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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의 일기(上): 향수의 도시(Capitale du parfum, Grasse)Vᵉ arrondissement de Paris/Juin 2022. 8. 30. 12:38
# 전세계 향수의 수도라 불리는 그라스 여행은 꽤나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A는 아침 시간에 엉티베(Antibes)를 가볼 생각이라고 했고, 나는 그라스에 가보려 한다고 말했다. 오후에 칸느에서 서로 합류하기로 한 뒤, 나는 니스 시(Nice-Ville) 역에서 종점이 그라스인 열차를 탔다. 해안을 달리던 열차는 엉티베를 지나는 지점에서부터 구불구불한 산길로 접어든다.
가끔 방훈(芳薰)을 낼 목적으로 방에 향수를 뿌리기는 하지만, 몸에 뿌리는 향수는 쓰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 건 향수라기보다는 차라리 방향제라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다만 '향수'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가 프랑스고, 마침 향수로 유명한 도시가 남프랑스에 있다고 하니, 정확한 실체도 모르는 상징적 장소을 쫓아 그라스로 향했다. 때는 6월 초순으로 라벤더 밭으로 유명한 남프랑스의 명소들을 가도 꽃이 만개한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7월부터가 본격적인 시즌이다), 향수의 도시에서 놓친 명소에 대한 아쉬움을 벌충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것 같기도 하다. 그라스 역에 내려도 시내까지는 경사가 심한 산길이어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게 된다. 거의 대부분의 여행객이 프라고나흐(Fragonard) 공장에서 하차하는데, 나는 두어 정거장 더 지나 구시가지에서 내렸다.
# 버스에서 내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늘 그렇듯 여행안내 센터였다. 안내센터에는 몸집이 통통한 남자 한 명과 백발의 여성 한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남자 쪽에서는 두 명의 젊은 여행객이 그라스에서는 라벤더 밭을 볼 수 없는 거냐며 기함하고 있었다. 나는 백발의 할머니에게 가 그라스에서 두세 시간 쯤 보내게 될 것 같은데 여행코스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대뜸 트레킹 코스로 나폴레옹 루트를 추천해주었다. 마흐브히에흐(La Marbrière)에서 내려다보는 지중해와 내륙 풍경은 남프랑스에서 최고라는 것이었다. 트레킹이라면 꺄시스와 라시오타에서 할 만큼 했고, 아침부터 날씨가 너무 더워서 트레킹을 할 생각은 전혀 드지 않았다. 나는 결국 구시가지의 한 카페에서 주스와 빵을 먹으며 시간을 뭉개다가, 아까 지나쳐온 프라고나흐 공장에 들렀다.
# 공장 견학 투어는 20분 정도로 짜여져 있고, 영어와 프랑스어 두 가지로 구성이 되어 있다. 두 개의 투어가 10분 단위로 번갈아 출발하기 때문에 투어가 쉼없이 진행되는 느낌이다. 따로 예약도 필요 없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프라고나흐는 프랑스 전역에 매우 흔한 향수 매장이어서, 프라고나흐 향수 가게를 찾아서 굳이 본산인 그라스로 갈 필요는 없다. 물론 근대적인 향수 공장에서 견학을 할 수 있는 건 그라스뿐이다. 공장은 크게 증류실, 제조실, 조향실, 포장실, 비누 제작실의 다섯 구역으로 이뤄진다. 공장 내부를 빠져나오면 이런 견학 프로그램이 으레 그렇듯이 매대가 나타나고, 옥외에는 향수와 관련된 식물로 정원이 가꿔져 있다.
# 프라고나흐에는 기본적으로 크게 두 개의 상품 라인을 두고 있다. 첫째는 오 드 투알렛트(Eau de Toilette)고 다른 하나는 오 드 파흐팡(Eau de Parfum)이다. 이 둘은 향수 농축액의 함량으로 구분되고 전자가 5~15% 정도, 후자가 15~20% 정도로 당연히 후자의 경우 가격이 더 올라간다. 물론 원액 함량이 20%를 넘어가는 파흐팡(Parfum) 라인도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는데, 가격이 뛰는 정도는 기하급수적이다. 가장 대중적으로 호응을 얻을 만한 오 드 투알렛트와 오 드 파흐팡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그밖에 비누와 캔들 등 향과 관련된 모든 상품을 취급하는 듯하다.
영국식 영어를 현지인 가이드는 향수의 제조 원리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프라고나흐에서 제작되는 향들을 직접 시향해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관람객들에게 상품을 판촉하기 위한 목적을 겸하는 가이드다. 투어 루트 상 증류실이 가장 먼저 나오기 때문에 향수 원액을 추출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기본적으로 향수 원액(essential oil)을 추출하는 데는 증류법이 활용되지만, 어떤 꽃들의 경우 세심한 수작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자스민의 경우 증류 방식의 추출이 적절하지 않고, 냉침법으로 원액을 추출하게 된다. 냉침 방식으로 자스민 향을 추출하는 목판을 보면, 꽃받침을 분리한 자스민 꽃을 용매가 흠뻑 젖은 면 위에 거꾸로 하나하나 붙여놓은 걸 볼 수 있다. 언뜻 봐도 보통 노동집약적인 작업이 아니었을 것 같다. 백만 송이 자스민을 투입해야 1kg의 에센셜 오일이 추출된다고 하는데, 향수가 왜 비쌀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약간 포석을 깔아둔다. 실제 에센셜 오일에 순수하게 천연원료만 쓰이는 경우는 드물 것 같다.
다음으로는 향의 범주를 과일향(fruits), 꽃향(floral), 오리엔탈향(oriental), 나무향(woody) 타입으로 나눈 뒤, 각 타입 안에서 다시 여성에게 어울리는 향과 남성에게 어울리는 향을 선별하여 시향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프랑스 사람들답게 향수가 발라진 착향 시트를 아주 넉넉히 나눠준다. 'F !', 'Eau de Hongrie'처럼 숨은 뜻을 알기는 어렵지만 재미있는 네이밍을 한 제품들도 보인다. 마지막으로 마카롱처럼 파스텔톤 색깔이 눈에 띄는 비누를 만드는 공간과, 조향사에 의해 착향 실험이 이뤄지는 오르간을 지나면서 투어는 마무리되었다. 오르간을 안내할 때에는 전 세계에 향수와 관련해 학위를 주는 학교가 세 곳이 있다고 했는데, 하나는 파리, 하나는 그라스에 있다고 했고, 마지막 하나는 미국 뉴욕에 있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공장을 나오기 전에 판매 진열대를 자연스럽게 지나치게 되어 있다. 프랑스에서는 어느 가게를 가나 상품을 감각적으로 포장해서 감각적으로 진열하고 프라고나흐 또한 그러했다. 대부분 물건들이 과연 이 값어치를 하는 물건인가 싶을 정도로 물가가 높은 편이지만, 물건을 써보고 가격 대비 '기막힌다'까진 아니더라도 '형편없다'고 느낀 일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향수를 즐겨쓰질 않다보니 선물용이 아니라면 굳이 향수를 살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쩐지 그라스까지 와서 둘러본 곳이 공장 견학이 다라는 아쉬운 생각에, 돈을 좀 써서라도 나중에 기억할 거리를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오 드 투알렛을 하나 사들고 매장을 나섰다.
# 이후에는 꺈느로 가는 LR600번 버스를 타러 정류소로 갔다. 그라스에 내리쬐는 더위는 한낮이 되면서 더욱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고, 대기와 땅이 서로 내뿜는 열기로 인해 멀리 보이는 지평선의 윤곽도 선명하지 않은 듯했다. 출발한 버스는 D6185 국도를 따라 착실히 내려갔고, 꺈느에서 A와 합류하기로 한 나는 가끔씩 GPS를 확인하며 예상 도착시간을 가늠하곤 했다. 빈 차로 출발했던 버스는 순식간에 통근 버스처럼 사람이 불어났지만, 남프랑스 사람들에게는 짜증 섞인 얼굴을 찾기 어려웠다. 꺈느에 도착하면 점심으로 뭘 먹나 나른한 생각을 하면서, 버스의 흔들림에 박자를 맞추는 내 몸에 얼마만큼의 에너지가 남아 있는지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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