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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5일의 일기: 운수 좋은 날Vᵉ arrondissement de Paris/Avril 2022. 4. 5. 17:35
Parc des Buttes-Chaumont
# 오늘 아침은 약속이 취소되는 일로 시작되었다. 약속이 있든 없든 요새 대체로 학교에 머물고 있기는 하지만, 약속 직전에 취소라니 유쾌하지만은 않다. 몇 주 전부터 부르트기 시작한 입술은 점점 더 불그스름하게 부어올라 입을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다. 차라리 약속이 취소되길 잘 됐다 싶기도 하다. 오전에 학교에 있다가 점심에 가장 가까운 약국을 찾아 처치할 수 있는 크림을 샀다. 20.80유로. 쉽게 돈이 샌다. 2주 동안 열심히 발랐던 크림보다는 다행히 효과가 훨씬 좋다. 돈 좋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Parc des Buttes-Chaumont Parc des Buttes-Chaumont Parc des Buttes-Chaumont
학생식당권을 30유로 충전했는데 충전금액이 인식되지 않아 식당 카운터에서 태깅을 하니 빨강으로 외상금액이 뜬다. 내일은 시스템 연동이 되어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고른 메뉴는 남은 재료가 없어서 다른 아무 메뉴로 점심을 해결했다. 영 꾸물꾸물한 일들뿐이다. 점심을 먹고 곧장 도서관에 가는 대신 공원이라도 잠시 거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밖에 나서기 좋은 날씨는 아니지만, 기숙사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뷔트 쇼몽 공원을 향했다.Parc des Buttes-Chaumont Parc des Buttes-Chaumont Parc des Buttes-Chaumont
이렇게 흐린 날씨에 공원을 찾으면 좋은 점은 공원에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공원을 거닐며 기분을 달랬다. 폐광을 공원으로 조성한 이곳은 구간에 따라 급격한 경사가 있다. 나는 몽마르트 언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벤치에 앉아 오랜 시간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동생과도 연락을 주고 받았다. 날씨가 좋은 날에 오면 더 경치가 좋겠지만, 대신 사람이 많겠지 하는 생각. 뷔트 쇼몽 공원을 나온 다음 생 마르탱 운하까지 쭉 걸어나갔다.Parc des Buttes-Chaumont # 파리에서 몇 달 지내면서 뒤늦게 깨달은 사실은, 도시 어디를 가도 전봇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선(電線)을 모두 땅 밑에 깔아놓았기 때문이다. 파리의 전선 지중화율은 100%다. 도시에 전봇대가 없다보니 어딜가도 풍경이 쾌적하고 정갈할 수밖에 없다. 대신 매복된 전선을 손보려면 보행자의 통행이고 뭐고 간에 도로를 큼직하게 파내서 작업을 한다.
오늘 머물렀던 자리
또 한 가지 파리 시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건 주유소(station essence)다. 주유소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형태의 커다란 주유소는 파리 외곽이나 방리유로 가야 나타난다. 그게 아니라면 간이 거치대—특히 전기자동차에 쓰이는 충전소—는 도시 곳곳에 있는데 도시 미관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다. 이런 사소한 점들을 보면서 이 도시가 오랫동안 관리되어 왔다는 걸 실감한다.Parc des Buttes-Chaumont Parc des Buttes-Chaumont
# 저녁에는 S와의 약속이 있었다. 성시에 도벙통(Censier-Dauventon) 역에서 만나 몽주 광장을 지나 태국 요리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17구에 사는 S가 굳이 5구까지 온다고 했을 때 내심 어딜 가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5구는 학생들이 많은 곳이어서 에투알 일대처럼 근사한 레스토랑이 많지 않다. 이미 수업에서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학교 바깥에서 보니 S는 학생이기보다는 사회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S는 학업보다는 ‘연수’ 같은 느낌으로 휴양 겸 이곳에 와 있다고 했다.Parc des Buttes-Chaumont Parc des Buttes-Chaumont Parc des Buttes-Chaumont
그래도 대화가 잘 맞는다. 일본의 구태의연한 조직 문화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모두 다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그의 얼굴은 꼭 어린애 같기도 하다. 정부에서 일을 한지 10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소년 같은 표정과 말투를 써서 정말 일본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인들은 자기 표현을 절제한다고 생각했는데, S는 무엇 때문인지 흥에 겨워 쉼없이 이야기를 한다. 태국 레스토랑을 나선 뒤 팡테옹을 지나 뤽상부르 공원 바로 앞 파트롤(Patrol)이라는 가게에서 술을 한 잔 더 했다.Parc des Buttes-Chaumont Parc des Buttes-Chaumont 나는 맥주 한 잔에 칵테일 한 잔, 그는 와인 한 잔에 맥주 두 잔을 비웠다. 칵테일이 입에 맞지 않아 천천히 마시자 그는 보조를 맞춘다며 맥주를 두 잔째 시켰다. S는 일본 사회의 여러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얘기했다. 코로나 대응의 비효율성, 경쟁력을 갉아먹는 일본의 통신사업, 또는 사양길로 접어들었만 여전히 중요한 원천기술을 가진 일본의 여러 전자업체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정부의 원전 정책 방향, 유권자를 의식하는 정치인들 때문에 제대로 된 정책을 수립할 수 없는 현실 등등등… 그런 문제 일본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 얘기해주었다. 중국 경제가 지금처럼 계속 잘 나갈 건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Pl. du Colonel Fabien 의외로 S가 가장 재밌다는 반응을 보인 건, 내가 군 복무를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였다. 한국사람들 군 복무한다더니 정말 했던 거냐고 큰 관심을 보였다. 희한하게도 일본 사람들—히로시마의 이자카야에서 만났던 중년 남성도 그렇고—은 군대를 다녀왔다는 것 자체에 각별한 관심을 보인다. 하여튼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정말 많이 나눴던 것 같다. 한국의 대통령제와 일본의 의원내각제가 정치문화를 어떻게 바꾸는가 같은 뜬금없는 이야기도.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은 퇴임 후 왜 좋은 일이 없냐고도 묻는다.
조직 문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이미 내가 잘 알고 있던 대로 일본은 상명하복 문화가 매우 강하다고 했다. 혹시나 일본에서 일을 트고 싶다면 노미니케이션(마시다(飲む; 노무)+소통(커뮤니케이션))이 아주 중요하단 걸 알아두어야 한다며. 내가 조금 신기했던 부분은 문제제기 없이 상명하복을 하는 데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는 점 정도다.
와이프가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말하던, 하지만 생글생글 계속해서 술을 주문하던 S는 밤 10시가 조금 넘어 와이프의 연락을 받고 슬슬 집으로 돌아가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뤽상부르 역에서 그를 배웅해주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묘하게 담배향이 나던 칵테일 탓인지 약간 몽롱했다. Dias de los Muertos. 매년 11월이 되면 멕시코에서 기린다는 망자(亡者)의 날. 칵테일을 고르면서 잠시 생각했던 것처럼, 산 자들의 세계에서 그만 빠져나오고 싶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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