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10일의 일기(上): 모나코(Monaco)Vᵉ arrondissement de Paris/Juin 2022. 10. 15. 15:14
이튿날 내가 향한 곳은 모나코다. 이탈리아 국경에 자리한 벤티밀리아(Ventimiglia) 행—프랑스 명칭 벙티밀(Ventimille)—열차를 타면 멍통(Menton)에 도착하기 전 모나코에 다다른다. 이 즈음부터는 카메라의 메모리가 부족해서 사진 일부를 삭제했는데, 최근 사진을 찾다보니 모나코에서 리옹에 이르는 약 사흘간의 사진기록이 사라졌다. 다행히 드문드문 휴대폰으로 남긴 사진이 있어 그때의 여정을 되짚어볼 수 있었다. 이러나 저러나 모나코에서부터는 여행을 즐기기보다는 여행을 그 자체를 위한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여행이 되어서, 이틀 뒤 리옹에 이르러서는 여행을 더 연장할 수 없다고 판단, 파리에 되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으로 귀국하는 비행편 일정을 2주일 정도 앞당긴 것도 이날의 일이다. 벤티밀리아 행 열차는 여행객으로 붐볐고, 남프랑스에서의 여행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모나코 몬테 카를로(Monaco-Monte-Carlo)역에 내렸을 때 지하로 뚫린 역사(驛舍)의 인테리어는 현대적이었다. 역 안에는 엘리베이터만 해도 대여섯 대를 운행하고 있었다. 근사한 느낌이라기보다는 실용성이 강조된 평범한 느낌이어서 잠시 유럽이 아닌 아시아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상으로 올라와 자흐당 엑소티크 대로(Bd du Jardin Exotique)를 따라 지중해를 마주보며 내리막길을 걸어간다. 프랑스 영토 안에 위치한 해안 공국 모나코는 프랑코포니의 회원국이기도 한 만큼 어딜 가나 프랑스어가 보인다. 다만 바로 옆 남해안의 프랑스의 다른 도시들과는 분위기가 어딘가 다른데, 아마도 높은 건폐율 때문인 것 같다. 건물들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중국대륙에 비유하자면 홍콩 같은 느낌이 묻어나는 것 같다.
처음 방문하는 다른 도시에서도 늘 그랬듯 여행안내센터를 먼저 들러 모나코에서 둘러볼 만한 곳에 대한 안내를 들었다. 해양박물관과 대성당을 포함해서 모나코에 둘러볼 곳은 여러 군데 있지만 나는 대공궁(Le palais des Princes de Monaco)에 들르는 걸 목표로 삼았다. 에흐퀼르 항(Port Hercule)을 왼편으로 마주보며 알베르 1세 대로를 따라 남쪽으로 쭉 따라내려가면 키프로스 섬을 닮은 커다란 곶이 나온다. 이 역삼각형 모양의 자투리땅 안에 박물관과 대성당, 대공궁이 모두 자리하고 있다. 모나코에는 좁은 지형을 이용한 터널과 육교, 계단이 많아 항구가 끝나는 지점에서 대공궁으로 향하는 진입로를 찾느라 잠시 길을 헤맸다. 대공궁으로 가기 위해서는 길고 널따란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근위병이 지키는 대공궁이 나타나는 지점에서 이번에는 알베르 2세 대로를 따라 모나코의 좀 더 바깥쪽으로 걸어나갔다. 대로의 중간지점에는 작은 전망대가 있어서 대공궁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민둥산에 가까운 지중해의 황톳빛 언덕과, 갯바위에 다닥다닥 들러붙은 조가비처럼 건물이 즐비한 모나코의 전경을 볼 수 있다. 바다에서 올라오던 흙게들이 그 자리에서 굳어 화석이 되어버린 듯도 하다. 물류항구로써의 이점도 크지 않은 지중해 한켠, 언덕 가장자리 한 뙈기에 작은 나라를 이룬 모나코에는 F1에서부터 프로축구, 카지노에 이르기까지 온갖 엔터테인먼트가 넘쳐난다. 이 오락거리들은 내가 즐기기에는 과분한 것들이었고, 나는 그저 수 세기에 걸쳐 이탈리아와 프랑스 사이에 흥정의 대상이 되었던 이 소규모 국가가 오늘날 독립된 공국을 이루었다는 사실로부터 이곳의 풍경을 재해석해볼 뿐이었다.
'Vᵉ arrondissement de Paris > Juin' 카테고리의 다른 글
6월 11일의 일기: 리옹(Lyon) (0) 2023.01.04 6월 10일의 일기(下): 에즈(Èze) (1) 2022.12.04 6월 9일의 일기(下): 영화의 도시(Ville cinéphile, Cannes) (1) 2022.09.16 6월 9일의 일기(上): 향수의 도시(Capitale du parfum, Grasse) (0) 2022.08.30 6월 8일의 일기(下): 니스에 이르다(À Nice) (0) 2022.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