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 7일의 일기: 건축기행—파리 서부Vᵉ arrondissement de Paris/Avril 2022. 4. 7. 19:03
# 오후 HB의 수업이 있을 때까지 오전과 오후 학교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번 주는 부활절 기간이기 때문에 일부 수업은 진행되지 않고, 내가 듣는 수업 가운데에서는 프랑스어 수업만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목요일마다 듣던 문화인류학 수업이 이번 주는 휴강이었고, 원래 듣던 HB의 점심 수업에 덧붙여서 오후 수업까지 참여했다. 오늘 진행하는 두 번째 수업에 참여해도 괜찮겠냐고 물었더니 pourquoi pas ?, 흔쾌히 받아주었다.
HB 수업의 커다란 특징은 아주 사소한 주제에서 출발해 수업 범위를 점점 넓혀 나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오늘 파리에 내렸던 ‘소나기(des averses)’에서 시작된 얘기는 파리의 봄 날씨로 이어진다. 파리의 봄날씨는 잠시 개였다가(des éclaircies) 다시 비가 후득후득 내리는 변덕스런 날씨다. 이어서 등장하는 표현은 Les giboulées de mars. 최대한 프랑스어다운, 그렇지만 현학적이지만은 않은 표현들을 알려준다. 달팽이집처럼 서서히 이야기를 넓혀나가는 그녀의 수업방식에 처음에는 적응을 못했는데, 이제는 그런 HB의 수업방식을 좋아한다.
그렇게 첫 번째 수업은 소나기에서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문구로 주제를 옮겨갔다. «On ne voit bien qu'avec le cœur. l'essentiel est invisible pour les yeux». 가장 소중한 것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러다가 이내 HB는 주섬주섬 프로젝터를 연결한다. 오늘 준비한 유일한 수업자료 같아 보인다. 그녀의 수업은 늘 콩트 같기도 하고 즉흥극을 펼치는 것 같다. 정돈되지 않은 것 같지만 그 자체로 완결된 막간극.
지난 수업에서 얘기했던 에디트 피아프의 영상과 음악을 들려주며 몇몇 표현들을 들여다본다. 수업에서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나 <(Je ne regrette rien)>을 접하니 느낌이 새롭다. 그 와중에 에디트 피아프의 ‘r’ 발음이 어떻게 다른지 다른 유럽국가들의 ‘r’ 발음과 비교해가면서 설명한다. 재미있는 수업방식이다.
계획 없이 두 번째로 들어간 HB 수업에서는 참석자가 나와 이탈리아에서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은 프란체스코라는 친구 둘 뿐이었다. 개인 교습이라 해도 될 만큼 밀도 있게 말하기 연습이 이뤄졌다. vousvoyer와 tutoyer와 관련된 개인적 경험들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은행계좌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vousvoyer를 썼던 일들을 얘기했고, 프란체스코는 문서 서두에 ’Cher~’로 시작하는 호칭과 관련해서 얘기했다. 가령 이탈리아에서는 ‘Cher gentil professeur XX’처럼 상대방에게 붙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표한다고 한다. HB는 이탈리아 식으로 호칭을 붙이면 여기선 곤란하다며 걸쭉하게 얘기를 쏟아내는데, 그녀가 흉내내는 이탈리아 학생들의 화법을 듣다가 프란체스코와 마주보고 실소를 터뜨렸다.
# 해가 아직 한창 높이 있을 때, 카메라를 챙겨들고 기숙사를 나섰다. 황색 10호선을 타고 자벨-시트로엥(Javel-Citroën) 역에서 내렸다. 오늘 내가 가려는 곳은 엉드헤 시트로엥 공원(Le parc André Citroën)이다. 파리에 있다보면 오스마니안 양식의 건물들을 보는 것도 좋지만, 곳곳에 현대 건축물을 둘러보는 것 좋다. 퐁피두 센터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파리에서 둘러볼 만한 건축물들의 위치를 체크한 다음 동선을 짜보았는데, 건축물이 많아 구역을 나눠서 둘러보아야 할 것 같았다. 오늘은 먼저 평소 좀처럼 올 일이 없는 파리 서부로 발걸음을 해보기로 했다.
엉드헤 시트로엥 공원은 이름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시트로엥 공장부지를 공원으로 조성한 곳이다. 폐광에서 공원으로 탈바꿈한 뷔트 쇼몽 공원과 비슷한 사례다. 뷔트 쇼몽 공원이 파리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원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면, 시트로엥 공장부지는 파리에서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공원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반들반들(?)한 느낌도 있고 사람도 많지 않다. 공원 한가운데 열기구가 놓여 있고, 남서쪽으로는 일 드 프랑스와 파리의 관공서와 국제기구가 입주한 어두운 유리 파사드의 건물이 풍경에 변화를 불어넣는 공원이다.
공원을 빠져나와 센 강을 따라 걷다보면 자연히 건너편 16구가 보인다. 부르주아가 사는 곳의 대명사, 16구. 그 16구로 보이는 건물들은 대체로 신식이어서, 파리 동부와는 확연히 분위기가 다르다. 15~16구에 이르면 센 강 하구는 조금 더 넓어지고, 센 강변에서 산책이나 조깅을 즐기는 사람들도 잘 보이지 않아서 한적한 느낌이 많이 든다. 나는 올리브 색깔과 황금색을 섞어 놓은 듯한 미라보 다리(Pont Mirabeau)를 건너 16구에 접어들었다.
다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걷던 방향 그대로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오텔 기마흐(Hôtel Guimard)를 만날 수 있다. 엑토흐 기마흐(Hector Guimard)가 설계한 이 작은 빌라에는,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이 고스란히 집약되어 있다. 사실 프랑스에서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은 메트로다. 지하철 역사, 출입문, 지상 철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간에 아르누보 양식이 활용되고 있다. 실제 엑토흐 기마흐 역시 파리 메트로 역사의 출입구를 직접 디자인하기도 했고.
끝으로 향한 곳은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라호슈(Maison La Roche)다. 오텔 기마흐로부터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나는 학생 할인을 받아 5유로를 지불하고 입장할 수 있었다. 건축물을 관리・운영하는 르 코르뷔지에 재단의 독특한 점이라면 방문객들의 국적을 체크한다는 점이다. 빌라 사보아를 갔을 때도 내 국적을 물었었다. 내가 ‘한국(Corée du Sud)’이라고 말하자, 오늘따라 아침부터 한국 사람들이 유난히 많이 찾았다는 말을 한다. 학생들이 많이 찾는 것 아니겠냐고 물어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면서 한국인들 사이에서 르 코르뷔지에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냐고 내게 되묻는다.
빌라 라호슈 역시 르 코르뷔지에가 처음 도입한 다섯 가지 개념—필로티, 옥상 테라스, 자유로운 평면과 파사드, 길다란 창문—을 모두 잘 따르고 있다. 빌라 사보아와 마찬가지로 르 코르뷔지에와 그의 사촌 피에흐 장느헤(Pierre Jeanneret)에 의해 설계되었는데, 빌라 사보아와 약간의 차이점이라면 색감이 더 풍성하다는 점이다. 특히 1층에 위치한 식당(la salle à manger)에 쓰인 색깔들은 고풍스러우면서도 아기자기한 느낌이 있다.
빌라 라호슈를 나온 뒤 아송시옹 가(R de l’Assomption)를 따라 다시 센 강으로 내려왔다. 원래는 팔레 드 도쿄까지 가볼 생각이었지만, 체력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생각을 접었다. 그흐넬르 다리(Pont de Grenelle)를 통해 시뉴섬(Île aux Cygnes)을 잠시 걸었다. 시뉴섬은 후엘 철교(Pont Rouelle)를 관통하고 비흐에켐 다리(Pont Bir Hakeim)까지 잇는 길고 가느다란 둑방섬이다. 오후에 매우 강한 바람이 예보되어 있었는데, 바람이 구름을 내모는 모양인지 날씨가 퍽 맑아졌다. 점심까지만 해도 소나기가 내렸기 때문에 파란 하늘을 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센 강 위로 에펠탑이 비현실적으로 날렵하게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정면으로 들이닥치는 바람을 뚫고 에펠탑을 사진에 담다가, 비흐에켐 역에서 녹색 6호선을 타고 기숙사로 되돌아왔다.
'Vᵉ arrondissement de Paris > Avril' 카테고리의 다른 글
4월 9일의 일기: 변하지 않는 것 (0) 2022.04.09 4월 8일의 일기: 카메라 (0) 2022.04.08 4월 6일의 일기: 반환점(point de retour) (0) 2022.04.07 4월 5일의 일기: 운수 좋은 날 (0) 2022.04.05 4월 4일의 일기: 수영(la natation) (0) 2022.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