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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의 일기(下): 에즈(Èze)Vᵉ arrondissement de Paris/Juin 2022. 12. 4. 16:36
# 프랑스에서 남긴 사진이 분실되면서 여남은 6월의 기록을 마무리할 의지가 확 줄어버렸다. 그럼에도 요새 날씨가 추워지면서 올해 따듯한 계절을 보냈던 프랑스에서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어쩌다 TV에 프랑스인의 인터뷰 화면이 나타나면 그들의 얼굴과 목소리에서 벌써 화석이 되어버린 듯한 아련한 기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에즈(Èze)는 모나코에서 니스로 돌아오는 길에 경유한 작은 도시로 지중해를 내려다보는 산 중턱에 위치한 중세 마을로 유명한 곳이다. 에즈의 중세 마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버스를 타야 한다. 에즈 역 앞에는 작은 안내센터가 있었는데, 중세 마을을 찾아가는 방법을 직원—나이 지긋한 아주머니셨다—에게 물어보니 안내센터 문밖 30m 쯤 되는 거리에서 한창 승객들을 태우고 있는 82번 버스를 가리켜보였다. 한 시간에 한 대씩 지나가는 버스니 "당장!!" 뛰어가라고 했다. 과연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산길을 오르는 동안 이 버스를 놓쳤다면 사진 속 중세 마을을 구경할 엄두는 내지 못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은 날씨가 상당히 더웠다. 중세 마을에 도착한 뒤 다시 그곳의 안내 센터에 들러 이 동네를 둘러보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필요한 정보를 확인한 후, 나는 어디서 왔냐는 안내센터 직원—나를 깊은 눈동자로 바라보는 이번 직원은 백발 성성한 할아버지셨다—의 물음에 한국에서 왔다고 답했다. 작은 골목들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이 중세 마을은 브르타뉴 지방의 몽생미셸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다만 하나는 산에 다른 하나는 섬에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에즈 위에서 코트 다쥐르(Côte d'Azur)를 한눈에 조망하려면 유료로 식물 정원을 입장해야 한다. 멋진 전망을 뒤로 두고 몇 개 개인 사진도 남겼지만 그때의 내 몰골을 보면 상당히 초췌해서, 불과 이튿날 리옹에서 돌연 파리로 돌아갈 결정을 내렸던 당시 상황에 다시금 수긍하게 된다.
# 에즈(Èze)는 여러 유명 인사들이 체류한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곳의 바다를 사랑한 월트 디즈니(Walt Disney)가 에즈에 체류했고,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해발 400미터에 달하는 에즈의 산길을 오르내리며 『자라투스트라는 말했다』를 구상했다. 듣는 것만으로 설레는 일화들이다. 나는 에즈를 내려올 때는 니체의 길(Chemin de Nietzsche)을 따라 걸어 내려왔다. 무더운 날씨를 감내해가면서까지 이 길 위를 이동하는 사람들은 독일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이 독일인이라는 건 독일어 대화를 들어서 알 수 있기도 했고, 마주보는 사람과 인사할 때 서로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짧게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되기도 했다. 나에겐 내리막길이었지만 많은 독일인들이 남녀노소 오르막길을 걷는 걸 보고 내심 대단하다 싶기도 했다. 그러기엔 아무래도 더운 날씨였다.
한 시간 조금 더 걸었을까 니체의 길이 끝났다. 니스 행 열차가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었고, 나는 역에서 버스를 안내해주었던 아주머니에게 아까 감사했다는 인사를 하러 갔다. 아주머니는 아까 다짜고짜 빨리 버스 쫓아가라서 해서 미안했다고, 잘 다녀왔냐고 측은하게 말씀하셨다. 짧은 인사 이후 열차를 타고 니스로 돌아온 나는 원래 묵고 있던 숙소를 하루 더 연장하기로 했다. 전날까지 도미토리에 어마어마하게 코골이를 하는 투숙객이 있었고, 아무리 가성비와 위치가 좋다고는 하나 비품(이불)과 난방이 허술했던 터라 연장을 좀 망설였다.
# 나는 새로운 방에서 중국에서 온 L과 튀니지의 스팍스에서 온 어린 남학생을 새로인 알게 되었다. 옌타이(烟台)에서 왔다고 하는 L은 마르세유의 한 그랑제꼴에서 공부하고 있고 룩셈부르크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 쉼없이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화법이 듣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친구였다. 특히 나보다도 튀니지 학생을 대할 때마다 자신이 다니는 좋은 직장과 학교에 대한 얘기를 빠뜨리지 않았다. 이후 더 도착한 캐나다 투숙객이 한국 지도자와 북한 지도자의 이름을 헷갈리자 옆에서 박장대소를 하는 걸 보며, 더는 L과 편히 대화할 수 없었다. 나는 니스의 석양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장 메드상 가로 나왔다. 사진을 담고 돌아오는 길에는 베트남 식당에서 저렴하지만 든든하게 식사를 해결했다. 그러고도 나는 소갈머리가 없었는지 숙소 앞 테라스에서 축구를 구경하던 L과 튀니지 학생과 우연히 만나 함께 맥주를 한 잔 하고 방에 돌아왔다. 이때 남긴 니스의 석양 사진은 마찬가지로 행방불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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