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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의 일기: 신발도 길이 들어야Vᵉ arrondissement de Paris/Avril 2022. 4. 3. 20:02
# 여전히 곤혹스러운 일요일이 왔다. 도서관마저 문을 닫고 식사를 해결하기도 가장 곤란한 날이다. 원래는 이번 주말 여행이라도 다녀오려다가, 지난 남서부 지방을 다녀오며 쓴 여행경비를 결산해보니 적지 않은 지출이 발생해서 잠정 보류했다. 숙소든 교통이든 최저가격으로 다녀왔는데도—예를 들면 ‘le moin cher’라는 표시가 뜨는 열차표로만 이동하고 숙박은 최대 하루 60~70유로 선에서 해결했다, 당연히 기념품을 산 일도 없었고..—일단 파리를 벗어나는 순간 비용이 불어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곰곰히 따져보면 내가 다녀온 툴루즈만 해도 파리로부터 680km 가량 떨어져 있다보니 사실상 마르세유(파리에서 780km)를 다녀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서울에서 부산까지가 400km 정도다. 그렇다보니 이동과 숙식에 드는 이러나 저러나 비용이 붙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는 않지만, 가기 전까지, 그리고 가 있는 동안에는 지출에 대한 감이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1박을 끼고 각각 이틀씩 랭스와 생말로까지 다녀왔으니... 이번 주부터 두 번째 바캉스이지만 여행 욕심을 줄여야 할 것 같다.
# 아침에 문서작업을 하느라 스타벅스에 꽤 오랜 시간 머물러 있었는데, 매장 안에 들이닥친 노숙자가 다짜고짜 내 앞에 와서 음료를 사달란다. 협박에 가까운 명령조였다. 일요일 아침 스타벅스에는 나처럼 작업공간이 필요한 사람들이 몰려 평일보다도 사람이 많은 편인데, 그 중에서도 내게 온 걸 보면 밖에서부터 나를 지켜봤던 것 같다. 내게 괴사된 양손의 다섯 손가락을 들이밀면서 음료를 사달라고 언성을 높이는데, 무섭다는 생각은 커녕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하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실제로 카드밖에 없었기 때문에 잔돈이 없다고 말하자 상대는 더 격분했고, 지금 마시고 있는 음료는 뭐냐며 다시 괴사한 손가락들을 내 눈 앞 가까이 들이밀었다. 아무래도 음료를 사는 것으로 상황을 종료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직원이 제지에 나섰다. 이곳에는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나름 사회보장이 잘 되어 있다고 하는 이곳에서 거리에서 살아갈 정도면 정말 본인이 뜻하지 않은 피치 못할 일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든다. 한국이나 프랑스나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의 모습은 닮아 있다. 어느 정도 위선을 포함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 사람이 괴사된 열 손가락을 내게 위협적으로 흔들어 보일 때에는 끔찍하다는 느낌 한켠에 그 사람의 절박함으로 인해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 오전에 이런저런 작업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조금 늦은 점심을 먹은 다음 몽파흐나스 묘지로 나가보았다. 기숙사에서 걸어가면 10분 여밖에 걸리지 않지만 좀처럼 발걸음을 할 일이 없었던 곳이다. 이전에 페흐 라셰즈를 한 번 다녀온 터라, 도심 속 묘지를 찾는 게 이전만큼 꺼림직하지는 않았다. 그때와는 계절도 바뀌어서 나뭇가지마다 봄기운이 깃들어 있고 날씨 또한 화창하다. 나무가 우거진 느낌이 드는 페흐 라셰즈와 달리 몽파흐나스 묘지는 도심 한가운데에 체스판처럼 구획되어 있어서 외진 느낌도 덜 들기도 하고..
페흐 라셰즈도 그렇지만 몽파흐나스 묘지 역시 문인(文人)들의 묘지가 많은 게 눈에 띈다. 샤를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 사뮈엘 베케트(Samuel Barclay Beckett), 수전 손택(Susan Sontag)이 이곳에 영면(永眠)해 있다. 모두 한 번씩은 작품을 접했던 작가들이다. 특히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대학교 시절 친구와 연극으로 보러 갔었다.
물론 철학자들도 있다.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와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묘소는 북쪽 출입구에 바로 접해 있고, 루마니아 철학자 에밀 시오랑(Emil Mihai Cioran)의 묘소도 있다. 그밖에 사회학자 에밀 뒤르케임(David Émile Durkheim), 자크 시라크(Jacques René Chirac) 전 대통령, 화가 만 레이(Man Ray), 가수 세르주 갱스부르(Serge Gainsbourg)의 묘가 안치되어 있으니, 어찌보면 페흐 라셰즈보다 유명인사가 많은 것 같기도 하다.
산책이라는 관점에서는 페흐 라셰즈가 좀 더 자연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몽파흐나스 묘지는 체스판처럼 구획되어 있어서 길이 사방으로 질서정연하게 나 있다. 또한 어느 방향으로 다녀도 멀리 몽파흐나스 타워가 북극성처럼 시야의 한쪽을 차지한다. 가볍게 산책한 다음 공부할 장소를 찾는다는 게, 몽파흐나스 묘지를 쏘다니다보니 '산책'하는 데 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진짜 이곳 사람들처럼 시간 관념이 무뎌지는 건지 쥐도 새도 모르게 시간이 삭제된 줄 알았다.
# 프랑스에 오기 전 파리에 대한 지식이 그리 많지 않을 때는,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몽파흐나스 지역이 도쿄의 롯폰기(六本木) 같은 곳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아마 ‘재개발’이라는 키워드로 두 지역을 연결지어 생각했던 것 같다. 멀리서 보이는 몽파흐나스 타워의 외관과 달리 몽파흐나스 지역 일대는 대체로 허름한 편이다. 몽파르나스 지역 자체는 20세기 초 몽마르트에서 건너온 예술가들이 활동했던 공간이지만, 20세기 후반이 되면서는 59층짜리 고층 건물을 지어올리는 등 여러 공간상 변화를 겪었다.
얼마전 HB의 수업을 들으면서 알게 된 바에 의하면, 몽파흐나스에는 일찍이 브르타뉴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많이 정착했다고 한다. 실제로 몽파흐나스 역 자체가 브르타뉴 행 열차의 발착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몽파흐나스 일대에서는 브르타뉴식 크레페(Crêpe bretonne)를 메뉴로 내건 레스토랑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HB의 설명에 따르면, 브르타뉴식 크레페는 소금 간을 하는 방식(galette de sarrasin)과 설탕 간을 하는 방식(galettes de blé)으로 레시피가 나뉘는데, 브르타뉴 사람과 친해지고 싶다면 크레페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게 현명한 방법이라고.
# 일요일 저녁 공용주방이 그나마 한가한 편이다. 저녁 일곱 시가 넘도록 공용주방이 텅 비어있길래 부랴부랴 식사를 준비한다. D는 촉이 있는지 늘상 내가 요리를 할 때마다 공용주방에 모습을 보인다. 목에 카메라를 든 채 주방에 들어오며 반갑게 인사한다. 파리 시내를 활보하고 오는 길이란다. 샤틀레에서 에투알, 에투알에서 오르세, 오르세에서 노트르담까지 걸었다고 하니 파리 시내를 반시계 방향으로 제대로 일주한 셈이다.
니콘 카메라를 내게 보여주며 오늘 찍었다는 사진들을 보여주는데, 그 중에는 팔레 드 쥐스티스에서 경찰을 모델로 찍은 인물사진도 있었다. 팔레 드 쥐스티스라면 파리 시내에서 경찰이 가장 많이 출동하는 곳 중 하나다. 시테를 가로질러야 할 버스가 출동한 경찰에 막혀 센 강을 한참 우회하는 일도 다반사다. (그 다음으로 경찰이 자주 출동하는 곳이 헤퓌블리크 광장 일대이지 않을까 싶다) 여하튼 프랑스에서는 경찰 사진을 못 찍게 되어 있는데 무슨 수로 찍었냐고 물었더니 직접 경찰에게 부탁을 했단다. 사진 속 경찰은 프랑스 경찰 특유의 제복 모자를 쓴 채 래브래도 리트리버처럼 근엄하게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더니 카메라를 들이대는 그가 이번에는 요리하는 내 사진을 찍겠단다.
두부김치 요리를 다 한 뒤 D에게 맛을 보라고 권했다. 김치가 들어가는 요리다보니 김치 얘기를 잠깐 나눴는데, 독일에 있을 때 친구와 김치를 만든 적이 있다고 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김치가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데.. 그런데도 김치를 만든 다음 발효까지 시켰다며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거짓은 아닌 것 같다. (그는 한번은 심각한 표정으로 한국이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라며 뜬금없는 말을 하기도 한다.) 내가 쓰는 쇠젓가락을 가져와 두부와 김치볶음을 함께 먹는 법을 가르쳐 줬는데 그는 젓가락질이 무척 서툴면서도 맛있다고 엄청 좋아한다. 음식을 만들고 주변 사람들이 맛있게 먹으면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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