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나절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을 채 추스르지 못한 채 사마르칸트 시내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나는 아프가니스탄 여행을 마치고 오는 J와 접선했다. 우리는 1박을 같은 곳에서 숙박하기로 했는데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J가 쌓은 마일리지 덕분에 저렴하게 예약한 숙박시설이, 막상 도착해서 보니 사진과 전혀 달랐던 것이다. 내게 문을 열어주었던 앳된 젊은 청년은 영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했고, 실제 집주인이라는 그의 형에게 전화했더니 지금은 그 방이 남아 있는 전부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원하면 자신이 운영하는 다른 숙소의 더 넓은 방을 주겠다고도 했다. 한낮의 고된 여행으로 실랑이를 벌일 힘이 없던 나나 아프가니스탄에서 국경을 넘느라 시간을 허비한 J나 더 이상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인터넷으로 확인한 것보다 확실히 작지만, 2만 원짜리 신식 2인실이라는 사실에 위안을 구하며 짐을 풀었다.
** 수잔가론(Suzangaron) 거리는 우리나라의 평범한 주택가 골목 같았다. 길의 폭이 더 넓고 건물들도 더 큼직하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호자 니스바도르(Khoja Nisbatdor) 사원에는 초저녁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대여섯 명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저녁의 어둠이 점점 더 낮게 내려오는 골목길에서 J의 아프가니스탄 여행기를 듣기도 하고 나의 짧은 일정을 한탄하기도 했다. 미군이 철수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은 역설적이게도 대외 인식을 개선하고자 조금씩 관광 문호를 열고 있다고 했다.
사원 맞은편의 신식 레스토랑이 우리의 목적지였지만, 이곳은 개점 휴업 상태로 준비할 수 있는 메뉴랄 게 거의 없었다. 지짐이 반죽을 휘이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올려놓은 것처럼 생긴 정체불명의 요리는 몇 가지 구근식물과 닭고기를 갈아 만든 듯했지만 성인 남성 둘의 저녁이 될 수는 없었다. 다시 레기스탄 앞으로 나와 앞서 자리를 찾지 못한 샤슬릭 집을 찾았다. 레기스탄이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어서인지 우리나라 관광객을 비롯해 외국인들이 자주 보인다.
*** A(알렉세이)와 M(마리야)를 만난 건 이 식당에서였다. 그리고 여전히 자리가 없는 이 인기 식당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우리에게 합석하자고 한 건 강건한 인상의 A였다. 다정한 부부는 테이블을 마주하지 않고 같은 방향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 테이블 옆에 조악하게 세워진 한 쌍의 국조(國鳥) 모형이 묘한 대칭을 이뤘다. 자녀가 셋이라니 신혼을 지난지는 오래 전인데 둘의 관계는 다정해 보일 뿐만 아니라 차분하고 단단해 보였다.
시베리아 지역에서 왔다는 A는 한쪽 눈이 약간 사시(斜視)라는 신체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분방하고 호탕한 말투로 인해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다. A와 M 부부는 이미 주문한 메뉴를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으므로, 나와 J은 따로 라그만(lagman)과 만티(manti), 샤슬릭 몇 개를 주문하고, 맥주를 주문해 서로 건배부터 나눴다.
**** 미디어는 많은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많은 것을 가려버리기도 한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쉬이 믿는다. 하지만 그 순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영영 알 수 없다. 러시아로부터 처음 연상되는 단어는 독재, 올리가르히, 전쟁, 전체주의 같은 부정적인 것들이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있는 요즈음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 체호프 같은 그들의 자랑할 만한 문화 자산에 대한 기억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런데 러시아를 생각할 때 흔히 떠올리는 우랄 산맥 서쪽의 주요 대도시가 아닌 내륙에서 왔다고 하는 이 중년의 러시아인은 동남아 지역에서 사업가와 투자자를 중개하는 에이전시를 하고 있어, 러시아에 관한 내 선입견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테이블에서 화두는 단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었다. 명분 없는 이 전쟁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는 건 부담스런 일이었지만, 그 주제에 관해 직설적으로 질문을 던진 건 J였고, 어제 나온 TV 뉴스에 대해 이야기하듯 아무렇지 않게 의견을 말한 건 A였다. 전쟁이 인간사에 어제 오늘의 일이었겠냐마는, 금슬 좋은 이 부부에게는 무차별적으로 이뤄지는 징집이 가장 걱정스런 일인 것 같았다. 유통 차질로 인해 전반적인 물가가 급등한 사실은 여행객인 J에게는 관심사였을지 몰라도 이 부부에게는 부차적인 문제인 듯했다. 그들의 편안한 인상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금전적인 고충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걸 암시적으로 말해주었던 반면, 세 명의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살아가는 나라에 드리워진 전쟁의 장기화가 커다란 공포일 거라는 짐작을 가능케 했다.
전제적인 통치 아래에서도 사람들의 생각 전체가 같은 방향을 향할 순 없다. A의 생각도 그런 체제 안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의견의 하나이겠지만, 전쟁에 비우호적인 러시아 사정을 전하는 그의 얼굴에 잠시 곤란한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적지 않은 러시아 사람들이 고국을 등지고 주변국으로 떠나는 건, 그들이 전쟁에 반대한다는 확고한 의사를 표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그 전쟁을 원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최종 승자는 누구이며, 그 승자가 얻게 될 전리품은 무엇일까.
***** 여러 기억으로 가득한 우즈베키스탄 여행에 대해 압축적으로라도 서술하기 어렵다는 점은 유감스런 일이다. 다시 이 저녁 약속이 있기 전인 판지켄트 이야기로 돌아와, 아담은 사라즘 유적지의 푸른 들판을 배경으로 내게 비트박스를 선보이고 싶다고 했다. 아담은 일본까지 날아가 비트박스 경연에 참가한 적이 있다고 얘기했었다. 내게는 어쩐지 비트박스는 유행이 한참 지난 느낌이었는데, 입술을 움켜쥐었다 파열할 때마다 튀어나오는 박진감 있는 리듬은 여름으로 향하는 맑고 울창한 풍경과 중첩되어 위화감도 놀라움도 아닌 기묘한 자극을 주었다. 그럼에도 그의 비트박스는 흠잡을 데 없이 강렬했고, 이런 ‘끼’는 언젠가 반드시 빛을 발하리라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