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사고였을 뿐 / 범죄, 드라마 / 자하르 파나히 / 바히드(바히드 모바셰리), 에크발(에브라힘 아지지) / 103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들은 매해 챙겨보는 편이다. 올해는 뭐 땜에 그리 바빴는지 지난 5월 어느 작품이 황금종려상을 받았는지도 모르고 지나갔다. 그러다가 긴 추석연휴를 앞두고 새로 개봉한 영화를 살펴보던 중 발견한 영화, <그저 사고였을 뿐>. 저 멀리 표면이 매끄러운 민둥산을 배경으로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를 황야로 옮겨 놓은 듯한 영화 포스터 속에는, 낡은 크림색 캐러밴을 둘러싸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심드렁하게 앉아 있고 그 가운데는 결혼식 차림의 커플도 있다.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포스터였다.
이번 영화는 근래에 봤던 <신성한 나무의 씨앗>과 여러 면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먼저 유럽국가의 제작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이란 영화였고, 다음으로는 이란의 기성 권위주의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주제가 같았다. 그런 공통점 때문인지 하메네이 주도의 신정(神政)을 비판하는 주제의식이 높이 평가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저 사고였을 뿐>에서 다루는 사회 문제가 보편적이기보다는 이란에 특정되어 있어 서구 사회가 중동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증도 들었다.
Sens Critique
2024년작 <신성한 나무의 씨앗>과 가장 큰 차이라면 극의 전개 방식이 아닐까 싶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서는 근본주의에 뿌리를 둔 기성 권위주의 체제와 이에 대항하는 젊은이들 사이의 균열이 영화의 시작부터 명료하게 드러난다. 반면 자파르 파나히의 <그저 사고였을 뿐>에서는 응징을 하려는 자와 처단되어 마땅한 자의 구분선이 명확하지 않다. 영화 중반을 넘어서면서 에크발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전까지, 영화 초반에는 누가 악인이고 누가 선인인지 가려내기가 어렵다.
출발점에서 선악의 역할을 모호하게 설정한 것은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서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은 영화 초반에 수시로 이란의 히잡 시위 실황을 중계하듯 스마트폰으로 촬영된 세로 화면을 삽입한다. 그럼으로써 감독은 자신이 문제 삼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보는 입장에서는 적나라한 설명방식이 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반면, <그저 사고였을 뿐>에는 그런 명확한 설명은 없다. 자초지종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복수극이 시작된다. 때문에 바히드가 왜 에크발에게 앙갚음을 하려고들 난리를 피우는지 호기심을 가지면서 이야기에 참여하게 된다.
Télérama
또 한가지 두드러지는 점은 이야기의 전개와 각 인물들의 성격상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의가 혼재되어 있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 둘을 떼어내고 정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서는 중간자 역할을 하는 나즈메를 제외하고 인물들간의 갈등 구도가 선명했던 반면, <그저 사고였을 뿐>에서는 같은 편에 선 인물들끼리도 의견이 충돌하고 개개인의 내적 갈등도 크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따르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원칙에 따라 악에 악으로 맞선다는 것이 인간 사회에서 얼마나 난해한 문제를 낳는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에서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회 구조가 악(惡)이고 타파해야 할 대상이라면 개인이라도 정의롭지 않은 방법으로 나설 수 있는 일일까, 영화 속 힘없는 등장인물들은 매순간 고뇌한다. 결국 그들은 부정의(不正義)하지 않음을 택하지만, 원수를 원수로 대하지 않은 그들의 선행은 거대한 사회 구조에 변화를 가져올까. 그들에게 고통을 안긴 이 체제의 정체는 무엇일까. 영화의 마지막 바히드의 등 뒤로 들려오는 의족(義足) 끄는 소리는, 변화의 조짐을 알리는 것일까 아니면 체제의 구태의연함을 알리는 것일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