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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일상/book 2017. 3. 3. 15:33
# 들어가면서
인도 여행을 다녀온 뒤, 찾아본 책들이 몇 권 있다. 파테푸르 시크리를 다녀오던 날 버스에서 헝가리 친구를 만나며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동유럽의 역사서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찾아본 것이 '독일사'와 '발칸의 역사'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권의 책에서 헝가리에 대한 부분만 쏙 빠져 있다.
독일사에 관하여 내가 읽은 책은 정확히 '도이치 제국'을 다루는데, 합스부르크 왕가(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국가)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이 가운데 '도이치'라는 이름으로 분류될 수 있는 '오스트리아' 문제만이 다뤄지고 있다.
반면 발칸의 역사도 헝가리 문제는 살짝 빗겨서 다루고 있다. '루마니아'와 헝가리가 영토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과정에 대한 언급은 잠깐씩 등장해도, 본질적으로 '동방 문제'에 헝가리는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합스부르크'나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찾아봤는데, 딱히 내 관심을 충족시켜줄 만한 책이 보이지 않았다. 인도 여행을 가기 전 읽을 만한 '인도사' 책이 없어서 아쉬웠던 게 떠올랐다. 그때도 마땅히 읽을 거리가 없어 대신 힌두교 서적이나 건축 서적을 찾아 읽는 것으로 대신해야만 했다.
여하간 내가 읽은 두 권의 책 <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와 <발칸의 역사>는 거의 동일한 시기에 독일 지역에서 전개된 역사와 발칸 반도에서 전개된 역사를 각각 다루고 있다.
오늘날의 '도이치'와 '발칸'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한 19세기는 '국민국가'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져 가던 시기다. 매우 흥미로운 점은 '국민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민족적 운동'이 이 두 지역에서 정반대의 양상으로 발현되었다는 점이다.
합스부르크를 제압하고 도이치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쥔 도이치 제국에서 민족운동은 극단주의적인 대외팽창이라는 결과―두 차례의 세계대전―로 귀결되었다. 반면 오스만 통치 하에서 민족적·종교적 자유를 누리던 발칸지역에서는 서구의 국민국가 개념이 확산되면서, 악명 높은 대내적 인종청소가 시작된다. 이 때문에 중부유럽(독일)과 동남부유럽(발칸국가들)의 역사를 비교하며 읽는 것은 매우 흥미로웠다.
<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 / 제바스티안 하프너 / 돌베개>
작은 나라와 큰 나라는 전혀 다른 외교상의 생존 법칙을 따른다. 작은 나라는 의존 또는 중립을 추구한다. 절대로 자신의 권력정책을 통해 자기 운명을 개선하려는 시도를 할 수가 없다. 하지만 큰 나라들에는 이런 시도가 아주 자명한 일이다. 어딘가 비어 있는 공간을 발견하면, 큰 나라의 국가적 생명 원칙인 권력의 확보와 확장을 위해 그쪽으로 진출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도이치 제국은 큰 나라였다. 이 점이 바로 제국의 완전히 새로운 점이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확장하여 뻗어 나갈 빈 공간은 거의 없었다.
# 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
1871년에서 1945년까지 불과 74년을 버틴 도이치 제국은 그 짧은 수명에도 불구하고 현대사에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굳이 부연할 것도 없이 양차 대전의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한 번의 끔찍한 전쟁도 모자라서, 전쟁이 끝난지 채 30년이 지나기도 전에 더욱 가공할 만한 두 번째 전쟁을 일으킨 나라. 도이치 제국에는 늘 '후안무치의 가해자'라는 오명이 따라 다닌다.
나폴레옹이 유럽대륙을 정복했던 것과 달리, 독일을 주도로 전개된 전쟁을 '세계대전'이라는 이름을 붙여가면서까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일면 모순적인 것 같다. 누군가는 '정복왕'이고 누군가는 '전쟁광'이라니. 그렇지만 도이치 제국이 두 차례에 걸쳐 일으킨 전쟁은 분명 인권 유린이나 잔인성 측면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측면이 있었던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도이치 제국'이라는 나라와 당시의 시대에 대해, 저자는 이러한 문명파괴행위가 대내적 요인에 의해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대외적 요인에 의해 발생한 것인지 연원을 추적해간다.
일단 비스마르크 통치하의 제1제국과 힌덴부르크 대통령 통치하의 제2제국에서 보여준 도이치 제국의 대외정책은 상당히 온건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문제는 독일의 지정학적 위치가 향후 주변국과의 불화를 잉태할 씨앗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가 19세기 말 러시아와 청, 일본 사이에서 세력균형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처럼, 도이치 제국은 러시아, 프랑스, 영국을 상대해야 했다. 이 상황에서 국민국가 설립에 대한 독일인들의 여망이 분출되면서 당시에 정치적 상황이 매우 불안정했던 것이 사실이다.
1871년에 베르샤유에서 출범한 도이치 민족국가를 어째서 단순히 '도이칠란트(Deutschland)'라 명명하지 않고 '도이치 제국(Deutsch Reich)'이라 명명했던가? 그것은 아마도 처음부터 이 나라가 민족국가 '도이칠란트' 이상의 것이자 그 이하의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하라는 것은 제국의 수많은 도이치 사람들을 빼놓았기 때문이다. 제국은 '작은 도이칠란트'로서, 제국을 설립한 프로이센의 세력권 안에 있던, 따라서 프로이센의 주도권에 동의하는 한에서만 민족국가였다.
'도이치 제국'. 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 먼저 프로이센이 통치할 수 있는 만큼의 도이칠란트, 또는 도이칠란트가 지배할 수 있는 만큼의 유럽 및 세계라는 두 가지 의미였다. 앞의 것이 비스마르크의 생각이고, 뒤의 것이 히틀러의 생각이었다. 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에 이르는 길은 도이치 제국의 역사이며 동시에 그 몰락의 역사이다.
도이치 민족주의 운동은 反프랑스 운동이기도 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모범적인 현대인으로 보였을 뿐만 아니라, 정복자, 약탈자, 착취자로도 도이칠란트로 왔다. 특히 군사적인 착취자였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도이치 사람들은 많은 피를 흘렸고, 아주 많은 사람이 강제로 나폴레옹의 편에서 싸워야만 했다.
그랬으니 극히 상반되는 감정들이 한데 뒤섞였다. 한편에는 프랑스에 대한 아주 분명한 미움,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프랑스인들과 똑같이 하고 싶다는 경탄하는 소망이 생겨난 것이다. 나폴레옹이 성취한 일들은 분명히 혁명기의 프랑스를 민족주의화하고 철저히 정치화한 덕분에 가능했다.
반면 히틀러 통치 하의 제3제국에 대해서는 도이치 제국의 대내적 요인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지만 도무지 이성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몇몇 치명적인 정책상의 실수에 대해서는 저자 제바스티안 하프너가 히틀러 개인의 실수에서 비롯되었다는 듯 묘사하는 대목도 눈에 띈다.
사실 도이치 제국의 대동유럽 정책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게르만인들을 하나의 국가로 끌어모으는 과업(課業)에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의 합스부르크보다 선제권을 쥐었다. 이른바 '도이치'라는 이름 아래 묶일 수 있는 독일인은 중부유럽 뿐만 아니라 폴란드 지역, 발칸 반도에도 산재해 있었다. 자연적 국경선을 확정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국민을 끌어모으기도 용이하지 않았다는 점은, 거꾸로 도이치 제국 건설에 대한 야망을 더욱 북돋운다. 단, 이는 어디까지나 라인 강을 기준으로 동쪽 유럽에 해당되는 문제다.
여기서 문제는 라인강 서쪽을 대하는 대서유럽 정책이다. 개인적으로 대서유럽 정책에서 도이치 제국이 보여준 오만함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독일인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역사적 우연에 의해 서유럽으로의 팽창 야욕이 현실화되었다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야욕은 야욕인 것이다. 당시 도이치 제국에게 필요했던 건 동방으로 게르만 국가를 넓혀나가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서부 전선을 방비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서부 유럽, 즉 프랑스를 침공하는 것은 결코 정책의 우선순위가 될 수 없는 사안이었다. (물론 저자의 말대로 당시는 외교적 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하는 게 당연시되던 시기다. 그러나 전쟁이 활용되는 것 역시 '명분'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1차 대전에서도 그리고 2차 대전에서도 도이치 제국은 기어이 플랜더스 지방을 경유하여 프랑스를 침공한다. 오늘날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자리한 플랜더스는 일찍이 방직산업이 발달한 곳으로, 양모산업이 발달했던 영국과 깊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지역이다. 독일의 외교가들은 이 점을 늘 염두에 두었다. 그리고 비스마르크 수상에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통치에 이르는 기간에는 유럽내 세력균형을 위해 플랜더스 지방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을 고수했었다. 유럽내에서 안정적으로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게르만인에 의한 게르만 국가를 세우는 선결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도이치 사람들이 거주해온 유럽 중앙부는 언제나 서로 느슨하게 연결된, 수많은 중소 국가들과 두 개의 거대 국가가 결합된 지역이었다. 이웃 나라들은 이런 많은 수의 나라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이치 연방 대신 갑자기 단단히 결속된, 거대하고도 강력한, 매우 군사적인 통일국가가 나타났다. 외부의 여러 힘들에 맞서 중부 유럽에서 충격을 흡수하던 거대한 스펀지, 또는 아주 다양하고 거대한 인공 소재의 덩어리 대신 시멘트 건축물이 등장한 것이다. 이런 변화―도이치 민족주의자들로서는 열광할 일이지만 나머지 유럽에는 걱정스러운 변화―는 하나의 전쟁에서 완성되었다.
사람들은 나치의 활동을 일종의 '운동'이라고 규정해왔다. 하지만 비록 이상하게 들릴지라도, 1933년 이후로는, 히틀러 자신이 진짜 운동이었다. 히틀러는 통치자가 되고서 전체 제국보다, 그리고 전체국민보다도 더 많이 가동했다. 그는 확고한 국가 질서를 만들어낸 적이 없으며, 헌법을 뒤에 남긴 것도 아니고, 그가 생명을 불어넣은 수많은 기관과 조직들은 서로 협조한 적도, 서열 관계를 맺은 적도 없다. 그는 모든 것을 계속 움직이게 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안 했다. 히틀러에게 도이치 제국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었다. 제국은 그가 물려받아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아니었다. 히틀러에게 제국은 그냥 엄청난 영토 확장을 위한, 그리고 새로 만들어낼 권력체를 위한 발판이자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추가 히틀러 시대에 이르러 급격히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게다가 여기에는 유대인 학살이라는 아주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까지 덧붙여진다. 한 술 더 떠서 민족국가를 일궈내는 과업과는 무관한 러시아에까지 손을 뻗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과연 독일인들이 독일 외부에서 변명을 찾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물론 도이치 제국 말기에 엽기적이었던 전쟁의 원인을, 저자처럼 히틀러 개인의 문제로 볼 수 있지만, 어찌 됐든 관료들 뿐만 아니라 도이치 국민들까지 수동적 자세를 취했다는 것은 여전히 엄청난 아이러니다.
저자 역시 이러한 아이러니를 풀기 위해 다양한 접근을 하지만―그리고 상당히 설득력 있는 설명들을 내놓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런 잔학한 인명살상이 불과 반 세기전에 이뤄졌다는 게 도무지 상상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가면 뒤에서 행할 수 있는 악행의 끝이라는 게 어디까지일지 아찔한 생각이 들게 하는 74년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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