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힘들지는 않더라도 잔뜩 스트레스 주는 업무,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업무, 누가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는 업무를 포괄하 ‘텅 빈 노동’이라는 개념의 대안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가짜 노동pseudowork’이라는 적당한 용어를 찾아냈다. ―p. 94
지난 세기 무대 뒤 노동의 폭발적 증가, 특히 지난 50년간의 가속도가 가짜 노동의 완벽한 양육 환경을 조성했다. 그리고 이렇게 된 원인의 일부는, 무대 앞 노동을 먼 곳에서 들여온 값싼 인력과 자동화 기계에 위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선진국에 남은 것은 사무직 일자리뿐이다. 그렇다면 사무직 노동 대신 더 많아진 자유 시간을 즐길 수도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선택되지 않았다. ―p. 101
“오래된 낡은 문화가 아주 광범위하게 퍼진 땅에서, 새로 태어난 젊은 문화가 숨도 쉬지 못하고 순수한 특유의 표현 형태를 성취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의식조차 온전히 발달시키지 못한 상황을 가리키기 위해, 나는 역사적 허위 형성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젊은 영혼의 심부에서 솟아오른 모든 것이 낡은 거푸집에 갇혀, 젊은 감각이 낡은 틀 안에서 딱딱해진다. 그리고 자신의 창조력으로 자랄나는 대신 먼 곳의 권력을 미워할 수 있을 뿐이며 그 증오는 자라서 괴물이 된다.” ―p. 110
바쁜 것이 좋고 필요하고 도덕적이라는 생각은 가짜 노동을 낳는 합리화 중 하나다. 또 다른 합리화는 계속 일하다 보면 더 많은 자유 시간이 어느 시점에 후식처럼 자동으로 나올 것이라는 관념이다. 아마 태양이 다 타버리기 직전쯤 될 테지만 말이다. 세 번째 의심스러운 합리화는 생산성과 노동시간 사이에 비례관계가 있다는 관념이다. 이런 합리화는 어떤 근거도 없으며, 아마 전적으로 틀렸을 것이다. ―p. 152
영어권 나라의 공공 부문에서 먼저 도입된 민간 부문의 경영 도구는 다른 나라의 분위기도 바꿔놓았다. 조직화, 업무 분화, 업무 명칭, 경영법, 관리 직책 등 미국 기업의 용어가 점차 지배적으로 사용된다. 아마도 이런 ‘기업적’ 제도와 그 모든 원칙, 규정을 둘러싼 신비주의가 상당한 매력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기업적 방법’이라는 이름의 독립 공화국 같아졌고, 결국 국가 안의 국가가 되었다. ―p. 176
방침, 정책 같은 것을 본인과 세상 사이의 ‘방어벽’으로 설치한다. 루이세는 더욱더 많은 정책, 전략, 방침을 더하면서 그것들의 도입 과정에 사람들의 관심을 모음으로써 문제 자체를 해결하고 책임지는 데는 소홀해지는, 심각한 윤리적 문제를 눈치챘다. 이 모든 정책과 윤리는 그저 더 많은 가짜 노동을 만들어내고 책임을 회피할 구실을 준다. ―p. 206
“경쟁이란 모두가 일어서면 누군가는 발끝으로 서게 되고, 곧 모두가 발끝으로 서야 함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안 좋은 위치에 있지 않기 위해서죠. 그것이 우리를 과시성으로, 환상과 겉치레로 몰아갑니다. 모든 게 좋아 보여야 하는 거죠. 때로 경쟁은 좋은, 실행 가능한 해결책을 가져오지만 그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많은 공공 부문 기관들이 일을 잘하지 못하지만 외부에서는 잘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환상’을 너무 많이 만들어내고 있어요.” ……“마케팅은 우리 시대의 패러다임입니다. 우리는 상징적 오염과 이미지로 가득한 ‘설득 경제’에 살고 있어요. 이건 또한 주의력 분산에 기반을 둔 통속 경제입니다. 우리에겐 끈기가 더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단기 쾌락을 최대한 활용하죠.” ―p. 214~215
“일단 주요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행동의 합리성이 결정의 합리성을 서서히 훼손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p. 228
이제 사람들은 남들과 같이 흐름의 절정에 올라타고 남들이 하는 프로젝트에 합류하느라 너무 바쁘다. ‘아니오’에 대한 두려움은 ‘네’에 대한 갈망으로 대체됐다. 비판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남들과 연결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긍정성의 문화로 향하는 길을 닦아놓은 이 같은 변화는 이제 SNS의 ‘좋아요’로 표현된다. 긍정적이 된다는 것은 또한 남들에게 관심받는 한 방법이 되었다. ―p. 236~237
애덤 스미스가 노동을 가치의 원천으로 정의했을 때, 그는 노동에 걸리는 시간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것이 우리를 존재론적 재난으로 밀쳐냈고 자족적 악순환으로 귀결시켰다. 우리 중 누구도 영원히 살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대신, 환하게 불켜진 사무실에 앉아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죽음의 신을 기다린다. 그러고 싶지 않다면 금기를 깨야 한다. ―p. 291
사물을 만들고 처리하는 행위는 인간이 자신의 환경과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이며, 한 인간이 세상에 들어가서 자기 자신이 되는 방식이다. 인간이 환경을 처리하고 자신을 외면화, 즉 체현하는 건 노동을 통해서라고 헤겔과 마르크스는 말한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 경제 내 노동의 분화는 노동자를 소외시켰지만 결과적으로 그건 긍정적인 발전이었다. 왜냐하면 인류는 단독 행위를 통해서는 결코 진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노동의 분화는 노동의 직접성과 정반대이지만, 이런 안티테제는 진보를 자극할 수 있었다. ……우리가 더 자유로워졌는가 하는, 1930년대 선조가 제기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노동시간보다 더 많은 자유 시간을 가졌는지뿐만이 아니라 ‘일에 더 많은 자유’를 가졌는지 혹은 노동생활이라는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춰보는 데 어려움이 없는지도 고려해야 한다. ―p. 323, 326~327
“이렇게 금기시되는 이유는 자존감 때문입니다. 현대 세계에서 우리 정체성은 어디에 달려 있을까요? 종교와 국가의 중요성은 쇠퇴하고 있기에, 이제 사람들은 일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자기 인식을 받치고 있던 깔개를 누가 잡아 빼면 기분 좋을 수 없죠. 사람들은 성실한 일꾼이자 회사에서 중요하고 대체불가능한 직원으로서의 이미지를 보호하려 합니다.” ―p. 330
문제는 일이 더 이상 세계와의 유기적이고 본질적인 상호작용이 아니게 되고, 다른 본질적 상호작용을 대체하면서 시작됐다. 즉, 할 일 없음의 공포를 막기 위해 본질적이지 않은 일을 더욱 많이 하면서 문제가 심각해진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은 세계와의 상호작용이라기보다는 불안 관리 전략이 된다. ―p. 338~339
프랑스 실존주의자 장 폴 사르트르에 의하면 선택은 늘 윤리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삶을 사는 방식이 타인에게 어떤 선택을 할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무엇을 하든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일찍 집에 가기를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직장의 가장행렬로부터 자신을 해방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길이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 ―p. 342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스스로 초래한 미성숙에서 벗어나는 것이 ‘계몽’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사람들이 멍청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반대로, 우리가 멍청한 이유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회피하고 편견에 따르기 때문이다. 편견에는 상식으로 맞서야 할 필요가 있다. 칸트는 “사페레 아우데”, 즉 ‘알고자 하는 용기’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철학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원칙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p. 352
무대 앞 노동이 점차 사라지고 공산품이 쇠락하는 시기를 우리 문화는 따라잡지 못했다. 무대 뒤 노동이 상황을 영원히 바꿔놨는데도, 사람들은 시간과 생산력 사이에 제한된 상관관계를 계속 믿는다. 그에 더해 일이 소명이고 일의 부족은 금기인 문화에서 계속 살기를 고집한다. 우파와 좌파 둘 다 그 신화에 기댄 정치 체제를 지지한다. 지난 30년간, 우파는 실업을 개인이 자초한 고난으로 규정하는 데 성공해왔다. 하지만 좌파에게는 일의 본성이 바뀌었음에도 정규직의 권리를 떠들어온 책임이 더 있을 것이다. ―p. 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