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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사 / 앙드레 모루아 / 김영사>
대헌장은 국왕이 국민의 기득권을 존중한다는 것을 막연히 확인한 것뿐이었다. 귀족들은 새로운 법률을 제정할 생각을 하지 않고 기득권의 존중을 요구했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봉건적 특권을 왕에게 강요할 수 있는가, 이것이 유일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대헌장을 기초할 때에 이 점을 성문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원문으로부터 후세 사람들은 더욱 일반적인 원칙을 뽑아낼 수가 있었다. … 따라서 대헌장의 중요성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함축성에 있다. 후대의 사람들에게 대헌장은 근대적 해석에 의한 '영국인의 자유헌장'이 될 것이고, 15세기까지는 국왕이 여러 차례 치세 중에 이 원문을 준수할 것을 서약했다.
10세기 동안이나 교황청이 유럽에서 광범위한 정치적 사법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제국의 몰락이 유럽에 빈약한 시민적 권력과 분할된 주권만을 남겨 놓았기 때문이었다. 강대한 국가가 출현하자마자 교황청과의 충돌은 치명적인 정도에 이르렀다. … 대륙의 여러 나라의 교회는 영국보다 3, 4세기 정도 더 오래 특권을 보유하고 있었던 대신에 영국은 반종교운동을 겪지 않았다는 하나의 이득이 있었다. 영국에서는 경합하는 여러 종파가 서로 투쟁은 했으나 어떠한 정치세력도 감히 그리스도교 자체를 반대한다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1688년의 혁명과 100년 후에 있었던 프랑스 혁명과는 전혀 유사점이 없다. 프랑스 혁명은 계급간의 투쟁, 즉 농민과 도시민이 국왕과 귀족에 반항한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이와 같은 사례는 없었다. 영국 혁명의 표면에 나타나 있는 것은 종교적 충돌과 정치적 충돌이라는 두 가지 투쟁이었다. 그러나 눈에는 비교적 띄지 않았으나 제3의 투쟁이 있었다. 그것은 재정문제였다. … 혁명은 분명히 의회, 국교회, 그리고 관습법의 승리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유산계급의 스리를 의미하고 있었다. 신형 군대와 수평당이 권세를 장악하고 있던 수년간은 청교도와 평등주의 정권이 탄생한 것처럼 보였으나, 의구심 때문에 의회지지파인 대영주와 왕당파의 대영주가 결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자가 휘그당을, 후자가 토리당을 구성하게 되었는데 양자 간에는 과격한 사상을 가진 인물을 절대로 정권에 들이지 말자는 묵계가 성립되었다.
이로써 앙드레 모루아의 3부작을 모두 읽었다. 인도를 여행하면서 목격한 인도인들의 생활태도와 사고방식은 지금까지도 불가해한 것이었다. 정확히 어떤 점이 그랬는지를 꼽기가 모호할 만큼. 여행을 하는 동안 문득 하나의 물음이 떠올랐다. 과연 옛 영국인들은 이들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었을까? 그 누구의 구속도 거부할 것 같은 인도인들을 그들은 어떻게 굴복시켰을까? 앙드레 모루아의 <영국사>를 읽은 것은 그런 단순한 질문 때문이었다.
앙드레 모루아의 <영국사>는 <미국사>, <프랑스사>의 집필을 가능케 한 초기의 역작이다. 나 역시 세 권의 역사서 가운데 <영국사>를 단연 추천하고 싶다. 영국 자체가 비교적 순탄한 역사를 걸어왔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 중 가장 흐름이 일관적이고 이야기가 완결된 느낌이 있다. 어떤 면에서는 프랑스인인 저자가 영국을 바라보며 느끼는 부러움 섞인 시선마저 느껴진다.
사실 <영국사>의 모든 부분을 흥미롭게 읽은 것은 아니다. 영국의 근현대사를 지배하는 하노버 왕조 시대의 역사는 가능하면 비판적 관점에서 읽으려고 했다. 앙드레 모루아는 영국의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를 매우 우호적으로 그리는 데 이는 지극히 서구중심적인 시각이다. 어떻게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태초의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데에도 저자의 서구중심적인 역사관은 장애물이었다.
# 이런 부분을 비판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이 책을 추천하면서 비판하는 것인데, 이 패러독스에서 내가 어떤 점에서 이 책을 비판적으로 읽는지부터 소개하고자 한다.
늘 유럽대륙의 세력균형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프랑스와 달리, 섬나라였던 영국은 상대적으로 대외정책(식민지정책)에 더 진력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메리카 및 중동, 아프리카와 인도 식민지 사업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늘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파쇼다 사건으로 이집트가, 플레시 전투로 인도가 영국의 수중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미국마저 영국의 통치 아래 들어간다. 식민지 건설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거대한 야심과 달리, 매번 식민지 사업(동인도 회사 등 식민지화 과정을 하나의 돈되는 일로 묘사하는 것도 불쾌하다)은 틀어지기 일쑤였는데, 이는 프랑스가 영국에 비해 약체여서라기보다 영국에 비해 힘을 쏟아야 할 곳이 여러 군데 있었기 때문이다.
앙드레 모루아는 오늘날의 영연방―특히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국 본국의 왕조를 기초로 입헌군주제를 택한 국가의 사례―을 언급할 때, 영국의 식민지 정책이 관대하고 유연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미국의 독립과정, 호주와 캐나다의 독립과정에서 영국이 보여준 관용―더 정확히는 빠른 포기;;―을, 극단적 상황을 피하는 영국인들의 포용적인 민족성을 들어 설명하기까지 한다. 문제는 하노버 왕조 이래로 제국주의가 팽창하는 과정에서 피식민지 국가가 겪은 고통과 희생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영국의 식민지정책을 덮어두고 미화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프랑스인의 관점'에서 근대 영국이 보여준 대외정책은 현명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피식민지국의 관점'에서 영국의 식민지정책은 그것이 어느 것이든 고통이었음이 분명하다. 오늘날 아프리카에서 진행중인 국지적 내전, 중동에서 되풀이 되는 극단주의 무장세력의 테러행위, 그리고 내가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인도의 절대적 빈곤(더 나아가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할과 현재진행형인 영토전쟁)은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영토싸움과 선긋기의 부산물이다.
물론 앙드레 모루아는 <영국사>를 쓴 것이지, <영국의 식민화 과정>을 쓴 것은 아니다. 그의 관심은 대개 영국의 대내적인 부분에 머물러 있다. 그렇지만 한 국가의 역사라는 것은 주변국과의 대외관계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영국을 단순히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묘사하는 것은 서구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 책이 말하는 "영국사"라는 것은 'England'의 역사이지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의 역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원제 자체가 <History of England(Histoire d'anglaterre)>다. 스코틀랜드는 메리 여왕 치세에서부터 잉글랜드사에서 비중있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다뤄지지만, 웨일즈와 북아일랜드의 역사는 이 책에서 거론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영국이 600년간 식민지배한 '아일랜드'에 대한 언급이 사실상 빠져 있다는 것도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 이런 부분은 좋았다!
앙드레 모루아의 책은 역사서라기보다 한 편의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읽는 느낌이다. 역사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만큼 역사를 서사적으로 풀어내는 것은 지난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영국사>를 정치 교과서를 보는 느낌으로 읽었다. 저자가 '의회주의의 발달사'에 방점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 영국이 1000년이 넘는 기간 의회제도와 정당정치를 어떤 식으로 발달시켜왔는지, 민주주의의 주요한 역할자로서 일반시민이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그게 이 책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며, 모든 단점을 상쇄하고도 이 책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까닭이다.
영국은 운이 좋았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입헌군주제를 발달시키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영국이 섬나라라는 점은 대외정책에서도 이점으로 작용했지만, 대내적으로도 큰 이점이 되었다. 일찌감치 중앙집권적인 왕정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고, 귀족의 세력이 성장하기 전에 일반인(농노, 요먼, 젠트리)과 왕을 매개할 능력을 지닌 두 기구가 태동했다. 첫째, 하원은 초기에는 과세권 집행을 주도하는 기관에서 근대 이후로는 여론 수렴 및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기관으로 성장한다. 둘째, 지방의 순회법관제도는 사인간 분쟁에 대한 공정한 해결안을 제시하는 한편, 지방의 법률과 중앙의 법률을 일원화하면서 오늘날 보통법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한다.
그러나 마그나 카르타에서 권리장전에 이르는 역사적 성과를 흔히 묘사되는 것처럼 '무혈'로 일궈낸 것은 아니다. 물론 프랑스대혁명처럼 극단적인 유혈투쟁이 영국에서 발생하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비극적인 유혈사태가 없었음에도 이들 성과에 대해 '명예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이 마그나 카르타와 권리청원, 권리장전을 이룰 수 있었던 바탕에는 크게 세 가지의 유혈사태가 존재했음을 유념해야 한다. 첫째, 중부유럽의 30년 전쟁처럼 가공할 만한 종교전쟁은 아니었으나, 영국국교회의 등장 이후 영국내 그리스도교는 여러 갈래로 나뉘었고, 오늘날까지도 크고 작은 분열이 끊이지 않고 있다.
둘째,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을 통해 영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정체성이 확고해졌고, 영국의 중차대한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하원의 역할이 날로 커져 갔다. 끝으로, 대내적으로 진행된 장미전쟁은 국내 귀족의 급속한 몰락을 가져왔다. 이로 인해 신분차별에 대한 불만을 무마하는 문제보다는 왕의 정책결정과 일반인들의 여론을 조율하는 문제가 더욱 부각될 수 있었다. 이 모든 사건들이 필요한 시점에 출현해서 적절한 방식으로 해결을 보았다는 건 그저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는 참 신기할 뿐이다. 앙드레 모루아가 말하듯 당시의 영국인들은 본인들이 의회주의를 발달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도 못했고, 단지 현실적으로 필요한 결정만을 내렸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 자유로운 생각
"행복한 문명에 젖어버리면 결국에는 시민들이 그들의 자유가 그들의 군사적 노력의 대가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는 위험이 있다."
<영국사>를 읽으면서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든 문구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회주의와 법치주의,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가 국가의 정체(政體)를 이루는 당연한 원칙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리스 시대에 플라톤은 민주정이 후퇴하면 독재가 등장한다고 했다. 그만큼 민주정을 바라보는 잣대가 오늘날과는 사뭇 달랐다. 다음 역시 <영국사>에 나오는 문구다.
"봉건제도가 자체의 성공으로 인해 사멸한 것처럼 영국의 왕정제도는 자체의 공헌으로 해서 차차 약화되어 갈 것이었다."
영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모범적으로 의회주의와 정당정치를 안정적으로 발달시켜 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영국은 더 이상 세계 패러다임을 주도하고 있지 않다. 패권은 대서양 건너 미국으로 넘어간지 반세기도 더 되었다. 영국이 권좌에서 내려온 것이 의회주의와 정당정치가 내포한 한계 때문이라는 비약으로 나아가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에 대해서도 앙드레 모루아는 저서에서 잠깐씩 의견을 내비치고 있는데 직접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해권을 장악하는 것이 중요했던 17~18세기에는 무적함대를 갖춘 영국이 패권을 쥘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영국은 더 이상 압도적인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지도 않고, 현대전(現代戰)의 전술 역시 근본적으로 뒤바뀌었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우리가 오늘날 믿어 의심치 않는 의회주의와 정당정치, 법치주의, 민주주의와 같은 것이 영속할까?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더 나은 또는 후퇴된 통치 시스템으로 나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봉건제도와 왕정제도가 사라져 갔듯이, 그리고 튜더 왕조 시대를 살아가던 영국인들이 오늘날의 입헌군주제도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듯이 말이다.
...인도에서 얻어 온 질문 하나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책을 덮고 나니 또 다른 궁금증을 얻어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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