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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7일의 일기: 꺄시스(Cassis) —오르락 내리락Vᵉ arrondissement de Paris/Juin 2022. 8. 12. 21:43
# 꺌렁끄 덩 보(Calanque d'en Vau)는 꺄시스의 서북쪽에 위치한 협곡으로, 꺄시스를 찾는 여행객이라면 반드시 트레킹을 하는 코스다. 꺌렁끄 덩 보까지 가는 길에는 크게 두 개의 협곡이 더 있다. 가장 먼저 어제 잠시 들렀던 포흐 미우(Port Miou)가 있고, 다음으로 포흐 팡(Port Pin)이 있다. 두 협곡 모두 남서쪽을 향해 비스듬히 입을 벌리고 있다. 이들 지명에는 모두 '포흐(Port)'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지만, 포흐 미우만이 해안가를 따라서 소규모 여객선이나 보트들이 정박해 있다. 한편 종착지인 꺌렁끄 덩 보는 앞의 두 협곡과 달리 남동쪽으로 협곡이 바다로 이어져서 앞의 두 협곡과 지도상으로 직각을 이룬다.
꺄시스는 전형적인 휴양 도시로 나이 지긋한 관광객의 비율도 높고, 바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라면 둘러볼 만한 다른 문화유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인지 아침에 꺌렁드 덩 보로 가는 길에는 행인과 거의 마주칠 일이 없었다. 이곳에는 아무도 바삐 움직이는 사람이 없고, 바삐 움직일 이유도 없다. 걸어가다보니 어제 K와 찾았던 포흐 미우가 나타났고, 나는 한적한 길을 따라 협곡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갔다. 숙소 호스트가 꺌렁끄 덩 보에 갈 때에는 반드시 생수를 챙기라고 했기 때문에, 이른 아침 슈퍼마켓에서 1.5리터 짜리 생수통을 사들고 배낭도 없이 길을 나선 상태였다. 얼마 걷다가 절벽 위 커다란 소나무 아래 그늘에 앉아서, 오전의 께느른함도 떨칠 겸 마르세유에서 챙겨온 쿠키를 먹었다. 이곳에 앉아 바라본 지중해의 색깔은 신비로웠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에 따라서 수면 위에서 파르르 떨리며 햇빛을 튕겨내는 물결은, 바다에 무리지어 다니며 포식자를 피해 기묘하게 방향을 틀어대는 물고기떼 같았다.
휴식을 취하고 다시 길을 떠났는데, 어제처럼 길을 또 다시 잘못 들었다. 포흐 미우에서 두 번째 경유지인 포흐 팡을 가는 길에는 꺄꼬 곶(Pointe de la Cacau)라고 불리는 작은 곶이 있다. 섬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육지와 간신히 연결된 조그만 곶이다.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곶으로 길이 샌 줄도 모르고, 코스에서 벗어났다. 워낙 짤막한 곶이어서 길을 벗어났다고 하기도 어려웠는데, 예정에 없이 들어선 곶의 해안가를 따라 포흐 미우와 포흐 팡의 전경이 보였다. 유일하게 배가 드나드는 포흐 미우 항로를 따라 크고작은 선박들이 드나드는 풍경은, 우리나라 다도해의 풍경과 똑 닮았다. 꺄꼬 곶의 끝에는 아마 대공포(對空砲)가 놓여 있던 자리인 듯, 노르망디 해안에서 봤던 것과 같은 콘크리트와 돌로 된 공간이 폐허가 된 채로 남아 있었다.
# 나는 꺌렁끄 덩 보에서 잠깐 낮잠에 들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해수욕을 한 것도 아니고, 그늘 아래 바위에 자리를 잡고 낮잠을 청했다. 꺄꼬 곶을 빠져나오면 포흐 팡은 바로 코앞이다. 문제는 포흐 팡을 지나면서부터인데 꺌렁끄 덩 보까지 까마득한 경사로가 끝없이 이어진다. 어린 두 딸아이를 대동한 한 독일인 부부는 길이 너무 위험천만하다고 느꼈는지, 앞으로 나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한 채 쩔쩔매고 있었다. 이 경사로는 꺌렁끄 덩 보로 향할 때는 내리막길이지만, 다시 포흐 팡으로 되돌아올 때는 거대한 오르막길이 된다. 그렇게 경사로의 끝에 나타난 꺌렁끄 덩 보에서 그렇게 단잠에 빠진 것이다. 사실 학기가 끝나자마자 남프랑스로 내려온 시점에 내 체력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다.
# 꺌렁끄 덩 보에서 나는 같은 숙소에 머무르던 S과 만났다. S는 숙소 도착 첫날 가장 먼저 말을 텄던 친구다. 퀘벡 지역에서 오지도 않았는데 프랑스어가 대단히 유창한 어린 학생이다. 맨 처음 말을 틀 때, 내게 삶은 펜네였나 푸실리를 좀 먹겠냐기에 괜찮다고 했었는데 그 때에도 프랑스어를 썼었다. 어쨌든 당시 달랑 파스타 면만 삶은 음식이어서 내게는 그리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유럽이나 북미에서 온 친구들을 보면 요리를 자주하기는 하는데, 그 요리란 게 생각보다 너무 단촐해서 나보다 더 큰 체격이 어떻게 유지되나 싶을 정도다. 어쨌든 그런 S와 꺌렁끄 덩 보에서 마주쳤다. 나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그는 해안가에서 일광욕을 하고 시내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대학에서 독일문학을 공부했다는 그는 대학을 중퇴했다고 했는데, 흥미롭게도 그는 프랑스는 유창한데도 정작 독일어는 잘하지 못한다고 했다. 원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진학하는 갭이어를 이용해 여행을 왔어야 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해를 미루다가 올해 비로소 프랑스를 찾게 되었다고 했다. 대략 두 달 일정으로 유럽을 찾았고, 유럽 안에서는 프랑스에서 절반, 독일에서 절반의 일정을 할애할 예정이라고 했다. 프랑스 남부에서 시작한 그의 일정은 안시(Annesy)를 거쳐, 파리, 독일로 이어질 터였다. 그와 돌아오는 길은 앞선 급경사를 이제는 오르는 상황이 되어서 서로 조심히 걸으라고 격려하면서 걸었지만, 그 와중에도 뜨거운 자갈에 번번이 신발이 미끄러지곤 했다. 오르막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잠깐 나무 그늘에 앉아 그가 요기하는 걸—전날 데쳤던 파스타면을 용기에 담아왔다—기다리며 숨을 돌렸다.
S는 내게 한국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가 한국에 대해서 확실히 알고 있는 건, 한국인들이 대학 교육에 집착이 강하다(obsessed)는 것 정도였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남한과 북한을 헷갈려 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 사람을 니스에서 한 번 만나기는 했다.) 특히 그는 북한과 남한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궁금해 했다. 한국 사람들은 통일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나중에 대화가 계속되면서, S가 남북 분단에 대해 물은 것이 퀘벡의 분리주의 운동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전통적으로 프랑스어를 주로 사용하고 가톨릭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는 퀘벡 주가 점점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해가는 것에 불만을 느끼고 있으며, 이에 분리독립을 묻는 투표가 이뤄졌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퀘벡주의 인구는 3천 8백만 인구인 캐나다 안에서 850만 명에 달하고 그들이 바라는 분리독립은 캐나다에게 아무런 득이 될 게 없을 거라며 냉소적으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다만, 내가 우리나라의 분단을 바라보는 것과 그가 퀘벡의 분리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이 뭐라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조금 다른 것 같다고도 느꼈다. 일단 우리나라는 이미 분단된 상황 안에서 통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가 문제가 된다면, 퀘벡의 분리주의는 하나의 커다란 움직임이기는 하지만 아직 현실에 다가온 일은 아니다. 크고 작은 유럽국가들 안에서도 복잡다단하게 분리주의 운동이 전개되곤 하는데, 그런 분리주의 운동이 물론 아시아 지역에도 있기는 하지만 서구 사람들이 국가와 정치를 바라보는 방식은 동아시아 사람들과 조금 다른 것 같다고 느꼈다. 그들은 국가라는 개념에 앞서 개개인의 권리의 의사 표명에 더 무게중심을 두기 때문에, 국가의 존재 이유는 개인 각자가 고유성을 최대한 발현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는 것 같다.
트레킹 코스가 끝나고 시내가 나타나는 지점에서 나는 S와 헤어졌다. 그는 다음날 카야킹 액티비티를 예약하러 가겠다고 했다. 아직 점심을 먹지 않은 나는 슈퍼마켓에 식재료를 사러 갔다. 탈리아텔레 면에 토마토 소스, 그리고 고기 한 점을 샀다. 꺄시스에는 슈퍼마켓이 다해서 고작 두세 곳 정도고, 그마저도 저녁 여덟 시 전에 문을 닫기 때문에 필요한 게 있다면 미리 장을 봐둬야 한다. 숙소에 들어가 사온 재료로 요리를 하고 보니 생각보다도 거한 저녁이 되었다. 예약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S는 배낭여행객치고 호화롭게 만들어진 파스타 요리에 놀란 것 같았고, 식재료를 가급적 남기고 싶지 않아 푸짐하게 재료를 썼던 내가 봐도 음식이 좀 거했다. 한편 M과 R은 바닷가 테라스에 술을 마시러 나가며, 좀 이따 연락을 하겠다고 했지만 이런저런 일로 연락이 어긋났다. 저녁을 든든히 먹은 나는 꺄시스에서의 두 번째 밤을 보내며, 부둣가로 내려가 밤의 바닷가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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