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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섬(Motseom)일상/book 2025. 3. 31. 17:12
못섬/양경준/사월의눈
사진집을 읽는 건 오랜만의 일이다. 사진집이나 화집을 보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말 그대로 '보는 것'을 좋아할 뿐 막상 이런 유형의 책 '읽기'에는 익숙하지 않다. 한 권에 대여섯 개 정도의 삽화가 들어간 책이라면 몰라도, 이미지가 주를 이루고 텍스트가 간간이 끼어드는 이런 유형의 책은, 이미지를 죽 보고 있자면 머리에 저장되는 내용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텍스트로 눈길을 옮기자면 이미지들 사이에서 쉽게 지루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사한 사진집이나 화집을 보면 절로 시선이 가는데, SNS 유저들이 플랫폼 상의 '감성 가득한' 이미지를 손가락 끝으로 휙휙 넘기며 감상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작년 이맘때 경북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온 뒤 기록을 남기며 인터넷을 서핑하던 중 우연히 한 출판사를 알게 되었다. 당시 나는 대구 일대에 흩어져 있는 '못(池)'의 풍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대구의 지리에 대해 알아보던 중이었다. 그리고 대구의 연못을 다룬 책이 검색 결과에 나타났을 때, 이건 말이 안 되는 인연(?)이다 싶었다. 휘황한 먹거리, 찬란한 볼거리가 가득한 요즈음, 새로 나오는 콘텐츠를 접해도 별로 흥이 나지 않던 차에, '대구의 연못'을 주제로 한 책과 그러한 책을 만드는 곳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비싼 가격에 선뜻 구매할 일이 많지는 않았는데, 얼마전 신간으로 「못섬(Motseom)」이 나온 것을 보고 구입을 결정했고, 주문한지로부터 이틀 뒤 정육각형의 우체국 상자에 담겨 책이 전달되었다. 포장을 뜯고 보니 탁상 달력만한 크기의 작은 화집이어서 내심 실망스러웠지만, 책에 담긴 내용을 읽으면서 큰 책으로 내긴 어려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집에 실린 사진들이 필름으로 찍힌 정방형 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쪽에는 한글로 된 작가의 글과 다른 한쪽에는 영어로 번역된 글이 대칭을 이뤘다. 이전 책에서도 한국어와 프랑스어 문장의 대칭이 퍽 마음에 들었었다.
'지방소멸'. 이 책의 주제의식은 내게도 낯설진 않다. 지역을 여행할 때 발견하는 일군의 이주 노동자들, 읽을 수 없는 간판을 단 가게들, 햇빛과 응달 말고는 인기척이라곤 보이지 않는 마을들. 다만 내가 사라져가는 못섬의 주민들을 담은 이 책에서 지방소멸을 더 날카롭게 느꼈던 건, 이 섬이 불과 1920년대에 인간의 필요에 의해 개척된 땅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연료를 얻고자 인간이 발을 들인 섬은 100년만에 소멸을 눈앞에 두고 있다.
내가 초래하지도 않은 외세의 격랑 속에서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못섬의 나무를 베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중에는 이곳이 고단한 그들이 기대어 쉴 수 있는 집터가 될 수 있겠다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최전방인 이곳에 터를 잡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 또한 이곳이 온기를 주고 바람을 견뎌줄 수 있는 곳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더 흘러 사람들은 일을 찾아 뭍으로 떠났을 것이고, 이곳에 존재했던 것들은 하나둘 그림자를 감췄다. 그사이 이곳의 대기에는 떠나는 이를 배웅하는 왁자지껄함도 울려퍼졌을 것이고, 팍팍해져가는 섬살이에 무거워져가는 한숨소리도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저 시간이 흘렀던 것일까, 시간이 몰고 온 변화가 빨랐던 것일까, 아니면 사람의 마음이 그토록 변덕스러웠던 것일까.
마치 처음부터 사는 곳의 내구연한이 정해져 있던 것처럼 사람들은 섬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 출현과 소멸은 물결에 인 동심원처럼 섬의 표면에 파동을 남겼다. 그것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것과 저것이 아니라 이러함에도 그러한 것이었다. 뛰어난 지세, 비옥한 토양, 지리적 이점도 없었던 이 무가치한 섬 위를 지나간 사람들, 삶들, 살아보려고 했던 것들. 이 섬의 미시사(微視史)에 우리 사회가 처한 시간과 공간의 의미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얻을 수 있어 좋았다.세상은 내가 찍은 이 사진들과 이 이야기를 원할까. …얼마나 눈을 세공해야 시 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나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과연 이 이야기는 몇 명이나 볼까. 내가 지금 이 바다에 뛰어들어도 세상은 눈 하나 깜짝할까.
―p. 44
벽에 가장 크게 부딪혔던 건 풍경과 사물이다. 어떻게 평범한 풍경과 사물로 소멸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매번 기록과 표현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한다.
―p. 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