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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8일의 일기: 부활절Vᵉ arrondissement de Paris/Avril 2022. 4. 18. 18:54
# 이번주는 부활절 주간이다. 간밤에는 이따금씩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렸고, 월요일인 오늘도 연휴인 곳들이 많아 도시 전체가 조용한 편이다. 그래도 레스토랑이나 카페는 대부분을 문을 열어서 사람들이 이곳으로 다 몰린 모양이다. 오늘은 평소보다 좀 이른 시간에 학교를 갔다. 오늘은 도서관도 휴관이고 카페테리아에도 사람이 없었다. 카페테리아에서 공부를 하다가 바로 옆 식당에서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뒤늦게 봤다. 부활절 주간에 해당하는 지난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토너먼트 방식으로 대국이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60~70명 되는 사람들이 두 명씩 짝을 이루어 바둑을 두는데, 몰입하는 정도로 봐서는 내가 학교에 오기도 꽤 전부터 대국이 시작된 것 같다. 연휴 이른 아침에 바둑을 즐기는 수십명의 사람들이라니 신기한 풍경이다. 식당 옆 테라스 공간에도 테이블 위해 바둑판을 펼쳐 놓고 햇빛을 쬐며 바둑을 하는 모임이 눈에 띈다.
# 저녁에는 몽파르나스 타워에 다녀왔다. 변덕스런 날씨 때문인지 요새 노을이 무척 예쁘다. 특히 비 갠 뒤 노을이 참 볼 만한데, 그만큼 기상변화를 예측하기가 어려워서 사진을 찍으러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몽파르나스 타워 입장료는 학생 할인이 되더라도 15유로이기 때문에 날을 잘 정해서 가야 한다. 하늘을 곰곰이 보다가 오늘은 사진을 찍으러 나가봐도 될 것 같다는 판단에 몽파르나스 타워로 향했다. 부활절 연휴라는 걸 깜박하고 있었는데, 전망을 보러 온 사람이 꽤 많았다. 엘리베이터는 56층으로 바래다주었고, 티켓 부스는 56층에 있었다. 하늘을 다시 한 번 살펴보니 영 사진 찍기 별로인 것 같아서 다시 내려갈까 고민하다가, 그냥 티켓을 샀다. 다시 한 층을 올라가면 옥외 전망대가 나온다.
파리에는 몽파르나스 타워가 거의 유일한 높은 건물이다. 그래서 동서남북을 바라봐도 시야가 탁 트여 있다. 북동쪽으로는 내가 있는 라탕 지구 일대—팡테옹과 뤽상부르 공원, 노트르담 대성당—가 보이고, 정북방향으로는 루브르 궁과 오르셰 미술관, 튈르리 공원 등 파리의 중심가가 보인다. 북서 방면으로 방향을 조금 더 틀면 몽마르트 언덕 위 사크르쾨르 성당이 보이고 개선문이 나타난다. 그리고 서쪽으로 돌면 앙발리드가 나타난 뒤, 마침내 에펠탑, 그리고 그 너머 라데팡스의 실루엣이 보인다. 에펠탑이 바라다보이는 구역은 단연 사람들이 가장 많다.
노을은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별로인 것도 아니었다. 지평선에 두꺼운 구름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노을은 짧은 순간 강렬하게 빛을 뿜었다가 구름 틈 사이로 금세 사그라들었다. 그러고도 한동안 잔영이 남아 있었다가 이윽고 칠흑같은 어둠으로 빠져들었다. 몽파르나스 묘지나 몽파르나스 역이 있는 방면의 풍경은 해가 지는 반대 방향에 놓여 있어서 더욱 깊은 어둠에 잠긴 듯하다.
몽파르나스 타워에서 내려다본 파리의 풍경은 기기묘묘하다. 다닥다닥 질서정연하게 들어선 청회색 지붕의 건물마다 귤빛 전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다. 길은 시원시원하게 나 있되, 그 안에 들여선 건물들은 제각기 공간 활용을 최대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구불구불 복잡한 형상을 이루고 있다. 어떤 건물은 위에서 바라본 형상이 다이아몬드 꼴을, 어떤 건 정방향 꼴을, 어떤 건 잘려진 디귿자 꼴을 하고 있다. 아마 공공시설인듯 공간을 널찍하게 쓰는 일부 건물도 있지만, 대부분은 뱅글뱅글 도는 고사리처럼 비좁게 공간을 틀고 있다. 풍경을 바라보면서 공간이 사람과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공간에서 자신만의 삶을 꾸며나가는 사람들, 그런 복잡한 도시 사이에서 어김없이 솟아오른 기념비적 건물들. 이 도시에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고, 거대한 관성과 거대한 서사를 품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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