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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는 개인이 자신의 현실적 실존 조건과 맺는 상상적 관계를 표현한다.”
……우리는 현실적 실존 조건이라는 외부의 필요성에 끼워 맞춰지고, 상상적인 것이라는 ‘자기의’ 필요성에 스스로를 끼워 맞춘다. 이것이 우리의 사회적 실존의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논리다.
……저 일괴암 같은 문장, 자발적 복종의 거대한 공식의 의미는 이렇다. 우리는 오직 주체로서만, 오직 정체성을 가진 행동하는 주체로서만 훌륭하게 기능할 수 있다. 즉 자발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저절로 기능할 수 있다.
—p.29, 35
……우리는 성장 과정에서 낯선 외부의 이상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새로운 ‘스스로의’ 이상으로 인정한다. 이 역설에 주목해야 한다. 일차적 나르시시즘 상태에 있는 인간을 방해하고 낙원에서 몰아내는 것은 처음에는 부모가, 나중에는 사회가 제시하는 이미지와 표상인데, 바로 이것이 이제는 나르시시즘적 본능의 목표다. 나르시시즘의 이상은 몹시 반나르시시즘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양적 존재의 원초적 단일성, 직접적 체험과 하나 됨이 여기에서 변한다. 분열, 그러니까 이미지와 자아의 차이, 거리를 경험한다. ……이로써 주체와 이상의 관계가 최종적으로 결정된다. 라캉이 일컫듯 자신의 이상상(理想像)과의 근본적 “불일치”로.
—p.46~48
……주체는 우리가 되어야 할 이상과 현재 우리의 상태인 현실 간의 대립을, 이 불일치를 지양하려고 계속해서 애쓸 것이다. ……이 거리는 삶이 진행되면서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정반대다. 오히려 굳어진다. 이로써 자아는 늘 결핍된 자아에 그치며 늘 이상에 접근하려고 애쓴다. 그것은 헛되고, 그래서 드라마틱한 시도다. 왜냐하면 이상이라는 “허구의 선”은 라캉에 따르면 오직 “점근적으로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기준선에 기껏해야 근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선은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완전한 만큼이나 허구적이기 때문이다.
—p.50~51
자아이상은 앞서 보았듯이 모순적 심급이다. 자아이상은 일차적이고 자족적인 나르시시즘의 계승자이자 사회적 영향들의 저장고다. 따라서 자아이상의 목표 역시도 모순적이다. 자아이상은 완벽한 순환, 대양적 존재에 다시 이르고자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한 수단으로 요구를 충족시킨다.
—p.52
요구에 대한 적응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첫 번째 경우에는 적응을 위해 추종이 필요하다. 두 번째 경우에는 자기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초자아의 명령과 그 규범을 따른다. 규율적 관점에서든 도덕적 관점에서든. ……반면에 자아이상 호명에서는 금지가 아니라 본보기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도덕적 압력이 아니라 형성적 압력, 말하자면 미적 압력을 행사한다. 자아이상 호명은 말한다. ‘너는 네가 되어야 한다.’
—p.64
초자아에 대한 자발적 복종은 부분에 그친다. 혹은 적어도 부분에 그칠 수 있다. 반면 자아이상에 대한 자발적 복종은 항상 총체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발적 복종에 맞서 대항력을 동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준으로 주어지는 완전함을 우리는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 실패한다면 이상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게 아니라 이상을 제대로 충족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이상 충족에 실패한다면 양심의 가책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퍼져 나간다. 파괴적 열등감, 광범위한 모욕감이다.
—p.66~67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은 그때 벌써 상품 교환이 아니라 다른 메커니즘을 핵심 원리로 한 사회에 주목했다. 다른 메커니즘이란 경쟁이다. 모든 것이 경쟁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푸코에 따르면 이로써 획일성에서 다수의 차이들로 초점이 이동한다. 경쟁의 핵심은 사람들을 똑같이 만드는 게 아니다. 사람들을 대량 상품처럼 표준화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가진 비동일성의 ‘게임’이 핵심이다. 따라서 경쟁의 주체는 호모 에코노미쿠스, 즉 경제적 존재다. 푸코는 이 경제적 존재가 더 이상 낡은 의미의 교환하는 인간이 아니라고 한다. 새로운 의미의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다른 모든 이들과 경쟁하는 기업가로서의 인간이다.
—p.82
푸코는 이 기계가 “노동자와 분리할 수 없는 기계”라고 더욱 놀라운 표현을 사용한다. 이제 노동자는 역량 기계이며 역량 기계가 되어야 하는데, 이 역량 기계는 노동자와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역량 기계는 노동자에게서 떼어 낼 수 없다. 그것은 노동자 개인에게서 분리할 수 없다. 역량은 노동자와 함께 하나의 단일체를 이룬다. 하지만 역량은 노동자가 아니다. 개인은, 노동자는 그의 역량을 체현한다고, 말하자면 그의 기계를 체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91
……신자유주의의 나팔이 주체의 호명을 대체해야 한다는 것, 호명과 응답 대신에 자극-반응을, 자발적 복종 대신에 반사를 도입해야 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 그것은 신자유주의가 잘못 이해된다는 뜻이다. 마치 신자유주의 주체 없이 신자유주의가 가능한 양. 마치 관계들의 변화에서 핵심이 주체의 차원을 몰수하고 삭제하는 것인 양.
—p.99
신자유주의는 위장된 호명이며 마치 호명이 아닌 양 군다. 마치 또 하나의 층위가 없는 것처럼.
—p.115
……현실적 허구는 말한다. ‘네가 만일 제대로 투자한다면, 만일 성공을 거두면 너는 너 자신의 경영자가 된다.’ 만일 교환이 성공한다면 교환은 허구를 지양한다. 그러나 상상적인 것을 통한 호명은 완전히 다르게 작동한다. 상상적인 것을 통한 호명은 그 고유한 우주에 개인을 끌어들인다. 허구와 달리 상상적인 것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 현실에서 증명될 필요가 없다. 가령 신앙의 경우에는 이것이 바로 이해가 된다. 그런데 나르시시즘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나르시시즘 역시 고유한 논리를 따른다. 나르시시즘은 우리의 이상에 대한 관계에 우리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바로 이 과정에서 우리의 자발적 복종이 이루어진다.
—p.119
……발전한 자본주의에서 추구되는 주체, 모든 역설에도 불구하고 이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대항 논리는 나르시시즘적 주체다. 사람들이 신자유주의라 즐겨 부르는 것은 그러니까 나르시시즘을 필요로 하고 장려한다. 그러나 가짜 이름으로. 신자유주의는 말하자면 가짜 깃발을 달고 항해한다. 마치 자기 자신의 기업가가 상상적 구성물이 아니라, 시장 관계의 현실적 대응물인 것처럼. 시장의 ‘고독한’ 논리가 유일한 논리로 관철되도록 마치 자기 자신의 기업가가 상상적인 것을 그냥 삭제해 버린 것처럼.
—p.123
유일무이함, 고유 가치란 나르시시즘을 통해 경쟁 관계를 초월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적 신화를 통해 경쟁에 새로운 형태를 덧씌우는 것이다. 마치 경쟁이 비교할 수 없는 지위에 도달할 가능성을 내포한 것처럼. 마치 경쟁이 충만함, 즉 이상에 대한 약속을 포함하는 것처럼.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단독성에서 새로운 현실이 아니라 경쟁의 새로운 신화를 본다. 유일무이함은 단순히 새로운 지배적 원리로 보편적 경쟁과 불분명한 관계에 있는 게 아니다. 유일무이함은 경쟁에 대한 상상적 관계이며, 이러한 유일무이함은 경쟁의 대항 원리다.
—p.147~148
……성공은 모든 영역에서 관객의 평가에 매인다. 이 관객이 동료든(360도 피드백) 고객이든 아니면 엄밀한 의미의 관객이든 말이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로써 모두가 다른 사람의 심판관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따라 객관적 나르시시즘은 엄청난 불안정화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모두는 랭킹에서 앞자리를, 나르시시즘적으로 가치가 높은 자리를 순간적으로만 차지하기 때문이다. 자리에 대한 고정된 권리는 없다. 즉 항상 순간적으로만 유지할 수 있는 자리다. 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일시적인 일치에 성공하는 경우에조차 우리는 결코 이상이 아니다. 최선의 경우에조차 우리는 승자가 아니며 단기적으로만 그 자리를 차지한다.
—p.153~154
……유일무이함의 신화, 나르시시즘적 호명의 신화는 오늘날 우리의 대항 원리다. 그것은 현실적 관계에서의 보편적 교환 가능성에 대한 상상적 대항 원리다. 유일무이함은 새로운 구조 원리가 아니라 우리가 보편적 교환 가능성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유일무이함은 우리를 추동하는 역설적 대항원리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기능하게 만든다. 자발적으로. 우리는 이 대항 원리에 복종한다. 기대를 충족하고 요구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함으로써. 완전히 스스로. 자기 추동의 양태로. 객관적 나르시시즘이 장려하는 유일무이함의 신화는 우리가 자발적 복종이라 칭한 것을 낳는다.
자발적 복종이 여기 있다! 마침내 찾아냈다. 우리는 오늘날 자발적 복종의 모습을 발견했다. 현대인인 우리는 우리의 예속이 마치 구원인 것처럼 예속을 위해 싸운다!
—p.160
……객관적 나르시시즘은 엄청난 불안정화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모두는 랭킹에서 앞자리를, 나르시시즘적으로 가치가 높은 자리를 순간적으로만 차지하기 때문이다. 자리에 대한 고정된 권리는 없다. 즉 항상 순간적으로만 유지할 수 있는 자리다. 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일시적인 일치에 성공하는 경우에조차 우리는 결코 이상이 아니다.
—p.153
……나르시시즘적 호명의 신화는 오늘날 우리의 대항 원리다. 그것은 현실적 관계에서의 보편적 교환 가능성에 대한 상상적 대항 원리다. 유일무이함은 새로운 구조 원리가 아니라 우리가 보편적 교환 가능성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유일무이함은 우리를 추동하는 역설적 대항 원리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기능하게 만든다. 자발적으로. 우리는 이 대항 원리에 복종한다. …객관적 나르시시즘이 장려하는 유일무이함의 신화는 우리가 자발적 복종이라 칭한 것을 낳는다.
—p.160~161
……아기는 아직 자신을 주변 세계와 구별하지 못한다. 프로이트는 이를 일차적 나르시시즘이라 부른다. 이것은 제약 없는 전능함의 완벽한 행복이다. 이 경험에 대해 우리는 의식적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후 삶에서 이 잃어버린 낙원은 오직 예감으로, 느낌으로만 의식으로 떠오른다. 세계와의, 세계 전체와의 결합이라는 ‘대양적 감정’으로.
—p.167
……초자아의 기준들은 지켜야만 하는 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반면 자아이상은 곧 본보기이고 완전한 자아다. 상으로서 자아이상은 우리에게 완전함을 제시한다. 이 완전함은 자아보다 더 크고 더 낫다. ……즉 나르시시즘은 향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나르시시즘의 공식은 자아의 향상, 자기를-넘어-성장하기다. 그것은 이상을 향한 접근이다.
—p.176~177
이것은 결정적인 체험이다. 왜냐하면 중심이 되는 이 체험 속에서, 근본적으로는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세계가 내 것인 세계로 바뀌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즘적 인정은 낯선 세계를 말하자면 제집과 같은 세계로, 제집과 같다고 착각하는 세계로 바꾼다. 이 체험이 아무리 짧고 상상적이든 그렇다. 이로써 갈망이 생긴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야말로 중독적이다. 더 많은 인정을 받을수록 더 중독적이다.
—p.186
……집단은 “동일한 대상으로 자아이상을 대체하고 그 결과 자아 속에서 서로를 동일시하게 된 개인들의 무리”다.
—p.211
……초자아 그룹의 지도자나 그 대체자와 달리 스타는 우월함의 화신이 아니다. 스타는 오히려 완벽한 자기 준거성이라는 환상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한다. ……모든 것이 이상의 대리자가 될 수 있고, 모든 것이 스타의 지위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로써 공동체의 근본적 환상이 변화한다. 그것은 더 이상 ‘지도자가 나를 사랑한다’가 아니라 ‘스타가 나를 대상으로 삼는다’다. 나를 완전히 개인적으로 말이다. 스타가 사람이든 사물이든. 물건도 나에게 말을 걸고 나에게 무언가를 약속할 수 있다. 이를테면 충만감을.
—p.218
……베버와 푸코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자기 배려, 자기 관심은 권능 부여와 복종 사이, 힘의 향상과 제약 사이의 균형이라는 것. 하지만 각각의 제한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베버에게서 제한은 더 부정적 성격을 가진다. 신을 섬기면서 향략을 포기하는 것이니까. 푸코의 고대에서 힘의 제한은 더 긍정적 성질을 띤다. 제시된 이상을 통해서.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둘 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는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자기 관심은 더 이상 금기시되는 게 아니라 요구된다. 우리는 자기 테크놀로지에 대한 의혹에서 성공적으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자기 테크놀로지의 강박 속에서 살고 있다.
—p.240~241
……자기 향상은 사회에서 우리의 존재를 오나수하는 것이다. 자기 향상은 오래전부터 더는 현 상태에 대한 항의가 아니라 현 상태, 즉 정상성을 구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p. 247
……근본적 제한을 부여하는 금지와 달리 이상의 지배에서는 정반대의 것이 중요하다. 즉 결핍이 아니라 충만함이 핵심이다. ……이 충만함은 환상이다. 그러니까 기만적 상이고 환영이다. 왜냐하면 실제 충만함, 다시 말해 이상은 도달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모순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p.255~256
좋음에 대한 보편적 표상이 없으면 오직 나 자신의 정체성만이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나의 행동은 보편타당한 미리 주어진 규범을 따르는 게 아니라 오직 나의 주관적 확신만을 따른다. ……이런 의미에서 헤겔의 표현처럼 바로 나의 자아가 나의 행동의 내용이 된다.
—p.267
만약 나르시시즘적 ‘도덕’과 같은 도덕이 개별성과 감정을 토대로 세워진다면, 이는 개인이 자신의 특수성을 원칙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헤겔에게 이것은 오랜 기독교 전통에 따라 악의 정의다. 즉 ‘어마어마해 보이는 자만’이다. 그런데 이 자만은 그것이 보편적 원칙으로 격상될 때 불식된다. ……만일 개별적인 느낌에 기반을 둔 주관적 확신이 보편적 원칙으로 격상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자만이 아니며 우리가 나르시시즘적인, 몹시 반사회적인 ‘도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p.270
……자기 정립은 자아의 사회성에 대한 부정이다. 다시 말해 순수한 ‘나는 나다’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사회적 인정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역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적 인정을 스스로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인정은 반사회적 원칙에 기입되어야 한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이때 타자는 결코 실제 타자로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동의자로만 존재한다. 이것은 타자 안의 반영이 아니라 순전히 형식적인 인정일 뿐이다. 왜냐하면 동의는 꼭 필요하니까.
—p.279
……이 본질은 따라서 동의를 얻으려면 완전히 외화되어야 한다. ……이 동의는 나의 가장 내밀한 확신을 승인해야 하기에 다른 어떤 인정보다도 실존적이다. ……실존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자신의 아주 구체적인 실존 속에서, 완전히 개별적으로, 어떤 보편 범주의 보호도 없이 인정에 자신을 내맡긴다. ……나르시시즘은 이 동기에 아주 특별한 완벽성을 부여했다. 나르시시즘의 고통을 통해서. 왜냐하면 이때 우리는 너무나도 가차 없이 자신을 노출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근본까지.
—p.289~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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