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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것을 홀대하고 그것이 내게 쓸데없더라도, 혹은 이런 것을 가치 있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도 터무니 없을 것이다. 공기나 물처럼, 내가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할 때면 나는 무언가를 위반한다는 막연한 느낌이 든다. 뭉뚱그려서 말하면, 내가 위반하는 이유는 "자연"과 "문화"의 경계를 무단으로 넘나들기 때문이다. 가령 자연에 시시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엄하므로 자연을 위반하는 것이다. 가령 문화 바깥에서 가치를 논하는 것은 반인간주의이고 따라서 무엄함 이상이므로 문화를 위반하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과연 자연과 문화의 경계는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이들 사이에는 도처에 무인지대가 있고 도처에서 은밀한 월경(越境)이 일어나지 않는가? (p.10~11)문화의 산물 중 상당수가 소화되지 않는다는 이 문제는 분명히 일부는 인간의 소화 능력 때문이고, 일부는 산물을 소화하는 자연의 능력 때문이다. 상당수의 산물들이 쓰레기를 이루는 이유는 초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화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것은 쓰레기 안에 남아서, 인간이 소비보다 생산에서 덜 제한적임을 증언한다. 다른 한편, 그 외의 산물들이 쓰레기를 이루는 이유는 반자연적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소화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것은 쓰레기 안에 남아서, 인간이 반자연을 창조할 능력이 있음을 증언한다. (p.)
“현대적”...... 형상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명된다. 그러므로 내용과는 달리 형상은 인간 외재적이 아니라 인간적이다. 인간의 주위는 존재 영역이며, 인간은 그 영역에 자신의 영역, 즉 당위 영역을 대립시킨다.
“비판적”...... 인간 주위의 전반적인 엔트로피에서 형상은, 덧없이 짧게만 지속하는 음의 엔트로피적 계기이다. 인간은 때로는 발견하고 때로는 발명하는 형상들을 당위로서 존재에 대립시키지만, 일단 이처럼 존재 위에 얹히면 당위이기를 멈추고 존재하기 시작한다. (p.37~38)
이제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인간 조건에서 생산하는 면, 긍정적인 면, 형성하는 면만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소비하는 면, 부정적인 면, 파괴하는 면도 말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힘에의 의지”가 “영원회귀”, 물론 혼돈으로의 영원회귀의 일면일 뿐임이 분명해질 것이다. (p. 39)
벽은 정치적인 것과 사적인 것, 즉 공공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의 경계이자 나아가 이들의 초점으로 드러난다. 벽은 세계를 두 영역으로 나눈다. 하나는 생이 벌어지는 커다란 외부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생이 생기는 조그만 내부 세계이다. 하지만 이 둘 모두 벽 덕분에 가능하기도 하다. 벽이 없다면, 생은 벌어질 수도 없고 생길 수도 없다. 그런 이유로 그 불투명한 양가성을 지닌 벽은 어ᄄᅠᆫ 결정도 내릴ㄹ 수 없을 무시무시한 선택 앞에 나를 세운다. 나는 벽 바깥으로 걸어 나가 세계를 얻음으로써 나 자신을 잃을 수도 있다. 아니면, 나는 벽 안에 머물면서 나 자신을 찾음으로써 세계를 잃을 수도 있다. (p. 43)
대도시의 불 밝힌 거리, 특히 열대 지방 대도시의 불 밝힌 거리는 적어도 두 얼굴을 지닌다. 저녁의 얼굴에서는 인공적인 불빛이 드리우는 빛의 장막이 도시의 불행을 은폐한다. 이에 비해 새벽의 얼굴에서는 불빛의 객관적 차가움이 흡사 과학적 진단처럼 도시의 초라함을 전시한다. 그런데 어떻게 가로등이 그렇게 모순적인 두 가지 기능, 즉 연극적인 미화와 무정한 폭로라는 기능을 이행할 수 있는가? (p. 51)
현재 예술이 처한 위기는, 예술이 우리 주위와 우리 내면에서 어떤 공간을 충분히 갖지 못하는 것, 즉 우리 스스로 결정할 책임으 촉구하는 공간을 충분히 갖지 못하는 것과 관련된다. 예술이 현재 위기에 처해 있는 이유는 오늘날의 정치가 고갈될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p. 65)
우리의 물음을 상이한 두 방향으로 추적하면서 찾아낸 대답은 다음 두 가지이다. 첫 번째 대답은 가로등이 리듬에 따르는 어떤 문화적 무대 배경의 일부라는 것이다. 또 다른 대답은 가로등이 대중문화에 대한 우리의 양가적 관계의 일부, 즉 아무리 풀려 해도 묶어버리는 속박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로등의 양가성은, 첫 번째 대답에서는 우리에 대해 외적인 변증법으로 여겨지고, 두 번째 대답에서는 가로등에 대한 우리의 관계 속에 자리 잡은 변증법으로 여겨진다. 첫 번째 대답에서는 문화의 리듬으로 여겨지고, 두 번째 대답에서는 우리 내면의 분열로 여겨진다. (p. 71)
무언가가 새로운 것으로 체험되려면 이미 알려진 것이어야 하며, 알려지지 않은 것은 모두 아예 체험되지 않으므로 새로운 것으로 체험될 수도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는 내가 새로운 무언가를 결코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은 옳다. 내가 새로운 것으로 체험하는 모든 것은 오래된 것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p. 96)
나에 대한 타자의 명령에서 벗어나고 문화적으로 규정받는 데에서 벗어나려면, 이 타자가 이런 사물들의 본질임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타자의 명령법을 어떤 직설법으로 바꿔야 한다. (p. 99)
우리는 두 가지 방법으로 생각에 잠길 수 있다. 우선 자연적인 것을 홀대하는 의식적이고 의지적인 방법이다. 자연의 모든 무질서를 억압하는 이 방법은 특히 동양의 방법이다. 다음으로 자연적인 것을 홀대하는 덜 의식적인 방법이다. 모든 자연적인 것을 질서에 맞게 하는 이 방법은 기본적으로 서양의 방법이자 서양사의 목표이다. 동양의 방법이 지닌 위험은, 억압된 무질서한 것이 난폭하게 다시 나타나 그 억압하는 자를 생각하는 상태 바깥으로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서양의 방법이 지닌 위험은, 질서에 맞추는 데에 과도한 에너지와 시간이 필요한 데다 과도한 관심이 요구되어 생각에 잠기는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p. 106)
주체임은 자기 자신을 지웠다는 의미일 수 없다. 주체가 되는 것은 객체를 넘어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넘어섬은 객체를 전유하려는 몸짓이다. 따라서 저 믿음과는 반대로 주체는 객체에 맞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체는 객체를 집어삽켜 흡수하려는 어떤 소용돌이다. 다시 말해 주체는 자신의 낯설어짐을 극복하기를, 즉 모든 객체를 자기 내부로 받아들이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p. 108)
당시에는 “삶”이란 죽기 위해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식은 두 가지였다. 완강한 사물을 온순한 사물로 변화시키거나(“생산”이라고 부른다), 그런 사물을 건너뛰는 것(“진보”라고 부른다)이다. 그러다가 결국 변화시킬 수도 없고 건너뛸 수도 없는 문제들에 맞닥뜨렸다. 우리는 그런 문제들을 “궁극적 사물”이라고 불렀고, 그것 때문에 죽음을 맞았다. 이는 사물들 가운데서 사는 삶의 역설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죽음으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서, 흔히 말하듯이 “조건들에서 풀려나기 위하여”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고, 바로 어떤 해결되는 않는 문제들 때문에 죽음을 맞았다. (p. 131)
인간은 인간이 된 이래로 자신의 환경을 다루어 왔다. 세계 속에서 인간 현존의 특성은 손인데, 여기에는 다른 손가락들을 마주 보는 엄지손가락이 있다. 이처럼 인간 유기체에 특유한 손은 사물을 쥔다. 이 손은 세계를 사물로서 쥔다. 쥐는 것만이 아니다. 손에 쥔 사물을 이리 가져와서 변형시킨다. 손은 자신이 쥔 사물에 정보를 제공한다/형상을 각인한다. 그래서 인간을 둘러싸고 두 세계가 생겨난다. 하나는 “자연”의 세계, 즉 눈앞에 있고 쥐어야 하는 사물의 세계이다. 나머지 하나는 “문화”의 세계, 즉 손안에 있으면서 정보를 제공받는 사물의 세계이다. (p. 139)
내가 나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겨눈 채 공이치기를 뒤로 당긴다면, 나는 자살을 결정한 것이다. 일ㄹ견 가장 커다란 자유이다. 공이를 격발함으로ㅆ 온갖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공이를 격발함으로써 실은 권총에 미리 프로그래밍된 어떤 과정을 촉발하는 것이다. 나는 결코 “자유롭게” 결정한 것이 아니라 권총 프로그램의 한계 내에서 결정하는 것이다. (p. 143)
비사물적인 미래의 사회는 두 계급으로 나뉠 것처럼 보인다. 즉, 프로그래밍하는 사람들의 계급과 프로그래밍되는 사람들의 계급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계급과 프로그램에 맞춰 행동하는 사람들의 계급으로,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사람들의 계급과 꼭두각시들의 계급으로. (p. 144)
결심은 선택이다. 따라서 하나의 가능성을 취하는 대신 다른 모든 가능성을 잃는 것이다. 나는 결심할 때면 무언가를 얻고 무언가를 잃는다. 잠을 자기로 결심하면서 나는 무엇을 얻는가? 아무 것도. 나는 아무것도 얻지 않는다. 내가 얻는 것은 무이다. (p. 161)
나는 홀로 태어났기에 홀로이다. 그리고 나는 홀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 누구도 내가 태어날 때 나를 대리하지 않았고 내가 죽을 때 나를 대리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타자인 너는 아예 무가치하다. 나는 너를 대체할 수 없다. 나는 네가 홀로임을, 네가 대체 불가함을, 네가 교환 불가함을 안다. 내가 네 안에서 나를 알아보기 때문에. 내가 너를 인정하기 때문에. 나의 타자인 너는 내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죽으면 내가 너에 관하여 어떤 손실을 입는 것이 아니라 너의 죽음을 통해 모든 사물이 가치를 잃는 것이다. 사물들이 가치를 지니는 것은 내가 그것들을 교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교환하는 이유는 내가 네 안에서 나를 알아보기 때문이다. 나의 타자인 너는 모든 가치의 무가치한 기반이다.
......우리는 제각기 홀로 죽을 것이다. 우리는 함께 죽지 않을 것이다. 함께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나”와 “노”만 죽을 수 있다. “우리”는 죽을 수 없다. 우리는 불멸이다. 죽음은 우리에 대해서는 모든 권력을 잃었다. (p. 166~167)
육수는 점에서 무로 나아가는 중간 단계에서는 일시적으로 둔중하고 수상한 국처럼 보이고, 그 위에는 국자가 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더 엄밀하게 보면 이 중간 단계들은 열죽음으로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육수의 경향에서 그저 주전원에 불과하다. (p. 23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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