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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제임스 A. 미치너 / 열린책들>
커다란 이상 현상들을 생각해 봅시다. 멕시코에는 그들의 영웅인 코르테스의 동상이 없습니다. 스페인계와 인디언들이 그를 자신들의 이익에 대한 반역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그들의 위대한 아들 잰 크리스천 스머츠의 기념관이 없습니다. 보어인들은 그가 제2차 대전 중 영국인들에게는 구세주였지만 보어인들의 이익에는 반역자라고 믿고 있습니다. 여기 미국에서 금세기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 누구일까요? 프랭클린 루즈벨트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겠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그의 기념비를 건립한다고 하면 허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결정권을 쥐고 있는 보수주의자들이 그걸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서민의 편에 섰던 루즈벨트를 자기 계급의 반역자라고 알고 있는 겁니다.
예술가는 위대한 정치 지도자와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속한 계급을 거부하고 당면한 문제, 현대의 계명에 정신을 쏟습니다. 그러면 기존 체제는 그들을 혐오하고 그들의 행위를 반역이라고 낙인을 찍습니다.
이 소설의 구성은 조금 독특하다.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 순으로 4개의 장이 소설을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 소설의 제목 자체가 <소설>이다. 책을 집어들기도 전부터 왠지 현학적 냄새가 풍기는 이 책을 읽을지 말지 잠시 망설였다. 결국은 책을 읽었으니 이처럼 포스팅을 남기지만,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네 개의 장(章)은 서로 다른 직업을 지닌 인물들을 다루고 있지만, 하나의 스토리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을 하나의 스토리로 묶어주는 공통분모는, 소설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책"이다. 그런데 책에 관여하는 접근법이 네 사람 모두 다를 수밖에 없는 직업에 있기 때문에, 각각의 장(章)이 다루는 주제의식 또한 조금씩 차이가 난다.
작가 루카스 요더
아만파와 메노파간의 문화적 차이를 소설의 주제로 삼은 루카스 요더는 전형적인 대기만성(大器晩成)형 작가다. 연작의 네 번째 작품인 「파문」이 세간의 이목을 이끌기 이전까지, 미국인의 어느 누구도 펜실베니아의 조그마한 독일인 사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만파와 메노파라는 생소한 종파간 갈등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루카스 요더는 자신이 소속된 독일인 지역사회의 일상(日常)을 소설로 승화시키고 독자의 관심을 환기하는 데 성공한다. 이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이 뿌리내린 사회 또는 지역, 국가에 천착(穿鑿)할 때에 가장 빛을 발하는 글이 탄생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 이본 마멜
루카스 요더가 꾸준히 집필에 몰두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독려하고 보조해주는 인물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루카스 요더는 독일계 미국인인 반면, 이본 마멜은 유대계 미국인이라는 점이다. 이들의 아이러니한 관계는 미국의 위대한 시인이자 파시스트였던 에즈라 파운드라는 인물의 에피소드를 거치면서 더욱 미묘한 양상을 띤다. 독일인(루카스 요더)은 나치스를 옹호한 파시스트로서의 에즈라 파운드를 폄훼하는 반면, 유대인(이본 마멜)은 오히려 예술가로서 개척정신을 제시한 에즈라 파운드에 동조하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여하간 두 번째 장에서는, 작가가 자신만의 세계에 함몰되지 않도록, 그리고 대중에게 읽힐 수 있는 책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중개자로서의 편집자 이본 마멜이 잘 묘사되어 있다.
비평가 칼 스트라이버트
<예술가는 보통의 삶을 살 수도 없고, 살아서도 안 되는 창조적인 인간이다. 그는 자기 자신처럼 믿을 수 있는 자신의 친구들에게서 본질적인 것을 찾아내야 한다. 예술가의 임무란 사회에 신선한 충격과도 같은 또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신랄한 그 사회의 초상을 그려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의 최고의 선, 즉 한 인간의 척도가 되는 행위란 친구에 대한 충직성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친구들에게 내보일 수 있는 신뢰감이 바로 선이다.>
「칼, 내가 자네의 그 말을 고쳐 주어야겠네. 우린 엘리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네. 그러나 우리는 본디 재능은 없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엘리트가 되는 그런 보통사람들에 관해 <써야> 하네.」
루카스 요더와 마찬가지로 그렌즐러―펜실베니아의 독일인 거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비평가로서 칼 스트라이버트가 문학이라는 예술에 지닌 관점은 조금 다르다. 그는 대학 시절 우연한 기회에 반년간 객원교수로 머물렀던 옥스포드의 데블런 교수를 뮤즈로 삼게 된다. 이 둘은 E.M.포스터라는 소설가―영국의 대표적 소설가이자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이중첩자로 활동한 인물―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인다. 데블런 교수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예술가라면 민족, 국가, 사회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최첨단에서 예술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기꺼이 같은 길을 동행해줄 친구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20대의 칼 스트라이버트에게 데블런의 대담한―또는 급진적이기까지한―이 발언은 엄청난 충격이었고, 이후 칼은 데블런의 가르침을 비평가로서 소설을 평가하는 지침으로 삼는다. 일견 엘리트주의적으로 들리는 이 표현은 그러나, 후술(後述)되다시피 독자(일반대중)와 괴리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설령 당장에 형편없는 평가를 받을지언정 한 세대를 앞서가는 혜안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각성(覺醒)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독자 제인 갈런드
네 번째 장은 이전까지 등장했던 인물들과 사건들이 결말을 맞이하는 장으로서, 독자로서 제인 갈런드에 대한 묘사가 충분하지는 않다. 특이한 점은 유달리 이 장은 일기 형식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제인 갈런드 역시 펜실베니아 독일인 거주지역의 유지(有志)로서 평소 열렬한 애독가이자, 지역의 예술 후원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온 인물이다. 그녀의 손자 티모시 툴이 글쓰기에 두각을 나타내면서 앞서 소개된 세 명의 인물과 인연을 맺게 되고, 한 권의 책이 탄생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바람직한 소설은 무엇인지, 작가정신이란 무엇인지, 본인이 시와 소설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맺는 말
참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가 한꺼번에 등장하는 소설이라니,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구성이다. 책의 말미에 옮긴이 윤희기 氏가 해럴드 블룸의 『어떻게 읽고 왜 읽을 것인가』라는 글을 인용하여 쓴 해설도 꼼꼼히 읽었다. 꼭 제임스 A. 미치너의 글이 아니라도 어느 독서에든 통용될 수 있는 해설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표현은 독서가 자율적인 자아로 나아가는 고독한 실천(Solitary Praxis)이라는 말이었다. 한동안 책읽기에 소홀했었는데, 다시금 독서에 의지를 불어넣어준 뜻깊은 작품이었다.'일상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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