했다. 알비는 어제 갔던 카르카손보다도 작은 도시 같았다. 마찬가지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도시로, 알비와 카르카손 모두 툴루즈로부터 한 시간 거리로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두고서 사람의 힘으로 거대한 건축물을 쌓아올렸다는 게 인상적이다.
두 도시가 가까운 거리이기는 하지만 두 도시가 끼고 있는 강(江)은 다르다. 강이라고 부르기에는 폭이 좁은 물길이기는 하지만, 카르카손은 오드(l’Aude)를, 알비는 타흔(le Tarn)을 끼고 있다. 알비는 다시 생 세실 성당(Cathédral Saint-Cécile)을 중심으로 하는 좌안과, 마들렌(Madeleine)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우안으로 나뉜다. 이 두 지역은 퐁비으(Pont Vieux)와 1944년 8월 22일 다리라고도 불리는 퐁뇌프로 연결된다. 퐁뇌프가 가리키는 날짜는 알비가 독일군으로부터 해방된 날짜를 가리키며, 지어지기는 1867년에 개통되었다.
우안이든 좌안이든 모두 중세(13세기 전후)에 지어진 오래된 도시다. 11~12세기 렁그독(Languedoc)과 프로방스(Province) 지역에서 확산된 알비주아(Albigeois)라는 종교운동에 힘입어 카르카손, 아비뇽, 툴루즈, 알비, 몽토벙 같은 도시에서 눈에 띠는 건축 사업이 이루어졌다. 간단히 말해 이단을 척결하기 위한 십자군이 결성되고 이를 독려하는 움직임이 일었던 지역으로, 실제 종교건축물들을 들어가보면 당시의 광기가 느껴질 만큼 신을 위한 공간에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알 수 있다.
알비의 심벌은 과연 생세실 성당이 될 텐데, 생세실 성당은 밖에서 보는 외관도 굉장히 독특하고 그 규모에도 압도되지만, 내부가 특히나 구경할 만하다. 이른 오후 시간에는 미사 중이어서 제대로 둘러보지 못하고 늦은 오후에 다시 한 번 들러 표를 끊고 내부까지 둘러보았는데, 유럽의 성당을 다니다보면 어느 순간 그 성당이 그 성당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지만 생세실 성당의 내부는 진공 오르간에서부터 벽화에 이르기까지 평범하지 않은 것이 많았다. 파리의 생트 샤펠도 물론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주는 경이감이 있지만, 생세실 성당은 규모 면으로나 내부에 새긴 조각의 양과 벽화만 해도 충분히 볼거리가 되는 것 같다.
# 퐁비으를 따라 타흔 강을 가로지르고 마들렌 지역을 지나 다시 퐁뇌프로 다시 건너왔다. ‘Sérès’라는 시내의 한 카페에서 디저트에 커피를 잠시 마셨다. 싱긋하며 웃어보이는 직원의 친절함에 마음 한편으로 고마우면서도, 브라우니(Brownie)가 ‘브후니’가 되는 상황들이 아직도 잘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 영어가 뛰어나지도 않다보니 이 또한 이율배반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파리보다는 파리 바깥으로 올 수록 사람들이 오히려 따듯하다고 느껴져서 좋다.
오후 내내 햇살이 강했고 생세실 성당히 해를 등지기 시작하면서 마을 전경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저녁이 되기 전 다시 한 번 타흔 강을 건너 노을을 마주하는 알비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알비 역에 맨 처음 내렸을 때는 너무 작은 도시인 것 같아 괜히 왔나 싶었는데, 마을을 한 바퀴 반 정도 도는 동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흔 강을 건넌 상태에서 다시 되돌아오는 대신, 마들렌 역을 이용하기로 했다. 마들렌 역에서 다시 한 번 생세실 성당의 어두운 그림자가 보였고, 쉽게 함락될 것 같지 않은 시간의 무게를 다시 한 번 가늠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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