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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일의 일기: 꺄시스(Cassis) —절벽에 오르다Vᵉ arrondissement de Paris/Juin 2022. 8. 3. 15:28
숙소 앞에서 매일마다 일광욕을 즐기던 이웃집 강아지 # 꺄시스는 내가 남프랑스로 넘어오면서 기대했던 지중해의 파랑을 처음으로 만끽했던 곳이다. 나는 아침에 마르세유에서 더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바로 꺄시스로 넘어가기로 했다. 숙소를 나설 때 열차표를 예약을 하고, 숙소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중앙역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열차 도착 20분 전이 되어도 전광판에 열차 정보가 뜨지 않았다. 다시 확인을 해보니, 마르세유 중앙역이 아니라 지선이 주로 발착하는 블랑캬흐 역에서 열차가 출발한다는 걸 알았다. 20분 안에 주파하는 게 불가능한 거리는 아니었지만, 블랑캬흐 역으로 향하는 1호선 메트로마저 코앞에서 놓치면서 완전히 열차 시간을 맞출 수가 없게 되었다. 너무 허무하게—사실은 내 불찰이지만—5.6유로 열차티켓을 날린 게 아까웠다. 결국 새 표를 사지 않고 열차에 타고, 이후에 문제가 생기면 조치를 해보든 형편에 따라야겠다(Ça dépend)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워낙 짧은 구간—연착이 없었다면 12분 거리였다—이라 검표는 없었다.
꺄시스 항 자그마한 항구를 에워싸고 근사한 레스토랑과 바가 즐비한 휴양도시 꺄시스 꺄시스 역에 내려서도 꺄시스 항까지는 걸어서 35분 정도 되는 거리다. 2유로 정도를 내면 역에서 시내까지 이동하는 셔틀버스를 탈 수 있다. 아침에 마르세유에서 동분서주하느라 약간 시간을 까먹기는 했지만, 꺄시스의 숙소에는 미리 얘기해둔 시간에 얼추 맞출 수 있었다. 숙소의 호스트는 남부 지방의 구릿빛 피부에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눈동자 색깔을 가지고 있는 왜소한 체격의 젊은 여성이었다. 체구가 작기는 해도 건강한 느낌이 났다. 그녀는 내게 호스텔을 사용하는 방법과 이 지역을 관광하는 팁에 대해 상세히 소개해주었다. 갈증이 나는데 근처에 마실 것을 마실 수 있는 스낵바가 있는지 물으니, 마침 전날 체크아웃한 여행객이 맥주를 두 병 사두고 마시지 않은 채 떠났다며 'Some people leave interesting things'라고 영어로 웃어 보였다.
# 맥주를 마신 뒤 쉬다가 시내로 나왔다. 숙소 주인은 대개 사람들이 찾는 근처의 해안 보다는 시내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아헨 해변(Plage de l'Arène)을 추천해 주었다. 나는 아헨 해변이 위치한 꺄시스 항의 남쪽으로 향하던 중 길을 잘못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 길로 절벽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섰다. 해안으로 빠지는 길이 나와야 할 텐데 완만한 오르막 경사가 시작되더니 저 멀리 가파른 경사까지 일방통행로에 가까운 아스팔트 길이 이어져 있었다. 아헨 해변에서도 꽤 멀어진 상태여서 일단은 절벽까지 올라보기로 했다. 꺄시스 시내로부터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기 때문에 평소 걷던 거리에 비해서 먼 곳이라 할 수는 없는데, 절벽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이 점점 가팔라지고 열두 시를 갓 넘긴 한낮의 뙤약볕은 그 열기가 대단해서 걷는 게 보통일이 아니었다. 내 옆에서 가쁜 숨을 내쉬며 주거니받거니 서로의 상태를 확인하며 길을 오르던 노부부는 어느 순간 시야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꺄시스 절벽(Falaises de Cassis)으로 향하는 길 이면도로가 끝나는 지점부터는 미시령 산길과 같은 구불구불한 국도가 이어진다. 국도를 따라 10분여 가량 올라가면 눈에 띄지 않는 위치에 해안선으로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이 나타난다. 꺄시스 해안절벽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오솔길에 접어들고도 다시 20분여를 걸어야 한다. 드문드문 마주 오는 배낭여행객을 만난 것을 빼면 대단히 적막한 곳이었다. 산자락을 덮고 있는 건 이 일대에서 흔히 보이는 관목들뿐으로 그늘은 찾을 수 없었다.
마침내 도착한 절벽의 끝. 절벽에서 내려다본 꺄시스의 풍광은 아름다웠다. 한입 베어 문 사과처럼 꺄시스의 해안은 방금 전 이빨에 잘려나간 듯 들쭉날쭉했다. 커다란 공룡이 실수로 꺄시스 해안가에 발을 헛디딘 자국같기도 하다. 새하얀 배가 잔잔한 궤적을 남기며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모습, 해안가를 점점이 수놓은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점(點)들의 움직임이 너무나도 느려서 건전지를 갈아끼워야 하는 거대한 시계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새하얀 움직임들은 스티로폼 부스러기처럼 시야에 쉼없이 벗어났다 나타났지만, 내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도달하지 않았다.
꺌랑끄(Calanques)라고 불리는 이곳 특유의 지형은 조그마한 협곡을 이루며 꺄시스에 독특한 풍광을 심어 놓는다. 내가 도착한 절벽에서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수베한느 절벽(Falaises Soubeyrane)이 있다. 그 위에 오르면 또 다른 풍경이 보일 것도 같았지만, 이 이상은 나아가지 않기로 했다. 절벽을 따라난 오솔길은 더 멀리로는 라 시오타(La ciotat)라는 또 다른 예쁜 도시로 이어지지만, 한여름 탈수되기 쉬운 날씨에 권할 만한 트레킹 코스는 아니다.
절벽에 올라 내려다본 꺄시스의 해안가 # 내려오는 길에는 앞서 길을 잃어 찾지 못했던 아헨 해안을 찾아갔다. 아헨 해안에서는 좀 전에 올랐던 절벽이 이제는 저물어가는 수평선으로 내리꽂히는 햇빛을 받아 호박고구마 색깔로 바뀌어 있었다. 잠시 앉아서 쉬고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 한 젊은 남자가 내게 사진을 찍어줄 수 있겠냐고 물어왔다. 크리슈(K)라고 소개한 그는 인도에서 휴가차 프랑스에 온 청년이었다. 이후 늦은 오후 일정에서 두세 시간 정도를 그와 함께 했다. 인도 뭄바이에서 일하는 K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는데,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이번이 두 번째로 만나는 한국사람이라고 내게 말하며 이런 우연이 있냐고 반겼고,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교육열이 높다는 점을 여러 번 말했다—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호주에서 MBA를 한 뒤 뭄바이에서 스타트업 런칭을 하며 영국 기업들과 협업을 하고 있다는 그는, 긴 대화를 하지 않아도 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약 10일 일정을 내서 휴가를 왔기 때문에 꺄시스에서 숙박을 하는 건 아니었고, 마르세유에서 당일치기로 여행을 왔다고 했다.
아헨 해변(Plage de l'Arene)에서 올려다본 절벽의 모습 K는 저녁에 마르세유로 돌아가기 전 꺄시스의 명소를 좀 더 둘러보고 싶다며, 포흐 미유(Port Miou)로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포흐 미유는 아헨 해변과는 꺄시스 항을 사이에 두고 정반대 방향에 있는데, 꺄시스 자체가 큰 도시가 아니다보니 가는 길이 그리 멀지는 않다. 포흐 미유로 가는 길에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북인도를 여행한 적이 있는 나는 그와 공통분모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는 '한국의 전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다소 추상적인 질문을 던졌는데, 앞으로의 경제 성장이나 사회 변화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같은 질문을 그에게 물어보면 인도는 기회가 많은 나라라고 자부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영토분쟁이 있는 중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표정이 나빠졌다. 모든 의견에는 편차가 있어서, 파리에 있을 때 만난 한 인도 출신 여학생은 인도가 사람 살 만한 곳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정색했던 게 떠올랐다.
어느새 도착한 포흐 미유는 오후 시간에 해를 등지는 위치에 있어서 사진에서 볼 법한 깨끔한 협곡의 풍경은 찾기 어려웠다. 대기의 더위가 한결 가라앉은 오후를 이용해 개를 데리고 산책나온 주민이 포흐 미유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종(種)이 다른 두 마리의 강아지가 물에서 첨벙첨벙 노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물가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뒤, K와 나는 레몬 슈웹스를 하나씩 사들고 시내로 돌아왔다. 시내에서는 꺄시스의 유일한 샌드위치 가게에서 샌드위치를 먹은 먹은 뒤, 마르세유로 되돌아가는 K를 배웅했다.
베스투앙 해변(Plage du Bestouan) # 꺄시스에서 내가 묵었던 곳은 4인 도미토리형 숙소였고, K를 보낸 다음 늦은 저녁에 돌아와서야 룸메이트를 처음 만났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온 샘(S), 마찬가지로 캐나다 퀘벡에서 온 미리암(M), 그리고 가장 늦게 도착한 페루 출신의 루시(R)가 있었다. 도착할 때부터 부산스레 짐을 풀던 R과는 어쩌다가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한번 말문이 트인 그녀는 좀처럼 대화를 멈출 것 같지 않았다. 한국에서 지내는 친구가 한국에 대해 느꼈다는 인상을 공유하기 시작한 그녀는 후지모리(Fujimori) 부녀를 지지한다는 이야기로 넘어갔다. 또 페루에서 태어났지만 텔아비브에서 10년 여 일을 했다는 그녀는 스페인의 산세바스티안에서 지내다 지금은 보르도에 정착했다고도 했다. 지금은 프랑스 이곳저곳을 떠오르는 대로 방랑하고 있는 그녀와는 이후 니스와 파리에서 한 번 더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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