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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무디고 가녀린일상/film 2025. 2. 5. 11:27
아노라/코미디/션 베이커/애니(마이키 매디슨), 이고르(유리 보리소프), 바냐(마르크 예이델시테인)/139
해마다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들은 챙겨보려 노력하고 있다. 작년 <아노라>의 수상소식을 듣고 아주 간단하게 시놉시스를 확인했을 때, 매춘부가 소재라는 사실에서부터 어쩐지 진부함이 느껴졌다. 또 그러한 추측은 영화의 초반 애니와 반야의 관계에서부터 재확인되는 듯했고, 도대체 어떻게 된 또는 될 영화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미국인 매춘부와 러시아 올리가르히 간의 만남과 그들이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은, 오히려 미국과 러시아, 두 사회체제의 부끄러운 민낯을 일거에 비꼬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션 베이커 감독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다.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나에게 맞는 영화인 것도 아니고, 몇 년간 수상작 가운데에는 별 감흥을 느끼기 어려웠던 작품들도 있다. 다만, 이 영화를 수상쩍게 바라보게 만드는 초반부를 건너가고 본격적인 이야기(사라진 반야를 추적하는 서사)에 들어서면서 이 영화 전체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던 것 같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초반부의 장면들에 비해, 아둔한 등장인물들이 좌충우돌하는 중후반부야말로 놀라울 정도로 나를 흡입했다.
개인적으로 영상미가 아름다운 영화를 좋아하고, 근래에 본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는 영화가 그런 경우이다. 그에 비해 <아노라>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영상이 아닌데다 광각렌즈로 촬영된 몇몇 화면들은 원근 왜곡이 심해 화각이나 촬영방식이 거슬리기까지 하다. 대신 인물에 대한 묘사는 탁월하다. 인물들 사이에 불꽃튀는 방종(放縱)과 낭만(浪漫)이 잘 묘사되었고, 특히 주인공 애니 역을 맡은 마이키 매디슨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하나의 서사로 엮어내기에 쉽지 않아 보이는 장면과 연출이 많았고, 그런 복잡미묘한 장면들을 단순히 도식화해서 보자면 도덕-비도덕,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성(聖)-속(俗), 강자-약자로 나누어 이해할 수도 있겠다.
다만, 이 영화를 푹 빠져 봤으면서도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마지막 장면이었던 것 같다. 어떤 영화적 기법이나 서사상의 문제라기보다는 영화가 끝난 후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그렇게 본다면 아쉬운 장면이라기보다는 내 마음 속 불편한 심리를 잘 짚어낸 장면이라고 보는 게 더 맞겠다. 희로애락애오욕을 극도로 압축해 놓은 듯한 마지막 장면은 뭔지 모르게 내 마음을 착잡하게 했다. 행복을 발견한 순간에도 우리는 비굴하고, 원한을 품은 순간에도 타인의 온기를 구한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라는 고등동물이 숙명처럼 마주한 괴로움인 걸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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