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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의 일기: 벙리유(banlieue)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rs 2022. 3. 8. 06:37
# 이번 주부터 다시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기록을 남기고 있는 열한 시 이 시각에도 노란 불빛이 흘러나오는 연구실이 바라다보인다. 다만 원래 14구에서 오후에 예정되어 있었던 수업이 불시에 취소되었는데, 비는 시간을 이용해 이번 주 읽어야 할 논문을 읽었다. 14구로 넘어오기 전 점심시간에는 학생식당에서 우연히 Z를 만나 식사를 하고 뤽상부르 공원까지 함께 산책을 하고 왔다. 날씨가 풀리는 듯하다가도 다시 추워진다.
# 14구 캠퍼스에서 논문 한 편을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읽다가 지루해져서 잠시 밖을 나섰다. 아무래도 바람도 좀 쐴 겸 텀블러에 커피라도 담아올 생각으로 인근 카페를 향했다. 14구 캠퍼스가 14구 외곽 끝에 위치하기 때문에, 카페를 가는 길은 행정구역상 파리를 벗어나게 되어 있다. 흔히 방리유 또는 벙리유(banlieue)라고 하는 파리의 교외 구역이다.
벙리유는 흔히 우범지역의 온상으로 알려져 있지만 파리를 둘러싼 지역이 워낙 넓다보니 지역에 따른 편차가 있다. 보통은 샤를 드골 공항에서 넘어오는 길목에 자리한 파리 외곽의 동북부 지역이 분위기가 가장 음산하고, 센강을 끼고 있는 서부는 오히려 파리 시내보다도 더 쾌적한 느낌이다. 오늘 내가 가로질렀던 지역은 파리로부터 남쪽에 있는 지역으로, 수도권 서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슬럼가와는 거리가 있었다. 시내는 정갈하고 상가시설 또한 서울 여느 곳 못지 않게 잘 되어 있는 편이었다.
다만 파리를 벗어나면서부터는 오스마니안 양식의 건물은 완전히 사라지고,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냥갑 모양의 건물들이 주를 이룬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도 대단히 평범하다. 그럼에도 카페가 있는 쇼핑몰 건물로 들어갔을 때는 생각보다 많은 대형 가게들이 있어서 파리 외곽에서도 비교적 잘 계획된 지역인 것 같았다. 대신 치안에 대한 걱정이 거의 없는 파리 대부분의 지역과 달리 이곳에서 마주친 부랑아들은 특히나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긴다.
L과 이야기를 해보면 프랑스에서는 아주 최근까지도 테러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고 하는데, 왜 유달리 프랑스에서 이런 사건이 빈번한지 물으면 본인도 정확히 모르겠다고 한다. 나 또한 구체적으로 질문을 더 하지 않았다.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트라우마일 것 같기 때문이다. 이미 유색인종을 구분하기에는 이민자 사회가 너무 거대하고 사회에서 활동적으로 살아가는 2~3세대도 많지만, 조금 위험해 보인다 싶으면 열의 아홉은 유색인종인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몽파흐나스 역을 가도, 보르도 역을 가도, 심지어 몽생미셸의 숨겨진 골목을 돌아다녀도 실탄이 장전된 장총으로 무장하고 경계를 다니는 2~3인 1조의 군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점점 더 미디어에 남길 수 있을 만한 악랄한 방식으로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차별 공격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어디까지나 사람이 하는 일이어서, 군인이 투입되지 않는 시설들은 치안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 오후에는 재정학 수업이 있었다. 항상 정장 차림으로 나타났던 AD 교수는 오늘은 어쩐 일인지 캐주얼 차림으로 강의실에 와 있었다. 재정학 수업은 이곳에 와서 듣는 수업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수업이다. 오늘은 수업장소에 네 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궁금한 점이 있으면 편하게 질문을 할 수 있다. 여전히 부족한 점은 많지만 모르는 것들을 메워 간다는 생각으로 수업에 임하고 있다.
수업이 대체로 만족스러운 반면 행정적인 문제 때문에 진이 빠지지만 이 또한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비자 문제나 거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프랑스에서 소득 없이 머물다간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를 접하다보면 긴장이 되지만, 일단 비자나 거주 문제처럼 필수적인 문제들은 해결이 되어 있다. 다만 프랑스에 어영부영 머무르려고 온 게 아니라 ‘공부하면서’ 머무르려고 온 것이기 때문에 추가적인 학사행정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있음에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힘들게 한다.
그러고보면 이곳에 와서 주고 받은 메일을 세어보니 두 달이 안 되는 기간에 무려 200통에 가까운 메일을 썼다. Z에게 이런 상황이 일반적이냐고 물으니, 아무렇지 않게 원래 그렇다고 한다. 프랑스는 장점이 참 많은 나라이지만, 비효율적인 행정은 이곳에 잠시 머물다가는 외국인뿐만 아니라 자국민에게도 적잖은 손해를 가져오는 것 같다.
오늘 예고 없이 휴강된 수업도 학생들은 내용을 알지 못한 채 강의실에 도착해 앉아 있었다. 이제는 당황스러움이 분노로 바뀌지도 않고 그냥 행정실에 해당 내용을 알렸다. 역시나 시간표를 관리하는 행정실은 해당 내용을 모르고 있다. 하지만 이미 몇 주 전 날선 메일을 주고 받으며 한 차례 마찰을 겪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구체적인 질문은 생략하고 좋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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