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틈이 생긴 두번째 구분은 동물-인간(유기체)과 기계 사이에 있다. ……20세기 후반의 기계들은 자연과 인공, 정신과 육체, 자생적 발달과 외부로부터의 설계를 비롯해 유기체와 기계 사이에 적용되던 수많은 차이를 철저히 섞어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만든 기계들은 불편할 만큼 생생한데, 정작 우리는 섬뜩할 만큼 생기가 없다. ―p.24~25
문명의 기원에 관한 서구의 설화에서 글쓰기, 권력, 기술은 오랜 공범자다. 그 메커니즘의 경험을 바꾼 것은 소형화다. 소형화는 결국 권력의 문제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크루즈 미사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작은 것은 아름답기보다 위험천만하다. 1950년대의 텔레비전 수상기나 1970년대의 뉴스 카메라를 요즘 광고에 보이는 팔찌형 텔레비전이나 손바닥 크기의 캠코더와 비교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우리 시대 가장 좋은 기계들은 태양빛으로 제작되었다. 이 기계들은 신호, 전자기파, 스펙트럼의 한 부분에 불과하므로 가볍고 깨끗하며 휴대와 이동이 간편한 한편으로 디트로이트와 싱가포르에서는 인간을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게 하는 문제다. 반면 인간은 어디서든 물질이 며 불투명하기 때문에 유동적일 수가 없다. 사이보그는 에테르 ether이며 정수精髓, quintessence다. 사이보그의 편재성과 비가시성은 선샤인 벨트에서 생산된 기계를 더없이 치명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런 기계는 물질로 보기도 힘들지만, 정치적 사물로 보기도 힘들다. 사이보그는 의식 또는 의식의 시뮬레이션simulation에 관련된다. 사이보그는 부유하는 기표 floating signifier로, 배송 트럭에 실려 유럽을 횡단한다. ―p.26~27
오늘날에는 각 사람의 페미니즘을 한 개의 수식어를 붙여 명명하기 힘들다. 심지어 페미니즘이라는 명사를 어떤 상황과 무관하게 주장하기도 어렵다. 명명이 배제를 낳는다는 의식이 첨예하다. 정체성은 모순적이고 부분적이며 전략적인 것처럼 보인다. 매우 힘든 과정을 거쳐 자신들이 사회적·역사적 구성물이라는 인식을 쟁취한 젠더·인종·계급의 개념은 "본질적" 통일성 essential unity을 믿게 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여성 female"됨에는 여성을 자연스레 묶는 것이 없다. 심지어 여성"being"과 같은 상태가 없으며, 그 자체가 성과 관련된 과학 담론 및 사회적 관습을 통해 구성된 매우 복합적인 범주다. ―p.30
지배의 유기역학 지배의 정보과학 Organics of Domination Informatics of Domination 표상 시뮬레이션 깊이, 통합성 표면, 경계 열 소음 완벽성 최적화 퇴폐, 《마의 산Magic Mountain》 노화, 《미래의 충격 Future Shock》 미생물학, 결핵 면역학, 에이즈 협동 커뮤니케이션 개선
이 목록은 여러 가지 흥미로운 문제를 제시한다. 첫제로 오른편의 대상은 "자연적"인 것으로 코드화 coding될 수 없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왼편의 대상 역시 자연적인 것으로 코드화할 수 없게 된다. 이제 이념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신"만 죽은 것이 아니다. "여신" 또한 죽었다. ―p.44~46
신기술은 로절린드 페체스키Rosalind Petchesky(1981)가 분석한 "사유화pivatization" 형식에 깊이 연루된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사유화 형식에서는 군사화, 우익의 가족 이념과 정책, 기업 (및 국가) 자산을 더욱더 사적인 것으로 정의하는 현상이 시너지를 일으키며 상호작용한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들은 "공공의 삶"을 모두에게서 박탈하는 과정에서 근본적 역할을 담당한다. 이 기술들은 대부분의 사람, 특히 여성의 문화적·경제적 손실을 대가로 영구적인 하이테크의 군사 체제가 급속하게 성장하도록 촉진한다. 비디오게임 및 소형화된 텔레비전과 같은 기술은 현대적 형태의 "사적 삶"을 만들어내는 핵심 동력인 것 같다. ―p.59
사이보그 정치학이 소음을 고집하며 오염을 긍정하고 동물과 기계의 불법적 융합을 기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결합은 남성Man과 여성Woman을 문제 삼고 언어와 젠더를 생산한다고 상상되는 힘인 욕망의 구조를 전복함으로써 자연과 문화, 거울과 눈, 노예와 주인, 육체와 정신이라는 "서구의" 정체성이 재생산되는 구조와 양태를 전복한다. "우리"는 본래부터 사이보그가 되기로 선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택은 "텍스트"가 널리 복제되기 이전 시대의 개체 재생산을 상상하는 자유주의 정치와 인식론을 정초한다. 다른 모든 유형의 지배를 포함하는 억압, 결백한 피해자라는 순수성, 자연에 더 가깝게 뿌리내린 자들의 지반 같은 "우리의" 특권적 위치에서 정치의 근거를 마련할 필요에서 벗어난 사이보그의 시점에서, 우리는 강력한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이 골치 아픈 이원론에서는 자아/타자, 정신/육체, 문화/자연, 남성/여성, 문명/원시, 실재/외양, 전체/부분, 행위자/자원, 제작자/생산물, 능동/수동, 옳음/그름, 진실/환상, 총체/부분, 신/인간과 같은 것이 중요하다. 지배되지 않는 주체the One이며, 타자의 섬김에 의해 그 사실을 아는 것이 자아다. 미래를 쥐고 있으며 지배의 경험을 통해 자아의 자율성이 거짓임을 알려주는 이가 타자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자율성을 확보하고 막강해지며 신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주체됨은 환상이며 그 때문에 타자와 함께 종말의 변증법에 들어가게 된다. 반면 타자됨은 다양해지는 것, 분명한 경계가 없는 것, 너덜너덜해지는 것, 실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하나는 너무 적지만 둘은 너무 많다. ―p.75, 77
적이 아닌 모습의 사이보그 이미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여러 결과가 생겨난다. 우리의 몸들, 즉 우리 자신인 몸들은 권력과 정체성의 지도다. 사이보그도 예외는 아니다. 사이보그 신체는 순수하지 않다. 에덴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이보그 신체는 통합적 정체성을 추구하지 않기에 종말 없는 (또는 세계가 끝날 때까지) 적대적 이원론들을 발생시키며, 아이러니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나는 너무 적고, 둘은 오직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 기계를 다루는 기술에서 느끼는 강한 쾌감은 더 이상 죄가 아니고, 체현의 한 양상이 될 뿐이다. 기계는 생명을 불어넣거나 숭배하거나 지배할 대상it이 아니다. 기계는 우리이고, 우리의 작동 방식, 체현의 한 양상이다. 우리는 기계를 책임감 있게 대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를 지배하거나 협박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계에 책임이 있다. 우리는 그들이다. ―p.83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Alfed Nod Whitehead는 "구체적인 것the concrete"을 "포착prehensions의 합생concrste"으로 기술했다. 그는 "구체적인 것"을 "실제의 사건actual occasion"으로 이해했다. 실재Reality는 능동태 동사이며, 모든 명사는 문어보다 발이 더 많이 달린 동명사처럼 보인다. 존재자들은 서로를 향해 뻗어나가며 "포착"이나 파악을 통해 서로와 자신을 구성한다. 모든 존재자는 관계에 선행해 존재하지 않는다."포착"에는 결과가 있다. 세계는 운동 속의 매듭이다. 생물학적 결정론과 문화적 결정론은 모두 잘못된 곳에서 구체성을 구성한 사례들이다. "자연"이나 "문화"와 같은 잠정적이고 부분적인 추상 범주를 세계로 착각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잠재적 결과를 선행하는 기초로 오해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미리 구성된 주체나 객체는 없으며, 단일한 근원이나 단일한 행위자, 최종 목적과 같은 것은 없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표현을 빌리면 "잠정적 기초 contingent foundations"" 밖에 없다. 중요한 육체bodiesthat matter 는 결과다 . 행위주체 agencies 의 우화집 , 관계 맺음의 중들, 무수히 많은 시간이, 가장 바로크적인 우주론자의 상상은능가하는 으뜸패에 해당한다. 내게 반려종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p.122~123
요약하면 "반려종"은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 구성물 compoine과 관련된다. 바로 공구성, 유한성, 불순성, 역사성, 복잡성이다. 따라서 <반려종 선언>은 개와 사람이 서로에게 소중한 타자가 되면서 함께 살아가는, 역사적으로 한결같이 특수한 삶 속에서, 자연과 문화가 내파하는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 다양한 존재자가 그 이야기 속으로 호명되고, 그 이야기는 위생적 거리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에게도 유익하다. 나는 독자들에게 기술문화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야기와 사실 모두의 차원에서, 자연문화의 공생발생적 신체조직을 가진 존재인 우리가 되었다는 점을 이해시키고 싶다. ―p.136 나는 이야기와 사실이 서로 극복할 수 없는 차이 때문에 무과실 이혼을 하게 되었다는 근대주의적 믿음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거대 제도 두 개의 품에 안겨 자라났다. 이 두 제도, 즉 교회와 언론은 부패한 것으로 유명하고, 과학에 의해 (계속 이용되기는 하지만) 멸시받는 것으로 유명해도, 진리에 대한 끝없는 갈증을 길러내는 데는 필수적이다. 기호와 육신, 이야기와 사실. 내가 태어난 집에서는 이 생산적인 generative 커플이 별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 둘은 항상 왈왈거리면서도 떨어질 줄 몰랐다 . 어떤 방식으로든 생물학을 충실히 하려면, 반드시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고, 반드시 사실을 수집해야 하고, 진실을 향한 갈증을 품은 채로,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나 사실이 빗나갔다는 것이 입증되면 포기할 마음가짐 또한 반드시 갖고 있어야만 한다. 연구자는 이야기가 생명의 중요한 진실에 도달하게 되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그 이야기를 지키면서 불협화음으로 빚어진 공명을 상속하고, 모순을 살아가겠다는 자세 또한 가져야만 한다. 바로 그런 종류의 충실함이 지난 백오십 년 이상 진화생물학을 융성하게 하면서 지식에 대한 굶주림을 채울 수 있도록 해준 것이 아닐까? 어원학적으로 팩트(사실)fact 는 이미 이룬 행위, 간단히 말해 업적을 일컫는다. 팩트는 과거분사이며, 이미 한 것, 끝난 것, 고정된 것, 입증된 것, 수행된 것, 성취된 것을 도한다. 팩트는 논문이 다음 판에 수록될 수 있는 기한을 설정해왔다. 픽션(허구)fiction은 어원학적으로 팩트와 매우 가깝지만, 품사와 시제가 다르다. 픽션은 팩트와 마찬가지로 활동을 일컫지만 가장假裝이나 속임수뿐 아니라 모습을 만들고 구성하며 발명해내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픽션은 현재분사에서 유래했고, 진행 중이며, 아직 문제로 남아 있고, 마감되지 않았으며,사실과 어긋날 가능성이 남아 있고, 아직 진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조만간 알게 될 것을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동물들과 함께 살고, 그들/우리의 이야기에 거주하면서 관계의 진실을 말하려 애쓰는 것, 진행 중인 역사 속에서 공존하는 것. 이게 바로 반려종의 일이며 반려종에게 분석의 최소 단위는 "관계"다. ―p.138~139
남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태도는 용납하기 힘든 신경증적 환상이다. 반면, 골치 아픈 조건들을 맞춰가면서 사랑을 지속하려는 노력은 아주 다른 문제다. 친밀한 타자를 더 잘 알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별수 없이 겪게 되는 우습고도 비극적인 실수들은, 그 타자가 동물이건 인간이건 또한 무생물이건 간에 내 존경심을 자아낸다 . ―p.161
대체 누가 있는가who is at home 는 영원한 질문으로 남을 것이다. 핵심은 타자나 자신에 대해 알 수 없지만, 관계 안에서 누구와 무엇이 출현하고 있는지를 항상 질문하는 것이다. 종과 관계없이 진정한 사랑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하는 내용이다. 신학자들은 "부정의 방식으로 아는 것"의 힘을 설명한다. 존재Who/What Is 는 무한하기 때문이다. 유한한 존재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서는 [누구/무엇이] 아닌 것, 즉 자신의 투사물이 아니라는 사실만을 가려낼 수 있다. 그러한 유형의 "부정적" 앎의 또 다른 이름은 사랑이다 . ―p.177~178
이 선언문은 지금까지 인간 , 동물 , 무생물의 행위 주체들이 공구성한 두 종류의 시공간 척도를 강조했다. 즉 (1) 행성 지구와 그 자연문화적 종들의 층위에서의 진화적 시간, (2) 유한한 신체와 개체 삶의 척도에서의 면대면 시간. ―p.193
나는 반려종의 진화적·개인적·역사적 시간의 척도를 넘나드는 무한하게 복합적이고 다종적인 유산을 물려받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개 세계에서 더 많은 성찰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모든 공식 품종과 모든 개는 분명 산노동 living labor, 계급 형성, 갈고 다듬은 젠더 및 성의 개념들, 인종적 범주, 그리고 다른 지역과 지구적 층위들의 무수한 역사와 개의 반려인들을 연계시킬 수 있는 실천과 이야기 속에 융합되어 있다. 지구상에 있는 개 대부분은 제도화된 품종에 속하지 않는다. 동네 개나 시골 개, 도심에서 살아가는 야생 개들은 단지 나 같은 사람뿐 아니라, 몸소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자체적으로 의미화하는 타자성 own signifying otherness 을 지니고 있다 . ―p.235
이 게임을 발명한 것은 그들이다. 그리고 이 게임은 그들을 새로 만든다. 다시 한번, 메타플라즘. 우리는 이 중요한 말이 지닌 생물학적 맛을 언제나 다시 음미한다. 이 말은 필멸의 자연문화 속에 이것은 존재론적 안무다. 참여자들이 자신들이 물려받은 몸과 마음의 역사를 통해 발명해내고, 그들을 그들로 만들어주는 육체적인 동사로 다시 만들어낸, 필수적인 놀이다. ―p.240
하지만 모든 통사론은 무언가를 해명하고, 다스리고, 알고, 식별하려는 욕망에 대해 일침을 놓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문장의 끝을 읽을 시점이면 사실이 아닌 데다가 스스로 믿지도 않는 내용을 적어도 여섯 가지는 말한 상태인데, 문장을 끝내려면 별반 도리가 없어요. 하려던 말을 할 수 없는 거죠. 언어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p.258
왜냐면 실제로 그 논문은 " 둘 다 / 또한 both/and" " 옳은데 yes/and" "아니지만 no/but" "아니고no/and" 등을 다루기 때문이죠. 문형이자 논문이고, 작업하는 방식인데, 이런 말도 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말해보자면, 이게 내가 작업하는 방식일 뿐 아니라, 세계 만들기(세계화) worlding가 바로 이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둘 다/또한–절대 쉬운 일은 아닌데, 합해지지 않거든요–이처럼 심각한 대립적 차이를 넘어 서로 만난다는 것은 변증법적 해결책 같은 것에 도달하지 않습니다. 제가 물려받은 인식의 끼는 과정에서 끈질긴 압력을 가하기 때문에 문장에 마침표를찍을 무렵이면 "앎(알던 것)에서 벗어나기 unknowing"라는 소중한 자리로 옮겨가게 된다는 느낌을 절대 벗어날 수 없게 만듭니다. ―p.262~263
잉여의 죽임과 잉여의 죽음이 유례없이 퍼진 시대에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데버라 버드 로즈가 "이중적인 죽음 double death"의 시대라고 부르는 시기에 말이에요. 죽음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지속을 분절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절멸, 멸종, 종 학살의 시대에 진정한 책임을 지고 살아간다는 건 무얼 뜻할까요? 여기에 홀로코스트를 추가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수와 인간이 떠맡아야 하는 부담이 유례없이 커지는 문제 역시 추가할 수 있지요. 그리고 인간-동물의 분할은 이런 말들과 구분되지 않습니다. 인간과 동물을 분리해서 각자에게만 적용되는 말을 쓸 수 없지요. 이 사안은 다종적입니다. ―p.286
생명정치는 "인격"의 수준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심지어는 "몸the body"의 수준에서도 아니고요. 그의 표현을 빌리면 "살flesh"의 수준에서 작동합니다. ―p.320
말이 육신을 통해 현시하게 만든다는 것은 아닙니다. 기호 작용과 육신은–뭐죠?–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라는 것… 그다음에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상징보다 심층적인 수준에 다른 뭔가가 있어서 또 다른 뭔가를 통해 현시되는 것이 아니에요. 글쎄, 뭘까요? 여기에는 더 급진적인 동일성/비동일성identity/nonidentity의 구조가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유물론적인 , 더 급진적인 비동일성의 구조가 있지요 . ―p.341
이 모든 존재는 살고 죽습니다 . 잘 살고 잘 죽을 수 있으며, 고통과 죽음을 겪는 한이 있어도 번성할 수 있지만, 삶을 위해서 이중의 죽음을 집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구의 존재, 인간인 사람들을 포함해 다채롭고 사치스러운 세계의 허기를 채우는 생명력의 재출현(애나 칭의 유형)을 재촉할 수 있습니다. ......회복, 부분적 연결, 재출현에 관심을 기울이는 우리는 모두 촉수의 뒤얽힘 속에서 모든 것을 우리 식으로 재단하고 묶으려 애쓰지 않으면서도 잘 살고 잘 죽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촉수는 감각기관입니다. 촉수에는 침이 박혀 있습니다. 촉수는 세계를 맛봅니다. 인간 거주자들은 촉수의 생물군계 holobiome 안에서 그것을 이루고, 인류가 연소시키고 추출하는 시간은 한때 균류의 물질성 및 시간성과 매우 다른 방식으로 연대하던 숲과 농장 그리고 산호초가 있던 곳에 놓인 단작單作 플랜테이션 지대 및 점균의 판과도 같습니다. ―p.365~3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