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간(Stanze)일상/book 2024. 7. 21. 10:51
나태한 인간의 타락은 대상은 원하면서도 그것에 이르는 길은 원하지 않는 욕망의 타락이다. 그는 욕망하면서도 욕망의 성취를 위한 길을 가로막는다.
―p. 35
우울증은 사랑하는 대상의 사라짐에 대한 거부반응으로서의 철회라기보다는 차라리 가질 수 없는 대상을 마치 잃어버린 대상으로 보이게 하는 상상력에 가깝다. 리비도가 만약 실제로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마치 무언가를 정말로 잃어버린 것처럼 행동한다면 그 이유는, 한 번도 소유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살라진다는 것이 불가능한 무언가를 마치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게 하고 또 한 번도 사실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에 소유할 수도 없는 무언가를 하나의 잃어버린 물건으로 여길 수 있도록 하는 가상의 장면을 무대에 올리기 때문이다.
―p. 58~59
우울증 환자가 편안한 마음으로 버려진 수수께끼들 사이에 혼자 외롭게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여기에, 정말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붙잡을 수 없는 것뿐이라는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의 비밀이 적혀 있는 과거의 유물들처럼 이 버려진 물건들 속에 각인된 것은 영원히 잃어버린 상태로만 가질 수 있는 것의 섬광이다.
―p. 73~74
주물은, 육체의 일부와 연관되든 무기적인 사물과 연관되든, 어머니의 남근이라고 하는 무의 실체인 동시에 그 부재의 기호다. 무언가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부정을 상징하는 주물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분열 속에서만 명맥을 유지할 수 있으며 그 분열 속에서 일어나는 역반응이 본격적인 자아분열의 핵심을 구축하게 된다.
―p. 78
주물이 두 개의 모순된 현실을 보여주는 기호이기 때문에, 페티시스트가 자신의 주물을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것처럼 상품의 소유자 역시 써야 할 물건으로서의 상품과 가치로서의 상품을 결코 동시에 향유할 수 없을 것이다.
―p. 88
느낌에 의해 생성된 움직임과 열정이 뒤이어 상상력에 전달되면, ‘상상’은 지각된 사물의 부재와 상관없이 유령을 만들어낸다.
―p. 157
아베로에스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양쪽 면을 동시에 바라볼 수 없는 거울을 예로 들며 설명하듯이, ‘상상’ 속에서 유령을, ‘감각’ 속에서 대상의 형태를 관찰하는 것이 가능하면서도 그것들을 동시에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p. 175
프네우마는 신체의 원동력이며 작은 몸을 가지고 있고 ‘불’처럼 밝아서 온 우주에 스며들며 모든 존재를, 곳에 따라 더 많이 혹은 적게 침투하는 요소인 동시에 성장과 감각의 원동력이다. 신성하고 ‘예술가’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이 불은 동시에 태양과 여러 별들의 성분이기도 하다. 이는 곧, 식물과 동물의 생명의 원동력이 별들이 가지고 잇는 성분과 본질적으로 일치하며 단 하나의 유일한 원동력이 우주를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열기, 이 불은 모든 인간 속에 존재하며 삶을 전한다.
―p. 190~191
이성의 성분은 하나의 몸을 가진 빛과 같고, 상상은 어떤 몸의 이미지인 만큼 하나의 그림자인 셈이다. 따라서 상상은 이성이 있는 곳에, 거의 빛 속에 끼어드는 그림자처럼 도달해 빛과 하나가 된다. 상상은 이성을 향해 다가서면서 또렷한 모습을 드러내지만, 빛과 하나가 되는 순간 빛을 휘감고 덮고 어둡게 만들어버린다. 이성이 상상을 단 한 번의 응시로 받아들일 경우 상상은 이상을 외부에서 감싸 안는 일종의 옷이 된다. 쉽게 벗을 수 있고 그것에 구속될 필요가 없는 셈이다. 하지만 이성이 상상을 쾌락으로 받아들일 때 상상은 일종의 살갗으로 변한다. 즉, 고통 없이는 쉽게 떼어내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진정한 영인 영혼과 진정한 몸인 육체는 쉽게, 그리고 서로의 유익을 위해, 스스로의 한계 지점에서 결속을 도모한다. 즉, 몸은 아니지만 몸과 흡사한 ‘영혼의 환상’ 속에서, 그리고 거의 영에 가까운 ‘육체적 감각’ 속에서 이들은 하나가 된다.
―p. 204~205
에로스의 긍정적인 양극화는 사실 시인들에게 유령적인 성격의 절망적인 고조와 일치한다. 의사들이 아모르 헤레오스의 치료를 위해 육체적인 사랑을 권하고 환자를 그의 “거짓 상상”으로부터 돌이키기 위해 모든 방법들을 동원하는 반면 시인의 사랑은 집요하고 엄격하게 유령의 순환체제 내부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시인의 사랑은 피하지 말고 초월하지도 말고 끝까지 횡단해야 하는 상상력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닮았다. 상상력이 죽음에 이르는 병과 함께 바로 구원의 극적인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p. 251~252
시가 사랑의 기쁨으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유령과 욕망이 언어 속으로 합류할 필요가 있다.
―p. 263
기호는 그 안에 보여주는 주체와 보이는 사물의 이원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부서지고 양분화 된 무엇임에 틀림없지만, 이러한 이원성이 단일한 기호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는 만큼 그것은 동시에 조합되고 통일되어 있는 무언가에 틀림없다. 상징적인 것은 곧 악마적이다. 즉, 나뉜 것을 통일하는 인식 행위로서의 상징은 곧 이 앎의 진실을 끊임없이 위반하고 고발하는 악마적인 것과 일치한다.
―p. 273
의미작용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양면성의 기반은 존재의 서구적 경험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현존의 원천적 파열 속에 있다. 이 파열로 인해 현존 앞에 등장하는 모든 것은 현존 앞에 유예와 소외의 장으로서 등장한다. 여기서 등장은 은폐, 존재는 결핍과 일치한다.
―p. 273~274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의 상징적인 것이 사실상 사라지는 것은, 자유롭고 개성 있는 존재가 또렷하지 않고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표현 대신 그것의 내용과 형식을 구축하는 곳에서 일어난다.
―p. 275
우리는 자연스럽게 왜 현대문화가 ‘공포’와 ‘상징’을 그토록 집요하게 동일한 것으로 여겨왔는지 질문해볼 수 있다. 상징 앞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불편함”의 원인은 아마도 우리 문화가 의미작용을 해석하는 틀의 표면적인 단순함이 그 틀 안으로 쉽게 끌려들어가려 하지 않는, 우리아ㅗ 좀 더 친숙한 원천적인 의미작용의 거세를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할 것이다.
―p. 292
한 기표가 또 다른 기표를 대체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쌍방의 부인을 통해 서로의 관계가 유지된다고 보아야 한다.
―p. 296
사물들의 세계에서 주물이었던 것은 언어의 세계에서 은유가 된다.
―p. 301
진정한 의미에서 언어의 마지막 법칙이란, 단 하나의 용어 안에 거주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언어적인 상징들이 언어가 가리키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이며, 어쨌든, a는 b의 도움 없이 무언가를 가리킬 능력이 없고 b도 마찬가지로 a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a든 b든 서로 간의 상대적인 차이가 아니면 존재할 가치가 없거나……
―p. 309
기원이란 곧 출현과 의미의 가능성 자체를 기원의 부재에 두는 흔적의 원형이다.
―p. 314
'일상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물과 비사물 (0) 2024.08.05 완벽에 관하여 (0) 2024.07.29 가짜노동(Pseudowork) (0) 2024.07.15 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 (0) 2024.06.10 임무니타스 (0) 2024.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