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후 수업이 끝나고 잠시 바스티유 지역에 다녀왔다. 카메라를 수리하기 위해서다. 꽤 오래 전부터 카메라에서 달가닥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어제 카메라를 써보니 뷰파인더에 피사체가 뿌옇게 보이기까지 했다. 이상이 생겼구나 싶어 카메라를 수리를 하기는 해야겠는데, 프랑스에서 수리를 하려니 가게 정보를 알아보는 것도 쉽지 않고 고친다 한들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일단은 원인과 견적이라도 물어볼 겸 인터넷으로 검색한 바스티유의 한 카메라 가게로 향했다.
오늘은 소강상태도 없이 하루 종일 비가 많이 내렸고, 바스티유 지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신발이 눅눅해져 있었다. 가게에 도착한 뒤 수염을 보기 좋게 기른 남자에게 카메라 상태에 대해 설명했다. 카메라를 흔들어 소리를 확인해 보고, 뷰파인더를 확인해보던 그는 잠시 후 후드를 떼어냈다. 그리고는 후드 안쪽으로 장착되어 있던 필터를 다시 끼웠다. 그러고 끝이었다. 이제 뷰파인더 안의 피사체는 또렷이 떴다. 필터가 헐거워진 탓에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나는 줄도 모르고, 카메라 안에 조임쇠 같은 게 나간 줄 알고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메라가 고장난 줄 알고 있던 나는 안도하며 남자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별 것 아닌 일에 혼자 심각해졌다는 사실에 나도 실소했고 그도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옆에서 컴퓨터로 작업하던 여자도 종종 필터가 헐거워지는 경우가 생긴다면서 웃음을 머금었다. 카메라를 맡기게 되면 또 수리까지 얼마가 걸릴까 머릿속으로 계산하던 나는, 이제는 돈이 굳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가게를 나섰다ㅠㅠ
# Forlife. 런던과 파리에서 지점을 두고 있는 이 옷가게는 친환경 의류 제작을 표방하는 곳이다. 기존의 옷들을 재활용해서 옷을 만들거나 탄소배출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생산한다. 옷은 기본적으로 사전주문을 받아 필요한 만큼만 생산한다. 부티크는 판매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맞춤형 옷을 원하는 손님들이 견본을 착용해보고 판매자와 함께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옷을 탐색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화요일은 오로지 약속이 된 손님(RDV)들만을 위해 따로 떼어 놓고 있다.
이곳에서 강조하는 캐치프레이즈는 ‘투명성(transparency)’다. 친환경 컨셉을 표방하는 대부분 가게들과 달리, 그럼에도 가격이 매우 합리적이어서 바스티유까지 나간 김에 근처에 있는 이 가게를 들러보았다. 신기하게도 직원은 내가 한국인임을 알아보았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재고품으로 남은 상품은 전혀 취급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지금 사전주문이 들어가면 빠르면 7월부터 출고가 시작되고 늦으면 10월에 배송이 완료된다고도 했다.
사실 꼭 필요한 옷을 사지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 물건을 제작하는지 줄곧 궁금했던 곳이어서 잠시나마 Forlife에서 옷을 만들고 전달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마레지구에 있는 거의 모든 가게는 kg 단위로 제작과정에서 탄소배출량이 얼마나 들었는지, 또는 얼마나 절감했는지를 표기해 놓는다. 식품에 칼로리를 표시하고 공산품에 소비자가격을 표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는 열차티켓에도 탄소배출량을 표시할 만큼 탄소중립을 지향하는 경제활동 방식이 일상 속 깊이 정착되어 있다. Forlife에서 나를 맞이한 장신(長身)의 금발 청년은 귀찮아 하는 기색도 전혀 없이 Forlife의 생산 방식에 대해 설명을 해준 뒤, 기성품을 살 수 있는 근처의 가게들을 몇 곳 추천해주기까지 했다.
# Rouge et Noir. 학교 안에 이 포스터가 붙은지도 벌써 서너 주는 된 것 같다. 이곳에서는 금요일에 크고 작은 파티(Soirée)가 수시로 열리는데, 부활절 주간인 이번 주 파티는 특별히 거창한 모양이다. 공용주방 바로 맞은 편 방에 지내고 있는 나는, 밤이 되면서부터 파티를 앞둔 이곳의 분주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검정과 빨강으로 드레스 코드를 맞춘 학생들이 한껏 들뜬 상태로 대화를 나눈다. 나도 파티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지만—특히 이렇게 대대적으로 이뤄지는 파티라면 더더욱(!)—부지런하지 못한 탓에 표를 미리 구하지도 못했고, 드레스코드에 걸맞은 옷을 준비할 정성도 물론 부족했을 것이다. 그런데다 사실 나는 프랑스의 파티 문화가 궁금한 것일 뿐, 그렇게 사람들이 붐비고 왁자한 곳을 좋아하질 않는다. 복도 끝에 사는 엉브흐(Ambre)는 빨강과 검정으로 대변신을 한 모습으로 내게 수줍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평소 오며가며 본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본다면 경악스러울 정도로 화려하게 치장을 했는데, 그런 모습이 퍽 유쾌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