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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2 / 안녕, 델리(Hello, Delhi)여행/2017 북인도 2017. 5. 20. 22:33
꾸뜹 미나르 입구 도착!!
거대한 스케일의 꾸뜹 미나르
총 다섯 단으로 이루어진 꾸뜹 미나르는 지름만 14.3미터에 달한다
높이는 73미터
300미터인 에펠탑에 비하면 낮기는 해도 철근도 아닌 벽돌로 73미터를,
그것도 12세기에 쌓아올리기가 기술적으로 훨씬 어려웠을 것 같다
옥상으로 향하는 나선형 계단이 있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지금은 폐쇄되어 있다
오토바이로 역까지 바래다 준 인도인, 그리고 열차칸 찾는 것을 도와준 마난 덕분에 야간열차로 델리에 무사히 도착했다. 출국일이었다.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한 것은 역내 보관함에 짐을 맡기는 일이었다.
델리에 머물면서 뉴델리 역을 이용해본 적이 없다. 이번에도 니자무딘 역에서 하차하게 되었다. 마지막날이었지만 꾸뜹 미나르를 들를 생각이었기 때문에 니자무딘역도 나쁘지 않았다. 열차가 한 시간 정도 연착하기는 했지만, 짐을 보관소에 맡기고 니자무딘을 나섰을 때가 아침 아홉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그리고 꾸뜹 미나르에 도착했을 때가 10시 쯤이었다. 오전의 해가 점점 빛을 발하는 시간이라 꾸뜹 미나르의 음영이 무척 뚜렷했다. 멀리서 봤을 때에는 빛이 부셔서 꾸뜹 미나르의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다.
꾸뜹 미나르를 에워싼 회랑
마치 불국사나 정림사지가 가람배치로 회랑을 두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꾸뜹 미나르의 밑동
여러 관람객들이 넋놓고 석탑을 올려다 보았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본 꾸뜹 미나르
화려하다 화려해
인도에 머무르는 동안 맑은 날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았다. 대개 정오를 넘기고 태양의 열기가 최고조에 이르면 도시를 덮고 있던 먼지가 가시기는 했지만, 오전 반나절의 날씨가 좋지 않은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망원렌즈를 갖고 왔으니 꾸뜹 미나르를 한 컷에 담는 것을 불가능했는데, 망원렌즈였든 광각렌즈였든 꾸뜹 미나르의 스케일은 어마어마했다.
쿠왓 울-이슬람(Quwwa ul-Islam―우리말로 "이슬람의 돔"이라는 뜻이다) 모스크를 둘러싼 회랑
지금 모스크는 폐허로 남아 있어서 그 흔적만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시로서는 델리에 처음으로 세워진 이슬람 사원이라고 한다
또 다른 스페인 관광객이 진지하게 설명을 듣고 있었다
회랑 사이로 빼꼼히~
알라이 다르자와(Alai Darzawa)
비록 모스크는 자취를 감췄지만 거대한 입구를 통해 모스크의 가공할 규모는 가늠할 수 있다
멀리 보이는 알라이 미나르(Alai Minar)
꾸뜹 미나르와 일대 사원의 축조는 인도에 최초로 이슬람 왕조가 들어섰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렇지만 규모가 이만큼 거대해지기까지는 몇 대의 왕을 거쳐야 했다
11세기부터 쌓아올려진 꾸뜹 미나르의 두 배 크기로 새로운 미나렛을 새로 짓고자 시작한 것이 14세기
그러나 완성의 끝을 보지 못하고 얼마 안 돼 공사는 중단된다
그러고 보면 델리라는 도시에 있는 내로라 하는 유적 가운데 힌두교의 유산보다 이슬람교의 유산이 더 많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자마 마스지드, 악바르의 묘, 꾸뜹 미나르―더 정확히는 힌두 양식이 섞여 있기는 하지만―에 이르기까지. 이슬람 특유의 기하학적인 문양과 아랍어를 형상화한 부조(浮彫)는 계속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유럽의 미술관에서 작품들을 둘러보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게 그 작품 같고 너무 꽉찬 화면의 구성에 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이슬람교는 회화가 적다보니 서양과 같은 원근감 있고 사실적인 그림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대신 다채로운 문양과 캘리그래피가 발달했는데, 반복적인 리듬을 그리는 패턴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꼭대기 줌―인
거대한 규모만큼 공사중의 우여곡절이 많은데
지진으로 파손된 꼭대기를 18세기 초 영국인이 복원할 때까지 공사와 수리가 반복되었다고 한다
햇살이 내리쬐는 평화로운 오전
영욕(榮辱)의 세월을 견뎌낸 모스크의 잔해
한편 이슬람교나 힌두교의 유산을 보고 있자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에 종교가 얼마나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도대체 얼마나 신을 숭상하면, 저토록 거대하게 또는 저토록 높게 건축물을 짓는 것일까. 타지마할, 악바르의 묘, 후마윤의 묘에 이르기까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건축물의 규모가 크다. 물론 이들 건축물은 신을 숭배하기 지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 사람을 기리기 위해 이슬람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들이다.
후일 맘루크 왕조의 시조가 되는 모하메드 고리(Mohammed Ghori)가 승리를 기념하여 꾸뜹 미나르를 쌓아올린 것이 정확히 기원후 1192년이라 한다
그런데 이 "철기둥"의 연원은 한참 거슬러 올라간다
4세기 우다야기리―현재 네팔의 오른쪽―의 힌두 사원에 찬드라굽타 2세가 세운 철기둥을
10세기 토마라 왕조의 아낭팔 왕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다양한 벽돌이 모인 담
글씨를 읽을 줄은 모르지만 산스크리트어, 페르시아어, 우르두어, 아랍어 등 각종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가까이서 본 알라이 미나르
거대한 고목이 묵묵히 곁을 지키고 있다
그렇지만 어느 도시를 가도 보이는 자마 마스지드는 늘 크고 화려하다. 어쩌면 오늘날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의 씨앗은 신에 대한 숭배가 극단적으로 변질된 결과가 아닌가 싶다.
또한 인도의 3대 종교라는 힌두교, 이슬람교, 시크교의 사원들을 둘러보며 느낀 것이기도 하다. 힌두교 건축의 백미라는 카주라호의 사원들, 이슬람교 건축의 끝을 보여준 타지 마할, 끝으로 시크교의 메카인 암리차르의 황금사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성한 공간인데 과연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 믿음이 누군가의 삶을 망가뜨린다면 과연 그 믿음이 올바른 것일까? 특히 신앙생활에 익숙한 인도인들을 보다 보면, 그들이 종교생활에 공을 들이는 대신 조금만 더 경제에 힘을 쏫는다면 국민의 삶이 훨씬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었다. 길에 버려진 아이들, 부모의 부추김으로 앵벌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견학 나온 학생들
수목 사이로 보이는 꾸뜹 미나르의 실루엣
이제 꾸뜹 미나르와 모스크를 떠날 시간
어쨌든 상념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오늘은 출국일이었고 함께 동행했던 X, Y와 오후에 악샤르담 사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꾸뜹 미나르는 첨탑 뿐만 아니라, 주변의 경치도 아름다웠다. 견학을 나온 어린 학생들도 많이 보였다. 내국인에게는 30루피 하는 입장료를 500루피씩이나 내고 들어왔는데, 1시간 반 남짓 둘러보고 나가려니 아까운 생각도 들었지만,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렌즈 하나 들이댔을 뿐인데 다들 내게 반갑게 손을 흔든다
동떨어져 홀로 앉아 있던 어여쁜 소녀..
왜 친구들이랑 놀지 않고..ㅠ
수건 돌리기 비슷한 게임을 하는 학생들
꾸뜹 미나르에서 악샤르담까지 이르는 거리는 상당하다. 원래는 노랑 노선을 타고 가다가 만다이 하우스에서 파랑 노선으로 갈아탈 생각이었는데, 생각을 바꾸어 중간 지점에 있는 로터스 템플을 잠시 들르기로 했다. 바하이 사원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힌두교의 일파인 바하이교에서 지은 사원이다. 이름에 걸맞게 사원은 연꽃 모양을 하고 있는데, 색이나 형상이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를 연상시킨다. 건물 내부까지 들어가봤는데, 내부는 조금 커다란 성당 같다. 평범하다. 생각보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았는데, 아마 패키지 관광을 온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들를 필요는 없을 것 같은 사원이었다. 여하간 수도 델리에 바하이교의 가장 큰 사원인 로터스 템플이 위치해 있는 것을 보면, 인도를 '신들의 나라'라 부르는 것도 과언은 아니다.
외관을 보고 우와~ 했지만 그 뿐이었던 바하이 사원
이란과 인도를 중심으로 5백만 명의 신도를 거느린 제법 큰 종교―시아파 이슬람의 분파―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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