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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8일의 일기(上): 라 시오타(La Ciotat)를 거쳐Vᵉ arrondissement de Paris/Juin 2022. 8. 17. 00:40
# 꺄시스에서 라 시오타로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가장 간편한 방법은 꺄시스의 파출소(Gendarmerie)에서 직행 버스를 타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버스를 타고 꺄시스 역으로 이동한 다음, 한 정거장 거리에 있는 라 시오타 역으로 가는 방법이다. 라 시오타 역은 시내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기 때문에, 역에서 내리면 다시 한 번 시내버스를 타야 한다. 그래서 라 시오타 시내의 버스 정류소(Gare routière)까지 바로 이어주는 버스가 여러모로 편하다. 다만 직행버스의 가장 큰 단점은 통근 시간대에만 운행한다는 점이다. 오전 8~9시대와 오후 5~6시대에 몇 대의 차가 오갈 뿐이다. 애당초 관광객이 아니라 현지인들의 수요를 위해 만들어진 노선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평소 아침을 늦게 시작하는 나는 열차로 이동하게 되었다. 사실 이동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버스나 열차나 한 시간 이내로 비슷하다.
# 라 시오타(La Ciotat)는 꺄시스(Cassis)에서 니스(Nice)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경유지다.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건 배낭을 어떻게 하느냐다. 일단 꺄시스로 되돌아오는 일정이 아니기 때문에 묵고 있던 숙소에 짐을 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 문제가 되었던 건, 라 시오타에 짐을 보관할 만한 장소가 딱히 없었다는 점이다. 라 시오타 자체는 인구 3만 5천 명으로 주민 수가 7천 명에 불과한 꺄시스에 비하면 대도시다. 하지만 꺄시스에 비해 관광지로서는 덜 알려진 곳이라, 미리 여행 정보를 알아보니 배낭여행객에게 유용할 만한 이런저런 편의시설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다가 라 시오타 역에 내린 뒤, 역앞에 있는 스낵바를 보고 묘안이 떠올랐다.
약간의 기대를 품고 스낵바 주인에게 짐을 잠시 맡길 수 있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남프랑스인답지 않게 큰 키에 훤칠한 인상의 중년 남자다. 실제 이곳 주민이 아닌 외지인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프랑스어로 질문을 하니 오후 다섯 시 반이 되면 문을 닫는다고 했는데, 짐을 맡기는 것 자체는 문제되지 않는다고 했다. 라 시오타에 도착했을 때가 정오 즈음이었고, 라 시오타를 구경하는 데에는 네 시간 정도면 충분했기 때문에, 4시 전까지 반드시 픽업을 하겠다고 말했다. 짐을 맡기려면 작은 짐이라도 경우에 따라 10유로 이상이 든다. 돈도 굳었고 사례도 할 겸, 무엇보다 점심을 해결할 겸, 스낵바에서 파는 간단한 가정식과 오렌지 착즙주스(Jus d'orange pressé)도 주문했다.
# 기차역 앞에서 탄 버스는 라 시오타의 동쪽에 있는 앙주 해안(Plage Ange)을 크게 돈 뒤, 그랑드 해안(Grande plage)을 따라 라 시오타의 시내로 바래다주었다. 버스로는 20분 가량 걸리는 거리였다. 창 너머로 보이는 해안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휴양시설들은 꺄시스에 비해 확연히 노후된 느낌이 있었다. 라 시오타는 원래 암벽으로 된 지형이어서, 시내 일대의 백사장은 인공 모래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나는 시내 버스 정류장에 내린 다음 바로 옆 관광안내 센터로 향했다. 프랑스는 관광대국답게 군소도시를 가도 관광안내 센터가 잘 되어 있다. 그냥 시설이나 프린트물만 잘 갖춰져 있는 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직원들도 사무적이지 않은 톤으로 성심성의껏 도와준다. 정말 자기 지역을 잘 아는 사람에게 팁을 얻고 있는 느낌이랄까. 여하간 점심시간에 자리를 지키던 두 명의 여직원이 내게 네 시간 안에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코스를 추천해주었다. 남프랑스 여성들은 피부는 파리에 비하면 건강한 구릿빛이고, 체격은 좀 더 깡마른데 이목구비는 단아한 느낌이 든다.
# 관광센터에서 가장 먼저 추천 받은 곳은 뮈겔 식물원(Parc du Mugel)이었다.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공원으로, 식물원이 주는 이국적인 느낌보다는 식물원 일대에서 구경할 수 있는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식물원으로 향하는 길에는 자연히 라 시오타 항구를 가로지르게 되는데, 이 때 맞은편으로 거대한 크레인이 떡하니 시야를 차지한다. 다소 구식인 듯한 철제 조형물에는, 마찬가지로 구식인 데다 무신경한 폰트로 '라 시오타(La Ciotat)'라는 글자가 대문짝만하게 써 있다. 지중해에 철제 크레인이라니 어울리는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데, MB92라는 조선소 회사 소유의 크레인이다. 크레인의 크기에서 대충 알 수 있듯이, MB92는 대형 선박을 만드는 회사는 아니고 여객선이나 요트를 주로 생산하는 회사다. 여하간 저 크레인에 가까워졌다고 느낄 즈음, 꺌렁끄로 뒤쪽으로 통하는 완만한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이어서 뮈겔 해수욕장과 식물원이 차례차례 나타난다.
# 식물원의 주요 통행로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바다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탐방로가 있었다. 엉즈 뒤 섹(Anse du sec)이라는 작은 내포(內浦)를 에워싼 좁은 길이다. 나는 해안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경사 끝 길가에 앉아, 바다를 넋놓고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내가 본 것은 바다가 아니었다. 꺄르륵하는 소리를 좇아 내가 응시한 건,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학생들이었다. 기껏해야 고등학생에서 대학생 사이의 나이일 것으로 보이는, 애된 티가 역력한 학생들이다. 물 안에서 독특한 자세로 물장구를 치면서 물 밖에 있는 친구를 도발해 보이거나, 잡기 어려운 위치로 비치볼을 던진다든가 하며, 그마저도 너무 재밌다는 듯 과장되게 소리를 지르고 문장을 외친다. 꺌렁끄 사이를 메웠다가 빠지는 경쾌한 웃음소리는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아주 오래된 동물의 것인 것 같았다. 그 원시적인 느낌 때문에 이곳이 지중해가 아닌 폴리네시아 섬인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나와는 조금 거리를 두고 쌍둥이처럼 베이지색으로 버킷 모자를 눌러 쓴 노부부가 도시락을 나눠먹으며 나처럼 저 아래를 소리 없이 내려다본다. 삶의 여명과 황혼이 경계에 마주하고 있었다. 그 경계 안에는 소란스러움과 고요함 뒤엉켜 있었다.
# 뮈겔 전망대(Belvédère du Mugel)를 찾는 데는 약간 길을 헤맸다. 뮈겔 전망대로 가는 길은 이 일대에서는 보기 드물게 나무가 우거진 그늘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방금 전 보고 온 독수리곶(Cap de l'Aigle)의 정반대 면이 보인다. 망망대해와 맞닿은 독수리곶의 표면은 좀 전까지 보고 온 매끄러운 표면과는 달리 아주 거칠다. 비좁은 전망대에서는 절벽을 감상하기에 그리 좋은 각도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뜯겨져 나간 반죽처럼 절벽이 꺼끌꺼끌하고 날카롭다는 것만은 알 수 있다. 날씨가 그리 맑지 않아서 꽤 우중충한 풍경이었다.
# 뮈겔 식물원과 함께 추천 받은 노트흐담 드 라 갸흐드 성당(Chapelle Notre-Dame de la Garde)으로 향했다. 인적이랄 게 전혀 없는 라 시오타 일대의 이면도로를 걸으면서 두 번째 행선지는 생략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명을 들은 대로라면 피게홀 협곡(Calanque de Figuerolles)에서 성당으로 이어지는 샛길이 나와야 했지만, 협곡에 도착했을 때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길같아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작은 해안가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작은 인파가 있을 뿐이었다. 근처 카페 직원에게 물어보면 길이 있기는 한데 길이라 할 수는 없는 가파른 오솔길이라 해서, 결국은 협곡을 빠져나와 우회하는 도로를 통해 성당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때로 한밤중의 정적보다 한낮의 고요가 더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라 시오타의 거리가 그러했다.
성당에서 보이는 라 시오타의 전경은 매우 급작스럽게 펼쳐진다. 성당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전망이랄 게 없는 주택가가 이어진다. 사람 손을 탄 듯한 고양이 한 마리가, 안내자 역할을 맡겠다는 듯 성당으로 오르는 나를 부축하듯이 뒤따라온다. 수요일 예배당에는 사제도 그 누구도 없다. 빨간 제라늄이 화분에 자라나는 것으로 보아 사람의 손길이 닿는 곳이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카타콤만큼이나 비밀스런 느낌이 난다. 그곳 테라스에서 비로소 라 시오타의 전경이 드러난다. 라 시오타에서 시원한 해안선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은 크게 두 곳 정도가 될 텐데, 하나는 앞서 스쳐 지나왔던 앙주 해안이고 다른 하나가 이곳 성당이다. 이 둘은 라 시오타가 가두고 있는 작은 만(灣)을 사이에 두고 정반대에서 대칭으로 마주보고 있다. 앙주 해안에서 바라보는 낙조(落照)가 멋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노을 때가 되면 칼날같은 꺌렁끄의 실루엣들이 태양을 날카롭게 도려내려 할 것이고, 태양은 그 실루엣을 뭉근하게 짓이길 것이다.
# 꺄흐디날 모항 대로(Av. du Cardinal Maurin)와 라페후즈 로(R Lapèrouse)를 차례차례 따라 항구로 되돌아 왔다. 이제 내게 주어진 시간은, 기차역으로 가는 버스 시간까지 감안하면 한 시간 정도다. 라 시오타에서 버스의 배차 간격은 보통 30분 정도이기 때문에 시간표를 잘 확인해 두어야 한다. 나는 아까 내렸던 버스 정류소에서 한 번 더 시간을 체크하고, 목을 축일 겸 카페를 찾았다. '시계의 카페(Café de l'horloge)'. 구도심의 좁은 골목에서 발견한 이 카페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시계라 할 만한 건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동그란 테이블마다 손때가 가득 묻은 문고본 책자가 놓여 있고, 페이지 사이에는 카페의 메뉴가 책갈피처럼 끼워져 있었다. 내 테이블 위에는 장 폴 사르트의 희곡 『더러운 손(Les mains sales)』이 올려져 있었다.
카페를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구도심의 골목을 지나게 되었다. 라 시오타의 구도심은 전형적인 남유럽의 주택가를 닮았다. 이 비좁은 골목에는 보기보다 다양한 풍경이 존재한다. 기베흐 광장(Pl. Guibert)의 교회에서는 이름 모를 오케스트라 곡이 흘러나오고, 다른 방향으로 골목을 두어 번 돌면 이번에는 주택가의 개조된 공간에서 일렉 기타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러다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La 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이 적힌 기념문을 발견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충무공 이순신이나 장영실, 세종대왕이 여러 네이밍에 쓰이는 것처럼, 또는 청록파 시인들의 작품이 공공시설에 소개되는 것처럼, 프랑스에도 이와 비슷한 것이 있다. 예를 들어, 19세기 사회주의자이자 정치인이었던 장 조레스(Jean Jaurès), 공화주의자 레옹 겅베타(Léon Ganbetta)는 지역을 막론하고 프랑스 도로명이나 역명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권리선언문 역시 국가의 징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것이다.
# 나는 약속했던 시간에 맞춰 스낵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짐을 도로 받아들고 라 시오타 역의 플랫폼으로 이동했다. 20분 뒤에 도착할 열차는 툴롱(Toulon) 역을 향할 것이고, 나는 툴롱 역에서 니스 행 열차로 환승할 것이다. 그리고 6월의 긴 햇살은 니스 역에 완전히 도착할 때까지 오늘의 일정을 너끈히 이끌어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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