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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8일의 일기(下): 니스에 이르다(À Nice)Vᵉ arrondissement de Paris/Juin 2022. 8. 28. 23:41
니스에서 R을 만나게 된 건 뜻밖의 일이었다. 라시오타를 거쳐 니스에 도착해 호스텔에 체크인을 할 때, 마침 R이 인사를 해온 것이다. R은 꺄시스에서 만난 투숙객으로, 따져보면 니스에서 다시 만난 게 전혀 뜻밖의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전날 R에게 꺄시스를 떠나면 다음에는 니스에 갈 거라는 말을 했었기 때문이다. 일정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녀도 니스에 갈 예정이라기에 서로 여행 정보를 공유했었다. 바캉스 기간에는 뛰는 물가보다 숙박이 가장 큰 문제였기 때문에, 꺄시스를 먼저 떠나게 된 나는 내가 알아보고 있는 숙소에 대해 이야기했다. 좋은 조건에 숙소를 구한 것 같다고 얼핏 말은 했었지만, R은 불현듯 니스로 오는 일정을 앞당겨 나보다도 먼저 니스에 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침에 라시오타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R은 전혀 체크아웃할 기미가 없었기 때문에 니스에서 마주치게 될 거라곤 더더욱 생각지 못했다.
페루에서 왔다는 R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여러모로 독특한 풍모를 풍겼다. 살면서 처음 보는 페루 사람이기에 그렇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도미토리형 숙소에 머무는데도 배낭여행객 같지 않다는 점이 그러했다. 일단 꺄시스에서 저렴한 다인실 숙소를 찾는 사람치고 배낭 없이 커다란 캐리어만 끌고 오는 경우는 처음 봤다. 나중에는 호스트와 침대 커버의 소재를 두고 옥신각신하기까지 했다. 그런 R은 언뜻 보아도 항상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모양새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친화력이 뛰어나서 같은 방의 M과 금세 친구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니스에서 다시 만난 R은 내게 일단 짐을 좀 풀고 나면 니스 시내를 같이 걷지 않겠냐고 했다. 오늘의 일정은 라시오타로 일단락 짓고 숙소 일대에서 저녁으로 간단히 베트남 국수나 먹어야겠다던 생각을 접고, 그녀의 제안에 그러자고 했다.
니스에서 다시 본 R은 상당히 산만했다. 걷는 와중에 정신 없이 시간을 찍는가 하면, 누군가와 쉴새 없이 전화통화나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걸어가면서 그 모든 동작을 다 해내려니 행동거지가 영 어수선했다. 꺄시스에 있을 때는 길게 대화해보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그녀의 말과 행동이 점점 미스터리하다고 느꼈다. 그녀의 말에서 어떤 대목에서는 감수성이 느껴지기도 했고, 어떤 대목에서는 계산적인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가령 자신이 대인관계에서 처했던 어려움에 대해 한창 떠들다가도, 페루를 떠나 유럽에 정착하는 데 필요한 언뜻 들어도 복잡다단한 절차들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중에 이야기를 더 듣게 되면서, R이 페루에서도 상당한 부유층에 속하고 항상 모자람 없이 살아온 것 같다고 추측하게 되었는데, 그렇다 보니 어떤 때는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간관계에서 정서적 결핍을 컨트롤하는 데 서투른 건가 하는 또 다른 지레짐작에 이르렀다. 그녀는 유럽에서 영주권을 얻기 위해 고용한 변호사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고, 또 한번은 헤프게 돈을 쓰던 자신의 옛 모습을 뉘우치기 위해 저렴한 숙소를 찾아 비용을 최소화하는 여행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위화감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고, 남미에서 온 까닭인지 R의 성격은 아주 쾌활하고 화통해서 어울리는 데 문제될 건 없었다.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스스럼 없는 그녀의 태도가 더 편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그녀와 나는 각자의 리듬을 깨지 않은 채로 장 메드상 대로(Av. Jean Médecin)을 따라 지중해까지 걸어내려갔다. 프랑스의 지중해 연안에서는 두 번째로 크고 프랑스 전국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니스는 마르세유보다는 확실히 안착된 느낌이 있었다.
그리곤 바다가 나타난 지점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영국인 산책로(La promenade des Anglais)를 따라 걸었다.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의 탑(La tour Bellanda) 아래에는 빨강으로 된 #ILoveNICE 조형물이 있었고 눈에 보이는 모든 관광객들이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남긴다. 마침 해몰이 시간이어서 해가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걸 볼 수 있었다. 강한 햇빛이 남프랑스의 시로코에 부딪쳐서 공중에 혼탁한 그늘을 흩뿌렸다. 우리는 호바-캬퓌 곶(Pointe de Rauba-Capeu)을 돌아 서쪽 언덕을 방벽으로 둔 니스 항에 도착했다. R과 걷는 중에는 휴식이랄 게 없었다. 걷는 행위 자체가 이 순간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빠른 속도로 명소들을 지나쳐갔다. 나는 라시오타에서의 여독을 풀 틈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 피로감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R과 나는 꺄시니 가(Rue Cassini)를 거쳐 숙소로 방면으로 되돌아왔다.
R은 이번에는 또 저녁을 먹을 만한 곳으로 봐둔 레스토랑이 있다고 했다. 숙소와 같은 블록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이었다. 그녀는 프랑스 물가가 워낙 비싸서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에 식사할 수 있는 곳을 확인해 두었다고 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중국 식당이나 인도 식당이 아니고서야 이탈리아 식당이라고 해서 가격이 얼마나 저렴할까 싶었다. 북프랑스보다는 남프랑스에 이탈리아 요리가 흔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녀는 예산을 절감해야 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음에도, 예상했던 대로 식사가 될 만큼의 구성을 주문하려면 어지간한 비용이 들었다. 결국은 레드 와인까지 한 잔씩 주문한 꽤나 포멀한 식사가 되었다.
이래저래 앞뒤가 맞지 않는 그녀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도 막상 그녀를 폄훼하거나 할 기분은 아니었다. 모든 걸 깡그리 흘려넘기는 특유의 쾌활함과 무신경함 때문에, 딱히 부대낄 것도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날 저녁 R은 자기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엄청 많이 했다.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소설 속에서 뛰쳐나온 사람처럼 미신적인 이야기도 쉼없이 늘어놓았다. 불길한 숫자와 관련된 이야기, 옛 남자친구와 아마존 여행을 하다가 토착병이 걸려 혼쭐난 이야기, 자신의 남동생이 페루의 밤거리에서 습격을 당했는데 응급실에 도착한 뒤에야 경찰에게 연락을 받아서 속썩는 줄 알았다는 이야기, 가족들의 기념일—생일과 기일—에 대한 이야기, 자신의 선조들에게는 백인의 피 조금, 인디언들의 피 조금, 심지어 중국인의 피도 조금 섞여 있다는 끝모를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중국인의 피'라고 말할 때는 날렵한 눈꼬리를 그럴듯하게 어루만져 보였다.
그녀는 프랑스어는 전혀 하지 못했고 영어도 아주 능숙하지는 않아서 스페인어로 '그래서(entonces)'를 꼭 서두에 붙이는 말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언어적 장벽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직원에게 메뉴에 적힌 프랑스어를 알려달라고 물으며 유쾌하게 대화를 트는 수완이 있었다. R은 보르도와 산세바스티안을 오가며 일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녀의 프랑스어와 영어로 보아 어떻게 일을 하고 있을지 의아하기도 했지만, 그 전에는 텔아비브에서 10년간 일을 했고, 이후 바르셀로나에 한동안 정착했다는 걸 보면 스페인어든 아니든간에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의심할 순 없었다. 그보다 더 분명한 건, 적어도 그녀가 생계를 걱정해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처럼 보이진 않았다는 점이었다. 여하간 그녀의 개인사를 이 이상 시시콜콜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세르(Asser)를 만난 건 R과 저녁을 다 먹고 숙소로 돌아온 뒤였다. A는 이집트에서 온 청년으로 같은 날 나보다 조금 일찍 숙소에 도착해 있었다. 서로 간단히 통성명을 마친 뒤, 그는 내가 숙소에서 비품을 수령하는 법을 도와주었다. 오래전 아랍어를 배울 때, 같은 아랍 문화권 안에서도 이집트 방언은 발음부터가 타 지역 사람들이 듣기에 거칠고 투박한 느낌을 준다고 들은 기억이 있어서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약간 스테레오타입 같은 게 있었다. 그런데 A는 일단 영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했고, 프랑스에 머물며 내가 만난 비영어권 사람들 중에서도 손꼽히게 유창했다. 게다가 매너 있는 북아프리카인이라는 비현실적인 캐릭터라니. 그렇게 해서 그와는 연락처를 교환하고 이튿날 반나절 정도 여행에 동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길 위에서 그와 나눴던 대화는 그 말미에 내게 적잖은 실망감과 충격을 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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