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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것도 아닌 살, 삶일상/film 2025. 2. 24. 13:39
서브스턴스/블랙 코미디/코랄리 파르자/엘리자베스(데미 무어), 수(마걸릿 퀄리)/141
<아노라>를 재밌게 본 뒤, <서브스턴스>라는 영화를 추천받았다. 주로 잔잔한 영화를 좋아하고 앞의 두 영화와는 취향이 거리가 먼 사람으로부터였다. 아마 시놉시스만 보고 두 영화가 비슷한 주제의 비슷한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서브스턴스> 역시 <아노라> 때와 마찬가지로 처음 봤을 때 영화가 다루는 소재―은퇴를 앞두고 과거의 인기를 회상하는 여배우―에 큰 흥미를 느끼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영화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성 상품화’라는 문제는 여전히 시의성 있고 충분히 공론화할 만한 주제라고 생각하는데, 가장 크게 느꼈던 아쉬움은 평면적인 서사에 관한 부분이었다. 일주일 간격으로 ‘젊고 예쁜 여성’과 ‘나이들고 매력 없는 여성’으로 외양이 바뀐다는 설정 자체는 기발하기도 하고, 그런 기발한 서사를 과연 영상으로 풀어낼 수 있겠나 싶으면서도 영화는 큰 무리 없이 소화해낸다.
다만 이미지의 수요자가 곧 공급자가 되고 공급자가 수요자가 되는 쌍방향적인 미디어 환경과 모든 것이 금전적 척도에 의해 평가되는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성별이라는 틀 안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는 건 어쩐지 주제의 복잡성이 밋밋해지는 듯한 받았다. 몇몇 장면에서 사용된 빅클로즈업 숏에 어쩐지 공감하기 어려웠던 건, 앞서 <아노라>에서 사용된 빅클로즈업 숏에 반응했던 것과 대비된다.
관객에게 생각의 여지을 적게 두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감독의 분명한 의도였다 하더라도, 서사가 흘러가는 방향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마치 결승선을 통과하는 육상 선수의 움직임을 360도의 정지화면으로 바라보면 세세한 근육의 위치나 단말마에 처한 듯한 선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이나 태도, 행동은 감독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기 쉽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일그러진 욕망이 빚어내는 기괴함은 생각만큼 적나라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가끔씩 어떤 비보를 뉴스로 접하게 되면 정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냐며 티비 앞에서 입을 벌리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어두운 면모는 음지에서 소리 없이 스스로를 구체화할 도구를 발견한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악(惡)은 의외로 평범하다.
이런 내용상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몰입하며 볼 수 있었던 건, 감독이 관객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할 뿐만 아니라 각각의 장면을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기 때문이라고밖에 못하겠다. 몇몇 빅클로즈업 숏을 제외하면 영화는 내가 좋아하는 앵글의 좋아하는 색감이었다. 종반부로 갈수록 영화 안에서 시각화하기 대단히 어려워 보이는 장면들도 다음 장면이 잘 처리되었을지 궁금해 하며 마음 졸이면서 봤지만 잘 마감이 되었다.
작년 영국의 한 대학에서는 올해의 단어로 ‘뇌썩음(brain rot)’을 꼽았다고 한다. 그 어느 때보다 과잉된 이미지에 포위되고 이미지를 게걸스럽게 소비하는 오늘날, 과연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도구의 이름만큼이나 ‘스마트’하고 우리의 내면을 살피며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보고 싶지 않은 이미지를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내 일상에 자주 답답함을 느낀다. 우리가 떠안은 사회적 부조리가 몇 초간의 화면 뒤에 손가락 끝에서 쉽게 휘발되는 것만 같아 공허함을 느낀다. 시급하고 중요한 것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피상적이고 잡다한 것들이 태평양 위 거대한 쓰레기섬처럼 수면을 뒤덮는다.
아무리 현대 사회가 복잡해졌고 그만큼 각각의 이슈를 다루기 까다로워졌다고 하지만, 어쩐지 그런 설명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께름칙함 없이 외면할 수 있게 해주는 간단으로 변명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던지고 싶었던 핵심 질문에 대해 잠시나마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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