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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가 유럽의 규범에서 멀어진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유사한 도전과 선택에 부닥쳤던 보헤미아와 다르게 폴란드는 유럽 국가들의 틀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았다. 그 결과로 폴란드는 좀더 후진적 국가로 남게 되었다. 그 대신 폴란드는 더 높은 수준의 독립성을 유지했다. 여러 개의 공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도 폴란드는 하나의 사회로서는 다른 곳보다 더 단일하고 단결된 상태로 남았다. 그 이유는 폴란드가 혼합적 군주제에 복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지리적으로 프랑스의 상당 부분은 영국 왕의 주권 아래 있었고, 독일 지역들은 프랑스 왕조의 통치 아래, 이탈리아는 노르만, 프랑스, 독일 군사 지도자의 승계 아래 있었다. 폴란드가 정치적 단위로서 살아남은 것을 보장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p.37
야기에우워 왕조의 통치는 의회 제도의 성장을 위한 온실과 같은 여건을 제공했다. 1370년에 카지미에시 대왕이 사망하자, 폴란드는 이 면에서 유럽 모든 국가 중에서 가장 앞섰고, 불과 150년 후 심지어 영국도 앞질렀다. 왕관의 권력은 여러 견제와 균형에 의해 제어되어 자의적으로 사용될 수 없었다. 세임은 모든 입법 권한을 독점했다. ……그러나 폴란드 민주주의의 기초는 그 운영 면에서 전적으로 귀족 계급인 슐라흐타가 담당하면서 출발부터 결함이 있었고, 슐라흐타의 구성이 다양한 만큼 그 이해관계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
—p.71
군주정과 공화정의 공존에는 분명한 모순이 있었지만, 폴란드인은 모순처럼 보이는 것에서 장점을 이끌어냈다. 정치 저술가 스타니스와프 오제호프스키는 폴란드 체제는 군주정, 과두정, 민주정의 가장 좋은 점을 결합했기 때문에 다른 어느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체제가 이런 정치 모델의 단점도 모두 안고 있다는 것은 간과되었다. 법률 집행주의자들의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세 정체 요소들 간의 관계는 명확하게 정의된 적이 없었다. 원칙적으로 세임은 주민 의사의 구현 기구였고, 그래서 입법권의 원천이었다. 상원은 법의 수호자였다. 왕은 하나의 정치적 실체이자 세임의 대변자였다. 세임은 군주의 개인 권력을 제한했지만, 자신들의 권력을 왕이란 개인에게 투영함으로써 왕을 행정 집행자로 만들었다.
—p.110
폴란드 의회 체제는 악명 높은 거부권을 인정하는 왜곡된 표결 방식으로 인해 더 취약해졌다. 이 원칙으로 상호 합의 없이는 어떠한 입법도 불가능해졌다. 이러한 관행의 일부는 원래 유럽의 모든 의회 체제에 존재했다. 이것은 일정 사안에 대해 만장일치 투표를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다만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동의하지 않은 사안은 완전한 권위를 가질 수 없다는 것과, 진지한 반대 목소리를 다수파가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두 신념에 근거한 것이었다. 반대하는 소수파의 발언도 경청해야 하고, 서로 논의해서 설득을 시켜야 하며, 전반적인 동의가 이루어졌을 때만 한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소수파, 심지어 단 한 명의 소수파도 입법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수파의 의견은 다루기가 힘들다고 판단되면 무시되었다.
—p.117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 영국의 튜더 왕가와 유럽의 다른 모든 통치 왕가는 중앙집권적인 정부, 이념적 단합, 점점 더 엄격한 통제를 통해 개인에 대한 지배를 강제하려고 노력했다. 주요 국가 가운데 폴란드만이 정반대의 길을 갔다. 폴란드인은 모든 정부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고, 강한 정부는 더욱 바람직하지 않다는 신념을 금과옥조로 삼았다. 이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하도록 강요할 권리가 없고, 생활의 질은 불필요한 행정적 잉여 구조로 인해 위축된다는 확신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상을 자신의 신민인 농민을 압제하는 사람들이 소유했다는 것은 새롭거나 예외적이 아니었다. 그리스의 근대 정치사상 창시자들이나 미국 혁명의 아버지들도 위선이나 마찬가지인 이러한 이중 기준을 현실에 적용했다.
—p.121
……슐라흐타는 놀라울 정도로 동일한 문화와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상호 배타적인 두 가지에 영향을 받았다. 첫째는 고대 로마의 발견으로, 그들은 로마와 현재 폴란드의 제도, 관습, 이념의 유사성을 발견했다. ……두 번째 영향력은 좀더 모호했지만, 훨씬 광범위했다. 16세기 초 여러 작가가 만들어낸 이론에서 유래한 이것은, 폴란드 슐라흐타가 농민과 같은 슬라브인이 아니라 사르마티아인의 후손이라는 이론이었다. ……충성과 존중의 관점에서도 기독교 기사의 이미지보다 사르마티아 ‘귀족 전사’라는 신화를 훨씬 자연스럽게 수용했다.
—p.125~126
……1550년대에 에라스뮈스가 깊은 사고를 하는 모든 폴란드인에게 등대 같은 역할을 했다면, 그들의 손자, 손녀에게는 예수회가 멘토가 되었다.
—p.161
코자크는 부족이라기보다는 생활 방식이었다. ‘코자크’라는 이름은 튀르크-타타르어에서 ‘자유로운 병사’라는 뜻의 단어였고, 그들의 정체성과 반유목적 생활 방식을 지칭했다.
—p.180
국왕이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국가 권력을 강화하려고 시도하면 이것은 곧바로 슐라흐타와의 대결을 불러왔다. 이런 시도가 성공할 가능성도 아주 낮았다. ……세임은 입법기구와 최고 법원 역할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쟁 선포, 강화 체결, 동맹 결성 등 통상 국왕이 행사하는 최고 행정권의 상당 부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행정을 집행할 능력이 없는 세임은 대체로 부정적 역할을 했다. 헌법 구조의 이러한 결함을 16세기 후반부터 정치 저술가들은 종종 ‘세임의 전횡’이라고 지적했지만, 이 문제에 대한 마땅한 해결책은 없었다.
—p.200~202
폴란드는 1718년에 러시아가 ‘보호령’으로 만들면서 사실상 주권국가의 막을 내렸다. 또한 정치적 유기체로서의 기능도 중단되었다. 북방 전쟁이 진행되던 1703년부터 1710년 사이 세임은 소집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어떤 법률도 통과되지 않았고, 세금도 부과되지 않았다. 세임이 다시 소집되었을 때 제 기능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아우구스트 재위 시절 소집된 열여덟 번의 세임에서 열 번의 회기는 거부권 행사로 해산되었다.
—p.227
거부권을 사용한 사람들은 주로 리투아니아나 우크라이나 같은 변방 지역 출신 의원들이었고, 종종 지방 대영주나 외국 세력을 대리하여 그렇게 행동했다. 이 제도는 너무 편리해서 1667년에 브란덴부르크와 스웨덴은 필요한 경우 ‘폴란드의 자유 수호’(즉, 폴란드인이 거부권을 철폐하는 것을 막기 위해)를 위해 전쟁을 벌이는 데 동의했다. 이후 10년 이상 동일한 문구가 폴란드 이웃 국가들 사이에 체결하는 거의 모든 조약에 들어갔다.
—p.234
……1772년 8월 5일에 폴란드 1차 분할이 합의되었다. 프로이센은 3만 6000제곱킬로미터의 영토와 58만 명의 주민을 획득했고, 오스트리아는 8만 3000제곱킬로미터의 영토와 265만 명의 주민, 러시아는 9만 2000제곱킬로미터의 영토와 130만 명의 주민을 차지했다. 프로이센이 차지한 몫이 가장 가치가 있었다. 가장 발전된 지역을 차지했고, 동서로 나뉜 프로이센 두 지역을 연결하고, 폴란드가 외부 세계로 연결되는 생명선인 비스와강을 차지했다.
……국토 분할은 폴란드 사회 여러 부문에 경종을 울렸다. 또한 이것은 유럽 전역의 여론에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비우호적인 인상을 바로잡기 위해 예카테리나 여제와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랑스 철학자들의 글을 빌려 폴란드의 이미지를 자신들 같은 계몽주의 군주에 의해 해방되기를 갈망하는 몽매한 후진 지역으로 그렸다. 그들은 또한 3국 분할 조약이 폴란드 세임에서 비준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p.243~244
“폴란드는 과연 무엇인가?” ……“이것은 한 사람이 작동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함께 작동할 수도 없지만, 한사람이 멈출 수 있는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기계다”
—p.259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가연합의 해체는 폴란드를 다루는 역사학자들에게 딜레마를 제공한다. 이제부터 그 영역에 거주하는 고아와 같은 각 민족, 즉 리투아니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유대인, 독일인, 기타 소수민족의 발전 과정을 다루어야 하는가 아니면 폴란드인에게만 집중해야 하는가? 후자가 합리적인 접근으로 보이지만, 바로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어느 폴란드인을 다루어야 하는가? 민족적 폴란드인의 90퍼센트 정도는 문맹인 농민이고, 이들은 아무런 민족의식이 없었다. 반면에 폴란드의 ‘정치적 민족’이라 할 수 있는 슐라흐타와 교육받은 새 중산층은 국가연합 내의 모든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p.271
1791년 5월 3일에 채택된 헌법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폴란드 프로젝트의 새로운 시작에 대한 신의와 약속을 부활시키는 행동이었다. 이것은 앞으로 점진적으로 다문화 국가연합을 좀더 동일성이 강하고 공유된 정치적 가치들로 함께 묶인 다민족 국가로 만들 터였다. 헌법과 국가가 모두 사라졌지만, 이것을 존재하게 한 정치적 계급은 여전히 그 이상에 충실하게 남아 있었다. 그 결과 폴란드 국가의 재건을 위한 그들의 투쟁은 폴란드 민족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과거 국가연합의 모든 주민을 기반으로 했다.
이것은 이 프로젝트를 지지하는 폴란드인과 리투아니아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같은 민족 집단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이 집단 내부에서 긴장을 유발했다. 이 민족 집단의 일부는 새로운 주인에 대한 충성을 받아들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폴란드가 러시아와 구별되는 자신들만의 민족정체성을 갈망했다.
—p.272
폴란드 독립 열망에 대한 나폴레옹의 태도는 처음부터 냉소적이었고, 이 모든 전쟁과 노력은 폴란드의 목표에 전혀 이익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영웅적 서사는 폴란드인에게 중요했다. 1683년의 빈 해방 전투 이후 군사적 영광은 폴란드인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1797년부터 1815년까지 폴란드인은 자신들의 용맹, 충성, 정신을 유럽 전역의 전장에서 발휘할 수 있었다.
—p.279
1792년부터 1815년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지역에 가해진 폭력과 이 기간에 여러 지역이 복속된 국가 정부들이 교체되었지만, 이 모든 것은 놀라울 정도로 폴란드 민족의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폴란드인의 마음속에 국경은 단지 행정적 장애물이었고, 이것을 단지 ‘오스트리아 회랑’ 또는 ‘프로이센 회랑’이라고 불렀다. 1820년대 바르샤바에서 포즈난이나 빌노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다른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여행자나 여행자를 맞는 사람이나 다 자기 나라 안에서 돌아다니는 것으로 생각했다.
—p.283
‘폴란드 문제’는 양심이 가책처럼 19세기 세계 외교를 쫓아다니며 폴란드의 적뿐만 아니라 우호국에도 많은 불편을 안겼다. 영국은 폴란드인을 대신해 많은 외교적 교섭을 벌였다. 오스만튀르크도 3국 분할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회가 있을 대마다 밝혔다. 프랑스 의회는 1830년에 회의가 열릴 때마다 폴란드의 해방을 염원하는 선언을 낭독했다. 그러나 폴란드 문제가 유럽의 안정을 위협하기 시작할 때면 이 문제는 몇 마디의 거룩한 문구 아래 묻혀버렸다.
—p.305
크라신스키는 자신의 대표적인 마지막 시인 <여명>에서 이렇게 설파했다. “너는 더이상 나의 나라가 아니다. 더이상 나의 지역, 집, 삶의 방식이 아니다. 더이상 국가의 명멸이 아니다. 너는 신앙이다. 법이다!”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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