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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일의 일기: 시간을 내 편으로Vᵉ arrondissement de Paris/Avril 2022. 4. 2. 21:28
# 오늘은 세 번째로 오르세 미술관에 다녀왔다. 아침에 미술관을 찾았지만 주말인 만큼 사람이 많은 편이다. 오늘은 꼭 고흐와 고갱 작품을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5층을 먼저 향했다. 5층은 유명한 인상파 작품들이 많이 몰려 있어서 항상 붐비는 공간이고, 고흐의 전시실은 그 안에서도 가장 붐빈다. 막상 바로 옆 고갱 전시실로 넘어가면 사람이 확 줄어든다. 후기 인상파인 고흐와 고갱의 전시실을 나온 다음 지난 번에 보았던 인상파 전시실의 작품들도 다시 한 번 쓱 둘러 보았다.
오늘 방문에서 재발견한 화가는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이었다. 그림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가장 프랑스적인 느낌이 든다고 생각했다. 한편 전시실 벤치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르누아르의 <무도회> 작품을 넋놓고 바라보았다. 아무리 다시 봐도 질리지 않고 사랑스런 그림이다. 분홍색 꽃무늬가 박힌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상대방과 춤을 추는 여성의 모습은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우아하다. 맞은 편 남자의 자켓에 사용된 파랑은 충분히 화사하면서도 그림에 균형감을 불어넣는다.
세 번째 방문에서 세 시간 이상을 할애했지만, 여전히 제대로 보지 못한 전시실이 남았다. -1층의 남쪽 회랑 일부를 둘러보지 못한 것이다. 하나하나 다 둘러보다가는 날이 샐 것 같고 점심도 먹지 못한 상태여서 그 정도로 둘러보고 미술관을 나섰다. 오르세 미술관 주변에는 딱히 식사를 할 만한 장소도 없지만 생제르맹 일대는 물가가 비싼 편이어서 가장 가까운 ‘prêt à manger’ 매장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하지만 모자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샐러드에 샌드위치까지 얹어서 주문했더니 결국은 간단한 식사 치고는 퍽 가격이 세다. (+_+)
# 날씨가 너무 추워서 사람들의 복장도 다시 바뀌었다. 모두들 다시 모직 코트나 겨울 점퍼를 입고 다닌다. 두꺼운 점퍼를 입어도 추운 날씨다. 나는 다시 두꺼운 옷을 입는 게 영 내키지 않아서 그냥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다니고 있다.
# 오늘 미술관을 빠져나와 센 강을 가로지른 다음 생토노레 거리를 걸으며 엉뚱한 생각에 잠겼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 쯤 주어진 게 아닐까, 하고. 프랑스에 와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생각보다 잘 해놓고 산다는 점이다. 파리 북부를 제외하면 어딜 가도 근사한 가게가 넘쳐나고, 조경도 필요 이상으로 꼼꼼하게 해놓는다. 또 언제 이렇게 차려놨나 싶을 정도로 화려하고 정교한 물건이 넘친다. 알려진 명품이 아니더라도 작은 문구(文具) 하나, 조그만 디저트 하나도 그렇다. 그런데 사람들은 카페 테라스에 앉아서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대화하는 데 여념이 없으니, 생산 활동은 언제 하는지 어리둥절한 것이다. 이 사람들에게 꿍쳐 놓은 시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막말로 사람들이 어딘가 나사가 풀린 듯 보이다가도, 가게며 식당이며 집이며 꾸며놓거나 무언가 만들어놓는 걸 보면 정말 기똥차게 해놓는다.)
# 영미권도 아닌 프랑스라는 나라에 오게 된 것 순전히 여러 운과 계기가 있었던 덕분이다. 여러 나라의 사회경제에 관심이 많은 내 관점에서 볼 때,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프랑스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여러 경제지표상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프랑스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았던 건, 지표로 드러나지 않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가령 외교나 문화 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소프트파워라든가, 지독할 만큼 각축을 벌이는 정치적 논쟁과 여기서 파생되는 다양한 사회적 서사(敍事) 등등등. (대륙유럽 국가들의 여러 사회경제적 여건들이 우리나라와 맞닿아 있는 게 많다고도 생각했고..)
또 다양한 사회경제 시스템이 존재하는 유럽 각국의 현황을 조망해보기에 프랑스가 가장 적당하다고도 생각했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다보면 프랑스와 인접한 국가들의 사회, 경제, 문화를 고루 접하며 비교하기에 좋다. 남쪽으로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처럼 경제규모가 상당히 큰 국가들이 맞붙어 있고, 북쪽으로는 런던, 파리, 쾰른을 최전선으로 앵글로색슨(영국), 라틴(프랑스), 게르만(독일) 문화권이 공방전을 벌이듯 서로 물러서지 않은 채 맞물려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조그마한 완충지대로 베네룩스가 있다. 북유럽에서 프랑스로 수학하러 오는 학생도 적지 않고, 일찍이 프랑스를 모델로 여러 차례 사회 변혁을 시도했던 러시아에서 오는 학생도 있다보니, 조금 노력한다면 각국의 사회, 경제, 문화에 대해 정말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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