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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일의 일기: 퐁텐블로(Fontainebleau)Vᵉ arrondissement de Paris/Juin 2022. 7. 23. 23:10
# 오늘은 N과 퐁텐블로에 다녀왔다. 전날밤 오늘 무슨 계획이 있냐고 N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왔고, 학기를 마친 뒤 일정이 있을 리 없는 나는 어디 바람이라도 쐬자는 말에 번개 일정을 짜는 데 착수했다. 그렇게 해서 정오 쯤 N과 리옹 역에서 만나 R 노선을 타고 퐁텐블로로 함께 이동했다. 나는 학기가 끝난 뒤, 베르사유, 에펠탑, 루브르를 주파하는 다소 무리한 일정을 소화했던지라, 사실 이날 굉장히 피로감이 몰려 왔고 파리를 빠져나가는 열차 안에서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 마침 퐁텐블로 성에서는 예술사 축제(Festival de l’historie des arts)가 열리고 있었다. 게다가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축제에서는 굉장히 다양한 테마—족히 서른 개는 되는 것 같았다—로 그룹 투어가 제공되고 있었다. 여러 프로그램들을 살펴본 다음 나와 N은 가장 가까운 시간대의 ‘동물과 변신(Les animaux et métamorphose)’라는 도슨트에 참여하기로 했다. 여기서 주제 속 동물은 살아 있는 동물이 아니라 퐁텐블로 성 안의 여러 벽화들에 등장하는 동물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림 속 동물들이 각각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30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 프로그램이 갖는 작은 목적이었다.
도슨트는 에콜 뒤 루브르(École du Louvre)에서 온 두 명의 젊은 여학생이 이끌었다. 키가 작고 예쁜 눈을 가진 여학생의 우쭐대는 프랑스어를 귀기울여 들었다. 그러다 차츰 흥미를 잃었다. 키가 작은 학생은 천천히 설명을 진행한 반면 옆의 키가 큰 학생은 설명이 너무 빨랐던 데다, 그리스 신화에 관한 어려운 표현들이 끼어들면서 내용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30분 단위로 새로운 도슨트 프로그램이 쉼없이 이어지는데, 가만히 쉬고 싶었던 나는 다음 도슨트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시민들에게 무료로 열리는 이번 축제와 알찬 도슨트 프로그램에 완전히 몰입한 N은 두 여학생과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밝은 표정의 N을 보면서 내 제안이 좋은 선택이었다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이 리듬에 어울리고 있지 못한 나를 보자니 맥이 풀리기도 했다. 야외에서 사진을 찍기로 마음먹은 나는 N이 다음 도슨트 장소로 이동하는 것을 두고 궁전 밖으로 나왔다.
퐁텐블로 궁전은 고고학이나 미술사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미 베르사유 궁전과 오페라를 다녀온 사람에게 큰 감흥을 주지 않는다. 적어도 내게는 그러했다. 퐁텐블로 궁전을 가득 메우고 있는 온갖 테마의 아파르트망(appartement)들은 이미 베르사유 궁전과 트리아농에서 며칠 전 봤던 것들이다. 처음 몇 번은 입이 떡 벌어지지만 계속해서 장식적인 방들을 지나치다보면 각각의 방들이 선사하는 화려하고 우아한 인테리어에 금세 무뎌진다. 실은 나의 경우 퐁텐블로 궁전보다도 퐁텐블로 숲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했었다. 하지만 숲은커녕 퐁텐블로 궁전 앞 정원을 모두 둘러보는 것만 해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밖으로 나온 나는 호숫가의 가로수길을 걸으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
# 자연히 각자 자유시간을 누린 N과 나는 1시간이 채 안되어 다시 만났다. 돌아온 N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는 작은 연주회를 듣고 왔다고 했다. 사진을 찍느라 앞의 무리와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나도 같이 음악회에 합류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음 이벤트 장소인 쥐드폼(Jeu de paume) 경기장으로 이동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전 젤라토 매대에서 새빨간 색깔의 꺄시스(Cassis) 맛 아이스크림을 두 개 샀다. 이것으로 오늘 점심은 대체되었다.
쥐드폼은 프랑스의 전통 스포츠 중 하나로, 테니스의 전신으로 알려져 있을 만큼 테니스와 닮은꼴의 스포츠다. 스포츠가 맨 처음 시작되었을 때는 말 그대로 손바닥(Paume)으로 공을 넘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가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라켓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쥐드폼을 파리의 박물관 이름으로 알고 있었던지라, 맨처음 N이 쥐드폼 하러 가지 않겠냐고 할 때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나는 N이 가볍게 쥐드폼을 즐기는 걸 경기장 바깥에서 지켜 보았다.
너무 늦지 않게 퐁텐블로 궁전을 빠져나와 다시 역으로 가는 버스 정류소로 이동했다. 궁전을 빠져나오고 N은 뒤늦게 가방을 궁전 안 보관함에 넣어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버스를 타려고 나비고 카드를 찾으려고 백팩을 열려는데, 그녀의 등이 어딘가 허전했던 것이다. N은 너무 당황한 기색이었다. 베르사유에서 똑같은 일을 경험한 나는 시간이 좀 늦어져도 괜찮다며 퐁텐블로 궁전으로 함께 이동했다. 이후 무사하게 퐁텐블로 역으로 되돌아온 나와 N은 서로 어딘가 풀이 죽어 있었다. 나는 찌뿌둥한 피로감을 견디지 못해, 그녀는 경쾌한 오후 시간 이후 어딘가 심드렁해 보였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차 있었다.
# 저녁에는 파리 북역에서 H와 또 다른 저녁 약속이 있었다. 파리 북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리옹 역에서 RER D 노선으로 갈아타야하는 다소 복잡한 여정이다. 나는 리옹 역에서 N과 헤어졌다. 때마침 퐁텐블로에서 파리로 넘어올 쯤 급작스럽게 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퇴근 시간에 맞물려 파리의 메트로는 극도로 혼잡한 상태였다. 결국은 약속장소인 역앞 인도식당에 늦었다. 주문한 인도 전통음식은 H의 예상과 달리 형편 없었고, 식사가 끝나고 H와 담소를 나누는 내내 식당주인은 식탁을 빨리 비워달라는 우회적인 표현으로 더 주문할 것이 있는지 보채는 표정으로 여러 차례 식탁을 다녀갔다. 그래도 다행히 식당을 나설 즈음에는 비가 곧 그쳐서 뤽상부르 공원으로 우산 없이 돌아올 수있었다.
나는 그와 북역에서의 실망스런 저녁을 만회하고, 또 언제 있을지 모르는 만남을 덮기 위해 무프타흐 골목에서 맥주 한 잔씩을 마시고 헤어졌다. H와의 만남은 다분히 작위적—그는 거의 세네 다리 건너는 인연을 통해 프랑스에 도착한 뒤 우연히 알게 되었다—이면서도 기묘한 것이었고, 서로의 공통분모를 확인하는 동안에도 그 기간이 너무 짧아서 피상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늘 그의 유쾌함을 잃지 않는 그를 보는데, 내 안의 무언가가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그의 밝음이 어딘가 나의 어두운 면을 건드리는 것 같다고 느끼며 윔 가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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