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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드라마/알레산드로 아로나디오/다니엘 파리지/90>
이 역시 이번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으로, 영화제에서 3개 상을 수상하며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이탈리아 영화제에 앞서 강력하게 추천된 작품이었고, 개막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탈리아말로는 "Orecchie"인데, 우리말로 바꾸니 <귀>라는 단음절이 되어서 더욱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의 영화였다. 헤아려보면 올해 65편의 영화를 봤는데, (하나하나 감상이 모두 떠오르지는 않지만)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 중에 하나로 남을 것 같다. 적어도 연말에 생각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보기 좋았다.
영화에서 내가 끌어낸 주된 메시지는 "삶에는 유머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주인공은 매사 심각하고 생각이 많은 인물이다. (주인공이 나랑 정말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영화에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직접적(대사)으로 표현하는 걸 안 좋아하는 편인데, 이 영화는 마음에 퍽퍽 꽂히는 대사들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감독은 이 영화를 '로마에서 하룻동안 벌어지는 한 남자를 쫓는 흑백(黑白)의 로드무비'로 소개하고 있다. 영화의 시놉시스는 다음과 같다. (이름조차도 없는) 남자는 어느날 아침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깬다. 냉장고에는 그의 친구 'Luigi'가 죽었다는 여자친구의 간단한 메모가 붙어 있다. 문제는 그가 그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귀에 따갑게 들려오는 자명종 소리를 진찰받고자 집을 나서는데, 그가 마주하는 세상은 엉뚱하고 괴짜같은 세상이다.
정사각형의 흑백화면은 영화 중반을 넘어서면서 어느 순간 1:1.85 비율의 화면으로 전환되어 있다. 영화의 시작은 한 남자의 침대에서 출발한다. 이어지는 수녀들의 방문. 수녀들은 다짜고짜 그에게 "이 세상에 희망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나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단호하게 답변한다. "NON!"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회의적인 인식)은 영화의 첫머리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이명 증상을 고치기 위해 병원을 방문하지만, 의사들은 어쩐 일인지 죄다 그를 골탕먹이기만 한다. 그러고선 의사가 따끔하게 말한다. "많은 환자들이 아무런 질병이 없다고 진단을 하면 오히려 실망한다. 본인에게 질병이 있다고 진단을 해야 안심한다. 문제가 있어야 안심하는 사람, 당신 같은 부류가 제일 골치 아픈 환자다!!" 물론 심각한 질병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사고방식에 따라 자기 본인과 주변 환경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아무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마지막 장례식에서 찍은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남자가 말한 명대사를 찾아보았지만, 아무리 검색해봐도 나오지 않는다ㅠ 16년도에 나온 영화라 영상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고.. 여튼 그 다음으로 또 기억에 남는 장면이 '그'가 그를 가르친 교수의 집을 방문한 장면이다. 교수님을 만나러 왔지만 어쩐 일인지 교수님의 부인이 대신 그를 맞이한다. 일찍이 친분이 있던 두 사람은 건물의 테라스에서 대화를 나눈다. 테라스 너머로는 로마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비록 흑백이지만 풍경이 멋있다)
그녀는 '그'에게 그가 말한다. 당신이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고 비관하지 말라. 이 세상에 어울리는 것을 "타협"이라 생각하지 말라. 때로는 "수용"해라. 요지는 이렇다. (이 역시 멋진 대사였는데, 그대로 옮겨놓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일견 세상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덜어내라는 것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서 웅크려 외곬이 되고, 세상을 째려보지 말라는 그녀의 메시지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녀의 남편(교수)이 꼭 '그'와 비슷한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를 교수에게로 안내한다. 어느 방으로 들어가니 '그'가 만나고자 했던 교수는 비디오 게임 앞에 널브러 앉아 좀비처럼 게임기를 조작하고 있다. 비록 우스꽝스럽게 묘사되었지만, 염세적인 세계관에 갇힌 '그'의 말로를 암시하는 것 같다.
또한 '그'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그'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남자친구와의 대화에서도 꽤 의미심장한 멘트가 등장한다. 어머니는 '그'를 향해 "너는 너무 생각이 많아. 귀에 들리는 소리도 결국은 '생각의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일침을 놓는다. 한편 마침내 그는 그가 알지도 못하던 'Luigi'는 잘못 연락이 닿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성당에서 장례식을 집전하는 신부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신부는 그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말하기도 한다.(이 부분은 좀 종교적인 의미다) 결국 이야기를 관통하는 것은 불필요한 생각을 줄이는 대신 세상과 더욱 소통하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 때 '소통'이라 하는 것을 '타협' 또는 '굴복'으로 여기지 말고 때때로 '수용(받아들임)'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튼 주인공인 '그'는 세상과 자신간에 접점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용기(勇氣)를 마침내 갖게 된다. 그리고 '그'의 여자친구와 행복한 해피엔딩을 맞는다. 리뷰를 적고 보니 그야말로 '교훈적'인 영화였다. 그렇지만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나 스토리 뿐만 아니라 영상 역시 아름답다. 흑백임에도 불구하고 주택가의 그래피티, 로마의 야경, 성당 등이 아기자기하게 등장한다. 오히려 흑백영화이기 때문에 촬영장소나 소도구에 각별히 신경을 쓴 것 같았다. 아쉬운 대로 영화속 한 장면을 실으며 매듭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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