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 영도(影島)여행/2022 겨울 7번 국도 2023. 1. 9. 03:19
짧은 호흡으로 종착지인 부산에 도착하고 이제는 서울로 돌아갈 일만이 남았다. 부산발 서울행이야말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장거리 이동이 될 터. 몇 년만에 찾아온 부산을 그냥 스치듯 지나치기 싫었던 나는, 마지막날 일정으로 부산에서 가보지 못한 딱 한 곳을 골라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맨 처음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곳이 사하구의 을숙도였다. 그러다가 황룡산까지 차를 몰고 올라가볼까, 하고 잠깐 갈등했다. 그러다가 부산까지 왔는데 카페도 한 곳 안 둘러보고 서울로 돌아간다고?, 하는 물음표가 끝으로 머리에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기장군에 이번에 새로 문을 연 JM 카페를 들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던 차였다.
정말 오랜만에 부산을 다시 오면서 카페 검색을 해보았을 때, 부산에 올 때마다 꼭 들렀던 송정 해수욕장 앞 인얼스 커피 점포가 사라졌다는 걸 알고 내심 놀랐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에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였던 JM 커피가 위치한 기장군으로 가는 건 남은 동선을 정반대로 거스르는 일이었는데, 그렇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불현듯 떠오른 곳이 모모스 커피였다. 당연히 온천장 일대의 금정구로 가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영도에 실험적인 형태로 새로운 지점이 오픈했다는 정보를 보고 여기다 싶었다. 부산 시내 운전에 여전히 서투른 나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로터리에서 길을 잘못 들었고, 적당한 지점에서 차를 우회시키지도 못한 채 초량동 일대의 그 기나긴 산복도로를 굽이굽이 빙 돌고 부산항으로 내려온 뒤에야 간신히 영도구에 진입했다.
나는 개점시간에 맞춰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움직였기 때문에, 비록 앞서 길을 헤매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카페에 도착하고나서 주문 대기 없이 여유 있게 커피를 즐길 수 있었다. 이곳의 특징은 바리스타가 커피를 만드는 걸 직접 지켜보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인 오렌지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는데, 제조 과정이 복잡하지 않은 에스프레소의 특성상 구경할 거리가 많지는 않았지만 잠시 바리스타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바리스타는 목에 카메라 스트랩을 두른 나를 보고서는 이날 촬영 나오기로 한 사진작가로 잘못 이해한 모양이었다. 직장에 들어가기 전 잠시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하니, 본인은 필름 카메라로 사진찍기를 좋아한다면서 영도구에서는 흰여울마을이나 태종대로 출사나갈 것을 추천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고는 에스프레소에 들어갈 오렌지 사탕과 함께 시식해보라며 작은 티스푼 위에 얼그레이 사탕을 하나 더 얹어 주었다.
카페 안에는 로스팅 원두들, 아기자기한 굿즈, 커피 도구들, 심지어 차(茶) 상품까지 근사하게 진열되어 있다. 사실 부산 내에서 영도구는 빠르게 공동화(空洞化)가 진행되고 있는 곳 중 하나여서, 첨단 장비와 현대적인 인테리어를 갖춘 대형 카페와는 완전히 거리가 먼 지역이다. 실제로 모모스 커피 영도점의 문밖을 나서면 양옆으로는 영세한 공장들이 늘어서 있고, 그밖에도 크레인, 바지선, 어선, 컨테이너 등이 복잡하게 시야 안에 들어온다. 작은 해협 너머 광복동에 위치한 대형 백화점을 발견하고서야 내 위치가 영도구라는 걸 가늠할 수 있을 정도. 여하간 사람의 발길이 뜸한 이 지역에서 공동체를 소생시켜보겠다는 취지와 함께 지금의 카페는 문을 열었고, 그런 취지가 무색하지 않게 시간이 정오에 가까워질 수록 방문객들이 대거 몰리기 시작했다.
이후 나는 바리스타의 말대로 영화 <변호인>의 배경이기도 한 흰여울 마을을 찾았다. 이날 장거리 운전해야 하는 걸 감안하면 태종대까지 들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흰여울 마을에서는 남항대교 너머로 송도 해수욕장이 보인다. 송도 해수욕장이라면 이전에 가본 적이 있지만, 그때도 해안가에 저런 고층 빌딩이 있었던가 모르겠다. 전날 광안대교 위를 달리면서도 느낀 거지만, 몇 년 사이 부산에서 나름 이름 있다는 해수욕장에는 어김 없이 초고층 빌딩이 들어서는 모양이다. 꼭 해운대가 아니더라도 남구, 서구에도 초고층 빌딩이라니, 비록 하루이틀 머물렀다 가는 방문객의 시각이기는 하지만 부산의 풍경이 단일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가파른 경사에 옹기종기 모인 가옥들과 이를 이어주는 삐뚤빼둘한 골목들, 그리고 그런 골목들을 오르내리다보면 어김없이 마주하는 창백한 겨울바다가 흰여울 마을의 주된 풍경을 이룬다. 이처럼 철근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삭막한 건물들과 높은 산, 육중한 선박들과 넓은 바다, 섬과 뭍을 잇는 거대한 다리, 번갈아가며 해안선을 이루는 방파제와 백사장이 한꺼번에 펼쳐지는 부산의 풍경은 우리나라의 다른 어느 도시를 가도 찾아보기 어렵고, 나는 그런 부산의 풍경을 참 좋아했고 지금도 그렇다. 한편으로는 마천루와 달동네가 수없이 겹치는 이 도시의 풍경을 보며, 일종의 양극화야말로 부산이라는 정체성의 큰 일부를 이룬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 부산의 풍경도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조금씩 조금씩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부산을 떠난다. 짧은 방문이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몇 번 정도 휴게를 하게 될까 헤아려본다. 오전의 바리스타는 내게 자신의 본가가 서울이라 했었고, 서울로 운전을 할 때면 못해도 두 번은 휴게소를 들른다고 했다. 나에게도 여러 차례 휴식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면서 내게 두 번째 마음의 고향이기도 한 대전을 잠시 들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7번 국도의 종착지인 부산에서 나는 마침내 여행의 매듭을 짓기 위해 마지막으로 숨고르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