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신념’이라고 여긴 것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나 생각지 못한 전개에 충격을 받기도 한다. 인생에 쓰나미 같은 변화가 닥칠 때 사람은 예상 밖의 행동을 한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 삶을 돌이켜 보면 최악의 순간에 완전히 매몰되는 듯해도 그 경험을 통해 정화되는 부분도 있었다. 물론 실망과 고난이 딸르지만, 그 일을 계기로 묵은 감정이 씻겨 나가고 그동안 생각지 못한 새로운 관점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다는 면에서 참혹한 격변에도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기 바라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인생을 살다 보면 끔찍한 일을 겪는다. 실패, 상실감, 고통, 죽음은 누구나 감당해야 할 몫이다. 몸에 남은 흉터보다 그런 감정적 흉터가 더 왜가기도 한다. 그런 일을 누가 반기겠는가? 나도 전혀! 하지만 정말 힘든 일을 일부러 직시하고 귀를 기울이고 자세히 살펴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면 굳게 믿은 나 자신이 잘못되었거나 비겁하거나 옹졸했다는 사실을 어김없이 깨닫는다. 나는 나 자신이 한때 믿었던 부드럽고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p. 35
이 세상은 매우 추상적이다. 우리는 반사된 빛을 통해 세상을 보고, 꼬여 있는 조그만 달팽이관을 통해 소리를 듣는다. 모든 정보는 부스러기처럼 흩어져 있는 데다 사람이 그 정보를 어떤 방법으로 인지하느냐에 따라 왜곡되거나 변형된다. 부엉이와 하이에나는 사람보다 모든 감각이 훨씬 뛰어나다. 하지만 인류는 질서정연한 우주를 다소 왜곡된 창을 통해 내다보면서도 세계 안에 입자, 에너지, 힘, 운동, 과정이라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추론해냈다. 한 명 한 명의 사람은 엄청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에너지 물질로 이루어진 걸어다니는 은하계와 같다. ―p. 93
나이를 먹으면 한 가지 좋은 점도 있다. 내면세계는 물론이고 외부의 주변 환경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서 내 의도대로 되는 게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도덕이나 분노 등은 내 의지에 의해 만든 것이 아니다. 사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 내 의지로 만든 것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매일 시끄럽고 힘든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 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내가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갈등은 내가 뭔가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p. 144
절박한 문제나 앞으로 등장할지 모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혁신을 추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혁신에 대한 대중의 관심, 세련된 겉모습, 혁신이 곧 진보라는 잘못된 환상 때문에 혁신을 추구하는 것인지 잘 생각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현재를 바라보는 열정을 과거와 미래에도 쏟아야 한다. ―p. 170~171
우리의 삶에서 늘 함께하는 존재는 자기 자신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우리와 삶을 공유한다. 나는 만족감, 성취감, 품위야말로 삶의 질적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라 생각한다. 인생을 살면서 모든 순간이 가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자신을 만족시켜야 한다. ―p. 256
뉴욕시는 냉소적이고 외로운 도시라고들 한다. 젊은 시절에는 자기 연민을 자주 느끼는 편이었고, 그래서인지 뉴욕은 내게 차가운 도시로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뉴욕이 아니라 내 감정이 더 문제였다. 그때는 어둡고 슬픈 것을 좋아했다. 희망, 연민, 기쁨보다는 슬픔이나 고립감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 세상은 나를 전혀 반기지 않는 것 같은데, 내가 안 그런 척할 이유가 있겠는가? ―p. 277~278
내 삶의 한 조각이 당신 삶의 한 조각이 될 수 있고, 당신 삶의 한 조각이 내 삶의 한 조각이 될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남들에게 내가 어리석게 보일까 봐 걱정하는 마음은 줄어든다. 실제로 내가 어리석은 사람이고, 몇 번이고 그 점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하지 않으면 내가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아져, 더 많은 사람이 내게 와서 속 이야기를 털어 놓는다. ―p. 281
모든 세대는 자신의 바로 앞뒤 세대를 비웃고 조롱하는 특별한 호사를 누린다. 다른 세대의 흠을 찾으려면 상당한 예리함이 필요하다. 시대마다 목적, 장소, 이미지를 추구하는 과정에는 통찰이라는 알맹이와 다소 부끄러운 껍데기가 있다. ―p. 285
의지는 행동에 중심을 두지만, 그 마법은 우리의 능력과 정체성까지도 바꿀 수 있다. 의지의 결과를 인식할 때 영감을 줄 수도 있을 만큼 의지는 강력한 힘이 있다. ―p. 288
신체를 지배하는 기관으로서 두뇌가 위를 압도한 후로, 상호 이해와 상호 파멸이라는 두 가지 길이 인간 앞에 펼쳐졌다. 두 가지 길에는 씨앗이 이미 뿌려져 있다. 소실점은 전적으로 상상에 불과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다. 인생이라는 길에서 우리의 두 다리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만드는 평행선은 저멀리 지평선에서 만나지만, 그 점은 우리가 이동하는 만큼 계속 멀어진다.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 이성과 신비로움, 아름다움과 공포와 같은 것을 서로 이어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평행선은 결코 만나지 않는다. 우리는 끝까지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가 결국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p. 316
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앞으로 큰 업적을 이루어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인생을 꿈꿀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서 아름다운 결과물을 완성해내는 한 편의 교향곡 같은 장면을 보면서도 세컨드 오보에 연주자가 아니라 번스타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젊은이들을 무턱대고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번스타인이 결코 모르는 몇 가지 지식을 오보에 연주자들이 안다는 점을 그 젊은이들도 언젠가 깨닫길 바란다. ―p. 327
어떤 인생은 운 좋게 자연의 우아한 모습을 따라가지만, 그렇지 못한 인생은 자연이 남긴 얼룩에 불과하다. ―p. 334
의미는 우리가 열심히 내용을 받아들여 소화한 후에 내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존재 자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게으름과 절망에 사로잡히면 잘못된 기대에 빠져 의미가 존재 자체에 의해 성립된다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p. 337~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