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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하늘에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는데, 곡두터널을 지날 즈음에는 두터운 구름이 걷혀 있었다. 곡두터널은 천안과 공주시를 이어주는 짤막한 터널이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린 차는 천안을 빠져나온 뒤부터 내내 구불구불 국도를 달렸다. 차머리 위로 흘러가는 나뭇잎은 벌써 한여름을 예고하고 있었다.
내가 이날 향한 곳은 마곡사였다. 내가 마곡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산사'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의 일이다. 안동을 여행하던 중 우연히 봉정사라는 곳을 찾게 되면서 산사의 존재를 알았다. 우리나라에 산 속에 자리잡은 사찰이야 한두 곳이겠냐마는 나는 이때의 여행을 계기로, 영주의 부석사와 보은의 법주사를 차례차례 찾았다.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지방에 자리한 통도사와 선암사, 대흥사도 거리는 멀지만 언젠가 찾아가고 싶은 곳들이다.
충청도에 자리한 마곡사라고 하면 서울에서 제법 가까울 법도 하건만, 마곡사로 접어드는 마을 일대는 무척 시골 같은 풍경이고 고속도로와도 동떨어져 있어서 접근성이 그리 좋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렵다는 점이야말로 빌딩숲 속에서 갑갑하게 살아가는 내가 바라던 것이었으니, 차머리 위로 흘러가는 푸른 잎과 맑개 갠 하늘이 기분 좋게 느껴진다.
마곡사의 구도는 조금 특이하다. 마곡천을 사이에 두고 남원과 북원이 나뉘어 있다. 그중 화엄신앙이 이뤄지는 대웅보전과 대광보전은 북원에 자리하고 있고, 선(禪) 수행이 이뤄지는 영산전은 남원에 자리하고 있는데 방문객은 해탈문을 통해 남원을 먼저 접하게 된다. 많은 건물들은 왜란 이후 효종 시기에 중건되었다고 전해지고, 남원 안에서는 특히 명부전(冥府殿) 건물이 옛스럽고 신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다리를 건너 북원으로 접어들면 비로소 대광보전 앞 높다란 오층석탑과 그 너머로 대웅보전의 2층 건물이 어렴풋이 보인다. 석탑을 마주보고 닮은 꼴로 향나무가 솟아 있는데, 을미사변 이후 이곳으로 피신해 있던 김구가 직접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햇빛이 가감없이 내리쬐고 있는 오층석탑 주위로 절간들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고, 처마 밑 응달에서 사람들이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데 대광보전에서는 법경 외는 소리가 나른하게 들려온다.
대웅보전에 오르면 기왓장이 얹혀진 담장 너머로 마곡사 절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처님 오신 날이 지난지 얼마되지 않아 절간과 절간을 잇는 길목마다 연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춘마곡이라 할 만큼 봄풍경이 아름다운 이곳이라는데, 나는 봄이 가장 먼 초여름이 되어 이곳을 찾아 그런지 사찰 풍경에서 무서울 만큼 생명력과 무성함이 표출됨을 느꼈다.
이후 나는 냇가로 내려와 징검다리를 건너 남원 쪽으로 되돌아왔다. 마곡천 맞은편에서 바라보는 북원의 풍경도 운치가 있었다. 오래된 절간은 때로 지면과 수직을 이루지 못하고 비스듬한 선을 이루었는데, 그 위에 올라선 처마의 곡선이 시간에 닳아버린 윤곽을 이루어 마음 한켠이 쓸쓸해지는 것 같았다. 처음에 들어왔던 해탈문을 다시 빠져나오면서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속(俗)의 번뇌가 말끔히 씻겨 내려갔기를 바라며 짧은 여정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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