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유가 전제하는 것은 ‘주체’와 ‘권리’ 사이에 성립되는 무분별한 관계의 단절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어느 누구도 권리의 직접적인 주체가 아니며 스스로 권리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반대로 인간은 의무의 주체다. 그리고 이 의무는 오로지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객관적인 차원의 권리로 변한다. —p.45
일찍이 니체가 주목했던 것처럼, 법적 면역화는 두 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가 충족될 때에만 본연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첫째, 공통적인 것의 분배가 ‘권력의 실질적인 균형’을 토대로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둘째, 다른 모두에게 불평등한 교환을 강요할 수 있을 만큼 현격한 우위를 점하는 권력이 실재할 때 가능해진다. —p.49
1) 시작 단계에서는 법적인 차원에서 판단할 수 없는 폭력적인 행위가 항상 법적 권리를 정초한다. 2) 그런 식으로 제도화된 법적 권리는 권리의 영역 바깥에 실재하는 모든 폭력을 차단하려는 성향을 나타낸다. 3) 하지만 이를 실제로 차단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폭력, 더 이상 제도화에 소용되지 않고 제도화된 권력을 보존하는 데 필요한 폭력이다. 바로 이것이 궁극적인 차원의 권리다. 권리는 폭력을 제어하기 위한, 폭력에 대한 폭력이다. —p.56
면역은 교류와 정반대되는 범주가 아니라 오히려 교류의 ‘조건’과 ‘결과’를 함께 결정짓는 요소다. 공동체 혹은 교류 체계가 먼저 존재했기 때문에 뒤이어 면역화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공동체가 외부에서 침투하는 무언가로부터, 혹은 내부에서 자라나는 무언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면역력을 키우는 것도 아니다. …루만의 관점에서 ‘교류’는 이미 그 자체로 ‘면역화’다. —p.86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모든 살, 모두와 각자의 살을 육화하기 위해 자신의 신성을 변화시키는 순간에 주목하는 입장과 모두의 살이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에서 정체성을 발견하게 되는 역방향의 과정에 주목하는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 전자의 경우 관건은 ‘다수’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팽출 현상이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하나’ 안에서 일어나는 ‘다수’의 재개 현상이다. 리시르는 이 역행이 시작되는 결정적인 지점을 부활의 순간과 일치시킨다. 다시 말해, 이 역행은 텅 빈 무덤에서 그리스도의 살이 교회의 ‘육화되지 않은’ 몸에 상징적인 방식으로 옮겨지는 순간 시작된다. —p.136
보완(compenser)은 상처의 치료(panser)에 비유할 수 있다. 상처를 치료하려면 이를 감싸고 감추어야 한다. 하지만 상처는 치료를 통해 증발하는 것이 아니라 치료제에 가려진 상태로 남는다. 치료제는 상처를 완화하고 가라앉히고 아물게 하지만 동시에 이를 부각시키면서 상처에 또 다른 현실을 부여한다. 모든 가면은 정체를 폭로한다. 다시 말해, 보완은 대상을 변화시키지만 변화한 대상을 감추려고 하는 동시에 전시하며 이러한 차이 속에 정립시킨다. —p.157~158
한 피조물의 조직적인 성격이 강하면 강할수록, 아울러 이 조직을 구성하는 기관들이 각각 고유의 세계와 환경에 반응하는 만큼 기관들 간의 관계가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이 피조물이 지닌 힘과 그의 본능이나 기량의 확실성도 줄어들기 마련이며, 바로 여기서 그가 실수를 범할 가능성과 그의 활동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발생한다. 따라서 인지력을 지닌 피조물은 결국 배움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이제는 그의 본성과 본능이 너무 적은 것을 가르쳐주고 그가 본성과 본능만으로 실현할 수 있는 것도 터무니없이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본능의 약화 현상을 보완하듯, 그는 훨씬 더 방대한 행동 영역, 보다 풍부한 목적과 수단의 가능성을 획득한다. —p.171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필요한 조건들을 외부에서 얻지 않고 스스로 창출할 줄 아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선험적인(a priori) 영역을 구축하는 것은 인간의 경험적인(a posteriori) 성격이며, 그래서 인간은 선험적인 방식으로 경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자유는 바로 이러한 논리적, 시간적, 존재론적 불균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부재를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자유다. —p.176
결국 인간은 자신의 일부를 보존하기 위해 또 다른 부분을 말 그대로 ‘놀이’에 빠트릴 수밖에 없는 존재다. 생존은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따라서 요구되는 것은 중재이며 주체의 분리를 위해, 서로 만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탈주의 경로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혹은 만나더라도, 부정적인 만남만이 가능하다. 외형적인 차원의 자아 실현을 위해 인간은 본질적인 차원의 자아실현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 —p.185
절도는 무엇보다도 차별화의 장치 혹은 원천이다. 예를 들어, 절도는 과도한 간섭이나 심지어는 분별력의 상실에서 비롯되는 경솔함과 천박함을 거부하며 적절한 경계를 설정한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절도는 ‘바름(Richtigkeit)’과 동일한 의미범주에 속한다. 이 ‘바름’은 ‘방향(Richtung)’과 권리(Recht)‘의 개념에도 함축되어 있다. —p.190~191
생산노동의 의무와 이 의무가 수반하는 강력한 제약에서 벗어난 인간은 결과적으로 심리적 내면성의 비정상적인 성장과 이에 비례하는 현실성 감소의 위험에 지속적으로 노출된다. 제도는 주체성의 비대 현상에서 분열의 압력을 극복하지 못한 채 쇠약해지는 양상을 보이다가 결국에는 감당하기 힘든 요구들의 홍수 속에 와해된다. 결과적으로, 제도적 질서의 객관적 중재에서 벗어난 삶의 모든 영역은, 이미 새로운 유형의 자연이 되어버린 인위적 세계의 보호를 받는 것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폭발해버릴 위기에 처한다. —p.203
오로지 신체 안에서만, 삶은 삶 자체로 존속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성장하고 강해지고 번식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논리는 완전히 부정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신체는 삶이 전개되는 특권적인 영역인 동시에 다른 어느 곳보다 죽음의 위협이 감지되는, 아니, 죽음에 앞서 질병, 노화, 소모의 위협이 감지되는 영역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구축적인 병행성이, 즉 삶과 죽음, 성장과 퇴화의 병행성이 신체를 전자와 후자의 ’접근만 가능하고 접촉은 불가능한‘ 영역으로, 따라서 정치의 면역화 의지가 실현될 수 있는, 즉 삶이 죽음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최대한 지연하고 죽음을 삶의 활동 영역에서 가장 먼 지점으로 밀어내는 것이 가능한 영역으로 만든다. 신체는 이러한 투쟁의 터전인 동시에 도구다. —p.217~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