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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애니메이션일상/film 2016. 11. 20. 01:20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크리스티앙 데마르, 프랑크 에킨시/105>
사람들한테 별로 얘기한 적은 없지만, 한때 내 꿈은 애니메이터가 되는 것이었다. 그때가 중학교일 때. 그리고 한창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에 심취해 있을 때였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 특히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생각 한 번쯤은 해보지 않았을까 싶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가운데 가장 수작으로 꼽고 DVD까지 소장하고 있는 것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다. 그 다음 작품으로 나온 것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었는데, 전작에 비해 돈을 훨씬 많이 들인 느낌은 드는데 스토리와 울림은 그에 비례하지 않아서 실망감을 느꼈던, 그렇지만 다음 작품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에 손을 들어줬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하기 이전까지 감독한 작품들은 개인적으로 내가 느꼈던 '실망감'이 틀린 게 아니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해준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 작품으로는 최초로 금곰상을 받아들기까지, 미야자키 하야오를 세계적인 감독의 반열에 올려준 여러 수작들, 이를 테면 <이웃집 토토로>, <천공의 성, 라퓨타>, <원령공주>만으로 그는 중학교 시절 내 감수성을 자극해준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후 애니메이션 영화와는 점점 거리를 두게 되었다. 지브리 스튜디오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에 들어가면서부터 일본 애니메이션과는 한참 멀어졌고, 드림웍스와 픽사, 디즈니에서 만들어내는 애니메이션이 그 자리를 메웠다. 물론 미국에서 생산되는 컴퓨터 애니메이션도 탄탄한 스토리와 캐릭터의 개성 때문에 정말 매력적이고 중독성 있었지만, 일본 특유의 셀 애니메이션처럼 수작업 느낌이 묻어나는 애니메이션 가운데 마땅히 볼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은 불만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리 폴만'이라는 이스라엘 감독의 <바시르와 왈츠를>이라는 작품은 이와는 별도로 기억에 남는다. 전쟁의 참상을 다룬 이 애니메이션 역시 대단한 작품인데 미국 애니메이션이나 일본 애니메이션과는 분명히 다른 색깔을 지닌 작품이었다.
한편 프랑스 애니메이션이 유명하다는 것은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애초에 애니메이터를 잠시나마(;;) 장래희망으로 생각했을 만큼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세계 최대의 애니메이션 행사인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이 매년 프랑스의 어느 소도시에서 개최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교류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프랑스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전혀 몰랐다. 프랑스 작가의 일러스트레이션이라면 접해본 적이 있다. 프랑스풍의 그림체나 색감은 그저 그런 정지된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접해본 것이 전부였다.
프랑스 애니메이션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는 새로운 애니메이션이란 무엇인가 그 진수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신선한 작품이었다. 스토리, 그림, 성우(마리옹 꼬띠아르가 주인공의 성우를 맡는다) 모두 만족스러운 애니메이션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고퀄리티의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장인 정신마저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물론 컴퓨터의 도움을 많이 빌렸겠지만, 손으로 한 획 한 획 그어나간 세심하고 꼼꼼한 그림이 생생하다. 그림의 정교함 때문에, 잠시 2001년에 나온 일본 애니메이션 <메트로폴리스>가 떠올랐다.
'조작된 세계'를 표상하는 '두 개의 에펠탑이 우뚝 솟은 파리 시내'라는 설정도 재미있다. 하나의 에펠탑이 파괴되고 다른 하나의 에펠탑만이 남는 순간, 파리는 '조작되지 않은 세계'로, 즉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온다. 영화의 스토리에 대해서는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도 그런 것이 <아브릴의 조작된 세계>=<멋진 신세계>라 봐도 거의 무방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급진적 발전이 가져온 사회의 황폐화에 대한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올더스 헉슬리가 그린 <멋진 신세계>와 똑 닮아 있다.
한편 아인슈타인, 노벨, 파스퇴르와 같은 20세기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세상에서 사라져간다는 설정, 따라서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설정도 참 재미있었다. 여러모로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이고, 그러나 동시에 주제의 명료함까지 겸비한 작품이었다. 별 기대 없이 상영관에 들어갔는데 이 정도면 대만족이다. 기회가 닿을 때 이 애니메이션의 제작과정을 진두지휘한 두 감독의 작품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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