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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카피하다/로맨스/압바스 키아로스타미/엘르(줄리엣 비노쉬), 제임스 밀러(윌리엄 쉬멜)/106>
(허탈한 웃음ㅎㅎㅎㅎㅎ) 영화를 보다 깜박 졸기는 또 오랜만이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_=ㅋㅋ
나중에 시놉시스를 확인해보니 내가 영화를 이해한 방식에 큰 오류가 있었다. 그 오류 때문에 오히려 영화를 더 있는 그대로 봤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여튼..
당신은 오리지널과 짜가 가운데 무엇을 원하는가?
모두들 진품을 선호할 것인다.
그러나 시장에 온갖 이미테이션이 판을 치는 것 보면 모조품에 대한 수요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명품백 몇 개 정도는 진품으로 구색을 갖춰 놓더라도, 나머지는 모조품을 사놓는 게 더 경제적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조품에 유혹을 느낀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한 번 질문.
진품과 똑같은, 완벽하게 똑같은 모조품이 있을 때, 여전히 진품을 선호할 것인가?
...
이 영화의 원제는 <copie corforme>. 우리말로 하자면 <똑같은 복제품> 또는 <완전한 복제품> 정도 되려나.
엄밀히 말해 '복제'와 '모조'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진짜"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의미가 일치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랑이야기 역시 진짜가 아닌 가짜다.(내가 놓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작가인 제임스와 그의 팬(fan) 엘르는 이탈리아의 소도시 아레초(Arezzo)에서 열린 작가와 독자와의 만남을 통해 만남의 기회를 얻는다.
정확히 내가 놓친 부분은 영화 초반 두 사람이 만난 이후에 "하룻동안 가상의 부부가 되어 보기로 결정하는 장면"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좀 아귀가 안 맞는다 싶으면서도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두 사람이 서로 실제 부부라고 생각하며 영화를 감상한 것이었다.
나는 이들의 로맨스가 진품인 줄로만 알았다ㅠ
어찌 됐든 가짜를 진짜로 여기고 영화를 봤으니 감독이 의도하지 않은 매우 신선한 관점에서 영화를 본 셈이다.
그렇지만 변명을 하자면...이들의 연기가 너무 실제 부부 같았다;;
특히 엘르 역을 맡았던 줄리엣 비노쉬는 사랑에 빠진 한 여성의 연기를 훌륭하게 수행해 냈다.
상대역인 제임스의 윌리엄 쉬멜의 연륜있는 연기에도 그냥 속아넘어갔다.
어쩐지 서로 존대를 하는 모습이나, 가끔 보이는 제임스의 어리숙한 모습이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그냥 그런 부부인가보다~하고 봤다.
나와 같이 졸지 않고 보신 분들은 다 감안하고 봤겠지...=_=
영화를 보며 느꼈던 또 한 가지는 <비포> 시리즈가 연상됐다는 것이다.
하룻동안 아레초의 근교를 거닐며 일일 데이트를 즐기는 두 중년 남녀의 이야기는 <비포 선라이즈, 선셋, 미드나잇>에서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연기했던 그 역할에 꼭 들어맞았다. 다만 그 둘은 연인이었다면 이번에는 가상의 부부라는 설정이 다를 뿐이었다.
<비포> 시리즈에서 남녀에게 우발적이거나 자연스러운 사건이 툭툭 튀어나온다면, 제임스와 엘르의 주위에는 유달리 사랑하는 남녀가 많이 등장한다.
갓 결혼식을 마친 신랑 신부.
미사를 마치고 성당을 빠져나오는 노부부.
아레초에 관광 온 중년의 프랑스인 부부에 이르기까지.
사랑으로 엮인 다양한 남녀 커플들을 화면에 등장시킴으로써, 감독은 사랑의 진정한 의미, "진짜와 가짜의 경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아레초의 근교를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제임스와 엘르가 가볍게 설전을 벌이는 장면이 있다.
엘르는 삶의 방식이 단순한 동생 '마리'의 가치관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녀는 그저 첫 만남의 어색함을 깨기 위해 던진 가벼운 수다였다.
그런 엘르에게 제임스는 단순함은 단순함만으로 삶의 방식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초반에 제시된 이 둘의 서로 다른 가치관은 이후에도 종종 충돌한다.
엘르는 그에게 의지하고 기대하고 요구한다.
사소한 암시를 이해해주기 바라고, 그녀가 그에게 매력적으로 비춰지길 바란다.
반면 제임스는 그런 일체의 형식들은 중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겉으로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계에서라면 항상 서운함을 느끼는 쪽은 엘르.
저녁 9시면 영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열차를 타야 한다는 설정까지 <비포 선라이즈>에서 파리를 향해 비엔나를 떠나야 하는 줄리 델피의 설정과 똑같다.
그러나 제임스가 열차에 올라타는 장면까지는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포 선라이즈>와는 다르다.
엘르는 둘이 묵은 적이 있다는 아레초의 어느 숙소로 그를 불러들인다.(이마저도 머릿속에서 꾸며낸 설정일 거다..)
조용히 내려앉은 한줄기 빛 외에는 온통 어둠이 드리우고 있는 아담한 다락방.
그리고 거울을 응시하는 제임스의 알 수 없는 눈빛과 함께 영화는 끝이 난다.
아레초에 남아달라는 엘르의 요청에 그는 남았을까 아니면 열차에 올라탔을까.
글쎄 나로선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엘르의 애틋한 시선, 제임스의 망설이는 시선으로 봤을 때 긍정적인 낙관적인 전망을 그려봐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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