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몸짓이 더 많은 정보를 내포하면 할수록, 수신자가 그 정보를 읽기는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 정보가 많을수록, 소통은 적어진다. 그 결과 어떤 몸짓이 정보를 적게 알리면 알릴수록(몸짓이 더 잘 소통할수록), 그만큼 몸짓은 공허해지고, 편안해지고, ‘예뻐’진다. 왜냐하면 그 몸짓을 읽는 데 힘이 덜 들기 때문이다. ―p.17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세계가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가설들은 문제를 제기한다. 존재론은 세계가 어떠한지를, 의무론은 세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방법론은 세계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다룬다. ―p.19
첫 번째 단계에는 목적 지향적 질문(‘무엇을 위해?’)이, 두 번째 단계에는 인과관계 질문(‘어째서?’)이, 세 번째 단계에는 형식적 질문(‘어떻게?’)이 지배한다. 역사는 그러니까 일의 세 가지 모델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것은 고전시대의 (관여되어 있는) 일, 근대의 (탐구하는) 일, 그리고 동시대의 (기능적인) 일이다. ―p.20
선사시대(주술적 일의 시대)에는 가치가 의심의 여지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고대와 중세(관여적 일의 시대)에는 여러 가치들 사이에서 판단을 해야 했던 근대(탐구적 일의 시대)에는 가치의 문제가 무효화되었다. 그리고 동시대(기술공학적 일의 시대)에는 가치에 대한 질문이 난센스가 되었다. ―p.21
가공되어야 하는 세계는 이 몸짓에 의해 두 개의 영역으로 분할된다. ‘무엇을 위하여?’를 질문하는 가치의 영역(사회)과, ‘왜?’를 질문하는 소여(所與)의 영역(자연)이 그것이다. ―p.22
근대의 특징인, 과학과 정치의 분리를 고려하면, 기계가 제기하는 문제는 두 얼굴을 갖는다. 과학 쪽에서 중요한 점은, 일의 동기를 발견함으로써 일을 정당화하고, 그 결과 임의의 모든 유형의 일을 실현할 기계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정치 쪽에서 중요한 점은 ‘누가 기계를 소유하는가?’라는 질문이다. ―p.25
해방이란, 기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계로부터의 해방이어야 하고, ‘누가 기계를 소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기계 너머에 누군가가 있는가, 또는 뭔가가 있는가?’를 의미한다. ―p.27
장치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것을 능가하는 모든 것, 존재론적이거나 윤리적인 공론, 다시 말해서 기능과 기능하기에 대한 모든 질문은 ‘형이상학적’인 것이 되어 그 의미를 잃었다. ―p.28
‘진실한 것’의 개념과 ‘선한 것’의 개념은 최종적으로 난센스의 블랙박스 속에 처넣어졌다. 인식론적 사고는 윤리적 사고와 함께 최종적으로 인공지능의, 전략적 사고와 프로그램 분석으로 대체되었다. 역사는 끝났다. ―p.30
글이 생각을 고정시킨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글쓰기는 생각의 한 방법이다. 어떤 몸짓을 통해서 표명되지 않는 생각이란 없다. 표명 이전의 생각은 하나의 가상성, 즉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하다. 생각은 몸짓을 통해서 실현된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는 몸짓을 하기 전에는 생각할 수 없다. ―p.37~38
말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킬 수 없다. 말은 말해지기 위해 입을 압박한다.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은 ‘뭔가 할 말이 있어서’이기보다는 말이 침묵의 벽을 뚫기 때문이다. ―p.44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형태의 침묵에 봉착하게 된다. 그중 하나는 말할 수 없는 문제의 유형으로, 이에 관해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다. 다른 하나는 발음할 수 없는 말의 유형으로, 이에 관해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입에 담지 말라”고 했다. 이것을 인식론적인 침묵과 미학적인 침묵이라고 불러보자. 또한 우리는 침묵을 깨는 적어도 두 가지 유형을 구별할 수 있다. 무책임한 말하기와 파렴치한 말하기. ―p.47~48
손의 이런 움직임을 묘사하는 데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잡다’, ‘쥐다’, ‘만지다’, ‘움켜쥐다’, ‘다루다’, ‘끄집어내다’, ‘만들어내다’―은 추상적인 개념들이 되었고, 우리는 종종 이 개념들의 의미가 손의 구체적인 움직임으로부터 개념화되었음을 잊는다. ―p.49
도구를 장착한 손은 맨손의 감각이 없다. 그 손은 물건과 사람을 분간하지 못한다. 모든 것은 가공할 수 있고, 조작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사람은 물건이 된다. 사람은 이해하고, 조사되고, 제작될 수 있으며, 심지어 다른 제품을 제작하기 위한 도구도 될 수 있다. 자신의 원래 대상을 잊어버린, 도구를 가진 손에는 더 이상 사회적인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손의 만드는 몸짓은 정치에 무관심하고 비윤리적이다. 도구로 무장한 손들을 지배하는 것은 이상한 유아론(唯我論)이다. ―p.68
그것은 손이 대상으로부터 물러나서, 손바닥을 넓게 펴고 그 대상을 문화의 맥락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도록 할 때 끝난다. 우리는 이 몸짓을 알고 있다. 그것은 희생의 몸짓, 체념과 나눔의 몸짓, 즉 ‘베풂의 몸짓’이다. 손은 작품에 만족했을 때가 아니라, 만들기 몸짓의 어떠한 지속도 그 작품에 무의미함을 손이 알았을 때, 그 몸짓을 행한다. ―p.69
사랑의 몸짓을 성적인 몸짓과 재생산의 몸짓과의 연루 관계에서 풀어내기 어려운 이유는, 구체적인 이 몸짓 자체의 복합성 때문만은 아니고, 무엇보다도 언어적인 근거가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보통 이 세 가지 몸짓들 모두에 부정확하게 사용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사랑을 하는 능력과 함께, 사랑을 정확히 사유하는 능력 또한 잃었기 때문이다. ―p.74
파괴의 동기를 주는 것은, 체스 경기의 어떤 특정한 상황이 아니고, 또 해체에서처럼 게임의 규칙들도 아니다. 그것은 여기서 규칙을 따르는 어떤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이 결정이 의미하는 바는, ‘이 규칙들은 방해가 된다’거나 ‘이 규칙들은 틀렸다’가 아니라, ‘이 게임이 규칙을 따르기 때문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들어졌지만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고, ‘잘못 말들어졌고, 그래서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만들어졌고, 그래서 방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순수한 악의’일 것이다. ―p.85
세계는 점점 더 많이 변형되며, 점점 더 무질서해진다. 왜냐하면 형태라는 것은 있을 법하지 않은, 불안정한 예외적 사태이기 때문이다. 예외가 규칙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 있을 법한 우연을 증명하는 예외인 것이다. …세계 내의 존재로서 인간은 이러한 엔트로피 경향에 종속된다(예를 들어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주체로서, 윤리적 행위자로서 인간은 이 경향에 저항한다. 인간은 자기 주위에 규칙들ㄹ을 세우고 사물들을 정돈함으로써, ‘만들어냄으로써’ 그것을 부정한다. ―p.86
우리가 물을 볼 때, 우리가 보는 것은 물이지, 수소와 산소의 결합이 아니다. 이 원자들은 우리의 분석 결과이고, 물 ‘다음에’ 온 것이다. 그것들은 물‘에서 나온’ 추론이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이 원자들이 ‘물’이라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추상적인 지평선을 형성할 뿐이고, ‘물’이라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나중에 덧붙여진 ‘설명’이라는 것읻다. …정신과 몸은 ‘몸짓’이라는 구체적인 현상으로부터의 추정이고, 나중에 덧붙여진 ‘설명’이다. ―p.97
우리는 이 세계 속에 홀로 있지 않으며,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우리 주위에서 타인의 몸짓들이 우리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리킴은 행동인 동시에 행해질 것의 선취이다. 문법은, 의미를 ‘갖는’ 것과 의미를 ‘주는’ 것이 사실은 같은 말이라는 사실을 말로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p.101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은 위치를 변경한 결과이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가 제시한 것보다 더 ‘진실한’ 관점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카메라를 든 남자는 고정된 어떤 상황을 사진으로 찍을 최적의 지점을 찾으려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는 움직이는 상황을 고정시키려는 자신의 의도에 가장 적합한 위치를 찾고 있는 것이다. ―p.109
카메라를 든 사람이 하고 있는 것은 아마 개별적인 단계들로 정확히 나눌 수 없을 만큼 복합적인 몸짓이다. …첫 번째 측면은, 이 상황을 관찰할 수 있는 어떤 지점, 위치를 찾는 것이다. 두 번째 측면은, 이 상황을 선택된 위치에 맞도록 조정하는 것이다. 세 번째 측면은 이런 조정이 성공인지 실패인지를 알게 해주는 비판적인 거리에 해당한다. ―p.112
…여기서 작동하는 것은 이중의 변증법이다. 그 하나는 목표와 상황 사이의 변증법이고, 다른 하나는 이 상황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들 사이의 변증법이다. ―p.114
어떤 이미지(어떤 개념)의 객관성은 어떤 상황의 조작(관찰)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모든 개념은 그 개념에 의해 파악된 것을 조작한다는 점에서 거짓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예술’, 피션이다. 그럼에도 다른 의미에서 진정한 개념들은 있다. 요컨대 개념이 그것에 의해 관찰되는 것을 정말로 파악할 경우에 그렇다. ―p.119
…위치 탐색은 자신에 대한 탐색에 속하고, 상황 조작은 자신에 대한 조작에 속한다.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진에 해당되는 것은 철학에도, 또 아주 간단히 삶에도 해당된다. ―p.122
그(영화감독)는 이제까지 없었던 현상들을 이제까지 없었던 방식으로 구성하여 진행되도록 할 수도 있다. 즉 유토피아나 공상과학으로서가 아닌, 현재의 사건으로서 미래를 선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를, 그 두 번째 의미(사건을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첫 번째 의미(사건)에 따라 만들 수 있다. 사건(가능한 사건과 실천의 사건)을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물론 동굴 벽 위에서의 눈속임으로서) 일어나게 만드는 것이다. ―p.129
가면을 뒤집는 사람은 이들의 지평선 바깥에 있다. 무용수와 비평가는 자신들의 카니발이 기획되었다는 것, 카니발은 자발적으로 일어나지도, 어떤 순환의 리듬을 따르지도 않으며, 어떤 시스템에 의해 전용(轉用)되었다는 것, ‘생기가 불어넣어졌음’을 알고 있고, 이 프로그램이 계획대로 실행되지 않고, 이를테면 예산이 부족하거나 버스가 지원되지 않을 경우에는 불평을 한다. 그러나 그들이 불평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 프로그램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은 보이지 않는 상태로 있어야 한다. ―p.135
여기서 중요하게 확인행 할 것은, 인간의 매복은 맹수의 매복과 정확히 반대라는 점이다. …맹수는 자연 속에 자연으로서 매복하고, 인간을 노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맹수에게는 인간이 다른 사냥감들과 다를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자연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연을 매복해서 기다리며, 자연의 밖으로부터 덫을 놓고 기다리면서 순록과 소를 구분하고, 열매와 알을 구분한다. ―p.144~145 좋은 사냥은 미리 예상할 수 없는 행운이고, 나쁜 사냥은 정상적인 것이다. 반면에 흉작은 미리 예상할 수 없는 불운이다. 매복을 기다림으로, 긴장을 느긋함으로, 죽음의 공포를 장래에 대한 준비로, 말하자면 예상할 수 없는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뒤집는 것은, 사냥과 채집을 재배로 뒤집는 것의 본질이다. 또한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재배는 소유와 전쟁의 기원이고, 내가 가진 것을 고수한다는 의미에서 기다림의 기원이다. ―p.147
…면도는 세계 속에 있는 어떤 사물의 변화도 아니고 면도하는 사람 자신의 변화도 아닌, 면도하는 사람과 그 사람의 세계 사이에 있는 피부의 변화이다. 그것은 좁은 의미에서의 일의 몸짓도 아니고 제의적인 몸짓도 아닌, 일과 제의의 중간에 있는 몸짓이다. ―p.154
이로써 면도의 몸짓에서 본질적인 것이 드러난다. 그것은 물론 얼굴에서 수염을 제거하는 몸짓이지만, 수염 뒤에 있는 얼굴을 드러내기 위한 것은 아니다. …면도는 오히려 인간과 세계 사이의 경계를 그만큼 더 강조하기 위해서 수염을 제거하는 것이다. 면도가 드런는 것은 얼굴이 아니라 피부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인간과 세계 사이의 경계를 드러낸다. ―p.157~158
우리는 그 효과들을 느끼고, 우리가 그것을 겪고 있음을 안다. 이처럼 알면서 겪는 것을 그리스어로 파테인(pathein)이라고 한다. 음악을 뱃속에(그리고 가슴에, 성기에, 머리에, 한마디로 진동할 준비가 된 모든 신체 부위에) 받아들이는 것이 파토스(pathos)이고, 그 결과는 메시지에 대한 감정이입이다. ―p.165
어떤 몸짓이 의도로부터 자유로울수록, 즉 몸짓 자체의 외부에 있는 어떤 의도를 덜 따를수록, 그 몸짓은 제의로서 그만큼 더 ‘순수하다’. 제의의 몸짓을 넘어서는 이 의도를 우리는 몸짓의 ‘주술적’ 측면이라고 부를 수 있다. ―p.179
예술이 제의의 일종인 것이 아니라, 제의가 예술 형식의 일종인 것이다. ―p.180
…우리는 언제나, 세계에 대해서(노동), 타인들에 대해서(소통),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제의) 우리 스스로 동시에 양식화하면서 여기에 있다. ―p.182
여기서 ‘삶을 누리다’라는 동사와 ‘제멋대로 하다’라는 동사가 동의어가 아니라 반의어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제멋대로 할 때 우리는 코드화되지 않은 행동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이 행동은 더 이상 몸짓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행동을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을 누릴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외부로부터도 인식하고, 또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얻게 된다. ―p.184
‘예술’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현존재가 자유롭게, 의도 없이 선택한 하나의 변수 안에서 자신을 입증함으로써, ‘삶을 누리는’ 각각의 몸짓이다. 그러므로 ‘예술적인 삶’이란, 몸짓들이 행해지는 스타일이 중요한 삶의 형식이다. ―p.185
과학은 일의 가능한 결과이고, 윤리와 정치는 소통의 가능한 결과이며, 종교는 예술의 가능한 결과이다. ―p.189
모든 매체에는 의사소통의 측면에서 고유의 변증법이 있다. 즉 매체는 그 매체를 통해서 소통하는 것들을 연결하고 분리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바로 이 변증법이 ‘매채(Medium)’라는 개념의 정확한 의미이다. ―p.203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도구들의 목적이 반드시 우리의 목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 도구들을 만든 사람들의 목적이다. 그것들이 방향을 바꾸게 하는 것은 자유로워진다는 뜻이다. 새로운 도구들이 매혹적인 것은 그것들이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더 많은 미지의 가상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것들이 해방의 행동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p.208
탐구의 몸짓은 혁명적 부르주아의 몸짓이다. 이 부르주아는 수공업자이다. 그는 생명이 없는 대상들을 다룬다. 그는 이 대상들로 뭔가를 만들려고 한다. 그는 동물이나 식물을 다루지 않는다. 그런 일은 농부가 한다. 그는 사람들을 조작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귀족과 성직자들이 한다. 이 부르주아의 ‘실천적’ 지식은 생명이 없는 대상들에 국한된다. …이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 움직임들은 존재론적 관점에서는 그다지 관심을 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 연구의 기원에 놓인 시민혁명은 관심(Interesse)의 혁명이다. ―p.214
이제 분명해진 것은, 객관성과 엄밀성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이상’이라는 것, 현실에는 ‘순수한 정신’이나 ‘순수한 지식’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학문 연구는 부르주아 계급의 의지대로 초월적 정신의 몸짓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학문 연구는 부르주아의 이상이 원했던 것처럼 객관적 자연에 대해 외부로부터 행해지는 기술적 조작으로 끝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학문이 어떤 존재 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세계 속으로 잠입해서 세계를 자신의 필요와 욕망과 꿈에 맞춰 바꾸는 데 관심을 둔 인간의 몸짓이다. ―p.217
연구의 몸짓의 기반은 주체와 객체, 인간과 세계, 나와 그것의 구분이었다. 우리는 이 기반을 포기하려 하고 있다. ―p.224
‘이론’의 개념은 혁명적으로 그 의미가 변한다. 고대인에게 ‘이론’은 영원한 형태에 대한 관조적인 직관이었다. 부르주아에게 그것은 동등한 가설들의 집합체였다. 오늘날 이론은 살고 있는 세계-내-존재의 전략이 되었다. ―p.226
움직임으로서 몸짓은, 다른 모든 움직임들과 마찬가지로 결정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몸짓의 특유한 점은, 이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것이 우리가 ‘자유’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어떤 내면성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p.234
표현의 해독은 ‘몸짓하는 사람’의 자유를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표현의 해독은 몸짓하는 사람이 그 몸짓을 해독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거나 감추는지(그가 진실한지 거짓인지)를 밝혀낸다. 메시지의 해독은 해독하는 사람에게 몸짓하는 사람 쪽에서 의도한 바를 드러낸다. 이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코드이고, 이 코드들은 각각 다른 방법으로 해독되어야 한다. 두 코드가 동시에 해독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소통을 이야기할 수 있다. ―p.239
몸짓이 자유의 표현으로, 그러니까 능동적인 세계-내-존재로 정의되었다면, 이 몸짓들의 총계는 역사이다. 거꾸로 역사철학은 행위들(바로 몸짓들)의 일반 이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p.244
여기서 제안되는 이론의 책임(Engagement)은 바로 이것이다. 자유의 증가에 기여하고, 앞에서 정의된 완전한 의미의 몸짓을 비로소 실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행동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비로소 제대로 ‘역사적으로’ 행동함을 의미한다. 이 이론은 ‘가치중립적’이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그것의 가치는 자유일 것이다. ―p.250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도구들의 목적이 반드시 우리의 목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 도구들을 만든 사람들의 목적이다. 그것들이 방향을 바꾸게 하는 것은 자유로워진다는 뜻이다. 새로운 도구들이 매혹적인 것은 그것들이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더 많은 미지의 가상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것들이 해방의 행동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p.208
탐구의 몸짓은 혁명적 부르주아의 몸짓이다. 이 부르주아는 수공업자이다. 그는 생명이 없는 대상들을 다룬다. 그는 이 대상들로 뭔가를 만들려고 한다. 그는 동물이나 식물을 다루지 않는다. 그런 일은 농부가 한다. 그는 사람들을 조작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귀족과 성직자들이 한다. 이 부르주아의 ‘실천적’ 지식은 생명이 없는 대상들에 국한된다. …이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 움직임들은 존재론적 관점에서는 그다지 관심을 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 연구의 기원에 놓인 시민혁명은 관심(Interesse)의 혁명이다. ―p.214
이제 분명해진 것은, 객관성과 엄밀성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이상’이라는 것, 현실에는 ‘순수한 정신’이나 ‘순수한 지식’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학문 연구는 부르주아 계급의 의지대로 초월적 정신의 몸짓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학문 연구는 부르주아의 이상이 원했던 것처럼 객관적 자연에 대해 외부로부터 행해지는 기술적 조작으로 끝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학문이 어떤 존재 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세계 속으로 잠입해서 세계를 자신의 필요와 욕망과 꿈에 맞춰 바꾸는 데 관심을 둔 인간의 몸짓이다. ―p.217
연구의 몸짓의 기반은 주체와 객체, 인간과 세계, 나와 그것의 구분이었다. 우리는 이 기반을 포기하려 하고 있다. ―p.224
‘이론’의 개념은 혁명적으로 그 의미가 변한다. 고대인에게 ‘이론’은 영원한 형태에 대한 관조적인 직관이었다. 부르주아에게 그것은 동등한 가설들의 집합체였다. 오늘날 이론은 살고 있는 세계-내-존재의 전략이 되었다. ―p.226
움직임으로서 몸짓은, 다른 모든 움직임들과 마찬가지로 결정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몸짓의 특유한 점은, 이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것이 우리가 ‘자유’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어떤 내면성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p.234
표현의 해독은 ‘몸짓하는 사람’의 자유를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표현의 해독은 몸짓하는 사람이 그 몸짓을 해독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거나 감추는지(그가 진실한지 거짓인지)를 밝혀낸다. 메시지의 해독은 해독하는 사람에게 몸짓하는 사람 쪽에서 의도한 바를 드러낸다. 이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코드이고, 이 코드들은 각각 다른 방법으로 해독되어야 한다. 두 코드가 동시에 해독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소통을 이야기할 수 있다. ―p.239
몸짓이 자유의 표현으로, 그러니까 능동적인 세계-내-존재로 정의되었다면, 이 몸짓들의 총계는 역사이다. 거꾸로 역사철학은 행위들(바로 몸짓들)의 일반 이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p.244
여기서 제안되는 이론의 책임(Engagement)은 바로 이것이다. 자유의 증가에 기여하고, 앞에서 정의된 완전한 의미의 몸짓을 비로소 실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행동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비로소 제대로 ‘역사적으로’ 행동함을 의미한다. 이 이론은 ‘가치중립적’이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그것의 가치는 자유일 것이다. ―p.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