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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살인(이동하는 메타포 篇)일상/book 2017. 5. 29. 13:35
「最近になって思うようになたの」とユズは言った。「私が生きているのはもちろん私の人生であるわけだけど、でもそこで起こることのほとんどすべては、私とは関係のない場所で勝手に決められて、勝手に進められているのかもしれないって。つまり、私はこうして自由意志みたいなものを持って生きているようだけれど、結局のところ私自身は大事なことは何ひとつ選んでいないのかもしれない」
<기사단장살인>의 첫 편 「드러나는 이데아」 편을 본 뒤, 다음 편을 봐야할지 좀 고민스러웠다. 다음 편을 보지 않자니 찝찝하고, 그렇다고 「드러나는 이데아」 편이 딱히 인상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어로 책을 읽는 것은 우리말로 된 책을 읽는 것보다 아무래도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큰 맘(?) 먹고 봤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기사단장살인>이라는 이 책은 끝까지 읽어봐야 안다는 것이다. 다행히 「이동하는 메타포」 편은 전편보다 훨씬 흡입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해하기 쉬운 소설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상실의 시대」, 「1Q84」,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 「애프터 다크」, 「코끼리의 소멸(단편집)」.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이 정도 읽었는데, 확실히 최근의 작품으로 올수록 주제나 스타일이 바뀌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유달리 은유가 많다보니, 해설을 따로 읽지 않고서는 가타부타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아어(雅語)가 많이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게 어떻게 번역되어 나올지도 궁금하다.
난징대학살(연출 장면)
1. 주제
A. 아픔과 치유(治愈)
일단 내가 이 작품에서 추려낸 첫 번째 주제는 "아픔과 치유"다. 소설 속 아픔에는 크게 두 가지가 등장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역사적 아픔, 둘째, 자연재앙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일본군의 난징대학살(100페이지 전후)을 비중 있게 다룬다. 이는 <기사단장살인>이라는 일본화(日本畵)가 탄생한 계기가 되기도 하고, 반드시 매듭지어야 할 과제로 묘사되기도 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또한 소설 속에는 '나'가 2~3개월 가까이 도호쿠(東北) 지방을 정처없이 여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오모리, 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 현은 2011년 당시 쓰나미의 직격탄을 맞은 지역이다. 처음에는 왜 주인공이 다른 곳도 아닌 이 지역을 여행할까 의문스럽기도 했는데, 소설의 후반부에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언급이 잠시 등장하면서 무라카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일부를 이룬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대해서는 앞선 포스팅에서 언급했다
B. 시공간 그리고 개연성
앞선 포스팅에서도 언급했지만, 주인공은 집근처의 수풀 사이의 사당을 파헤쳐 커다란 구덩이를 만든다. 그리고 이 묘령의 구덩이는, 앨리스가 마주한 원더랜드처럼 새로운 세계의 고리(環わ)를 만들어낸다. 묘령의 구덩이를 파헤친 이후로, 주인공 '나'의 주변에는 이해하기 힘든 일련(一連)의 사건이 계속된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시공간을 뛰어넘은 사건들이 이어지고, 이는 작품 전체에 환상성을 불어넣는다.
플라톤의 동굴 우화는 이데아에 대해 보기 쉽게 설명한다
C. 이데아와 메타포
그렇다면 무라카미가 말하는 "개연성"이란 무엇일까? 소설의 부제(副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顕れるイデア」, 「遷ろうメタファー」가 한국어로 정확히 어떻게 번역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이 소설은 이데아와 메타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추상적이고 완전무결한 이데아에 구체적인 형상(形狀)을 불어넣는 것은 메타포의 역할이다. 주인공 '나'가 이데아를 죽이고 구덩이 저편에서 사흘을 보내는 동안, 그의 무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던 메타포들은 그에게 길을 빠져나올 수 있는 "개연성"을 부여한다.
궁금한 점은 "기사단장을 살인하는 행위"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점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세계는 이데아를 본뜬 것에 불과하다. 거꾸로 말하면 이데아라는 본보기가 있음으로 인해 인간세계는 비로소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라카미는 소설 속에서 "기사단장(이데아)"를 제거해 버린다. 이 역시 '치유'의 한 방법인 것일까? 아니면 군국주의의 구태(舊態)를 벗어던지는 행위로 볼 것인가?
모차르트의 오페라 中 돈나 안나와 돈 죠반니
2. 인물에 대한 해석
A. <기사단장살인>을 중심으로
가능하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작중 작품인 <기사단장살인>을 중심으로 간단히 도식화 해보고자 한다.
기사단장 : "이데아"
돈 죠반니 : "이데아"에서 "메타포"로 이행하는 매개체(소설 속에서는 '나'가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돈나 안나 : 돈 죠반니의 안내자(소설 속에서는 '코미치('나'의 여동생)' 또는 '아키가와 마리에'로 대치될 수 있는 인물이다)
카오나가(顔長) : "메타포"
이중 메타포???
여기서 여전히 궁금한 것은 "이중 메타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이다. '카오나가'는 메타포의 세계로 진입하려는 '나'에게 '이중 메타포'를 꼭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이중 메타포를 말 그대로 풀이하자면 메타포에 메타포가 덧씌워진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정확히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겉으로 드러난 형상(메타포) 이면에 감춰진 위험성(또 다른 메타포)'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데, 소설 속에서는 '멘시키(免色)'라는 인물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색을 띠지 않는다'는 수상한 의미의 이름을 가진 이 사나이(멘시키)는 결점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인물로, 그가 의중에 계획하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헤아리기 어려운 인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B. 소설 속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 '나' vs. '멘시키'
'나'와 '멘시키'는 부지불식간에 동업자 관계를 맺은 사이인 동시에, 여러 면에서 대척점에 놓인 인물들이기도 하다.
멘시키는 '나'와 대화하면서 종종 '나'를 부러워하곤 한다. "나는 손에 넣고자 하는 것은 다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렇지만 달리 말해 나는 내가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만을 원한다" 과연 멘시키는 부족할 것이 없어보이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에게는 결핍된 것이 분명 있다. (결벽성 때문에 다른 사람과 함께 생활을 하지도 못하고, 확률이 100%에 이르지 않는 이상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반면 '나'는 그 반대다. 평범하다. 대단할 것이 없다. 그렇지만 시간과 공간사이에 개연성을 불어넣는 막중한 인물은 그에게 주어진다. 그는 확률이 70%이든 30%이든 개의치 않고, 자신의 마음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꿋꿋이 걸어가는 인물이다.
잡목림의 구덩이를 팔 때 '나'와 '멘시키'는 서로 합심했다. 그러나 그 구덩이의 끝에 서로 발견한 '길'은 달랐다.
'멘시키'와 '나'의 차이는 540페이지에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멘시키는 '믿음'과 '불신'의 진폭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인물이다. 반면 '나'는 그런 저울질 따위는 하지 않는다. '믿음'의 힘을 전적으로 믿고 설령 그것이 황량한 광야일지언정 그 광야에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인물이다.
소설의 주된 소재가 '초상화'이다보니 고흐의 초상화를 넣어보았다
3. 소설 속 미술작품에 대한 해석
이 부분에 대해서도 우선 간단히 도식화 해보고자 한다. 소설 속에는 총 다섯 개의 미술작품이 등장한다.
「기사단장 살인」 : 이 소설의 가장 중심이 되는 작품. 신구(新舊)의 대결로 보이기도 하고 이데아와 메타포의 대결로 보이기도 한다
「멘시키의 초상화」 : '나'가 멘시키라는 인물과 만나는 계기가 되는 작품. '나'는 멘시키라는 인물을 알아갈수록 자꾸 이상한 일에 휘말린다
「마리에의 초상화」 : 끝내 미완성으로 남게 된 작품. 미완성은 미완성 나름으로 앞으로 채워나갈 여지가 있다는 데 방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잡목림 속의 구덩이」 : 멘시키와 함께 파내려간 구덩이를 그린 정물화. 나중에 멘시키에게 이 작품을 선물한다.
「하얀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 : 도호쿠 지방 여행중 마주친 묘령의 사나이를 그린 초상화. '나'와 '마리에'만이 이 작품을 '읽을' 수 있다. 소설 속에서는 '이중 메타포'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4. 맺는 말
책 리뷰를 이렇게까지 자세히 하는 편은 아닌데, 원서로 읽다보니 가능하면 정확한 기억으로 남기고자 느낌을 구체적으로 적어보았다.
그래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일본문학을 잃다 보면 과연 그 치밀한 구성에 혀를 내두를 때도 있지만, 늘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국의 역사적 과오(過誤)에 대해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적고 있는 점, 후쿠시마 원전사고라는 새로운 수준의 자연재앙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점은 물론 흥미롭다.
다만 아쉬운 점은 해결책이 소극적이라는 점이다.
'나'는 뜻하지 않게 새로운 세계의 고리(環わ)에 들어섰다. (앨리스가 원더랜드에 떨어진 것처럼 말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몰랐던 역사를 알게 되었고, 삶의 의미를 추궁하였다. 그런데 마침내 그 '고리(環わ)'에서 빠져나왔을 때, '나'는 마리에와 함께 그 고리를 닫아버리기로 결심한다.
인류가 겪은 상처(나치의 유대인 학살, 일제의 식민지배, 인간이 초래한 자연재앙)에 대한 강력한 '해결의지'보다는 이를 초탈한 '애매모호한 자아'가 강조된다. 내가 읽은 바로는 그렇다. 때로는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거시적 차원의 사건'들이 벌어지고, 이에 '개인'은 좌절하고 무력감을 느낀다. 그러나 초월적 태도가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물론 삶의 한 방편이 될 수는 있다.
내게는 다시 한 번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이 떠올랐다. 친구를 배반했다는 사실에 괴로워 하던 주인공은 결국 삶과 죽음 사이에서 후자를 택한다. 소설 속에 그 깊은 사연이 자세하게 나와 있지만, 어떤 면에서 참으로 소극적인 해결책이다. 마찬가지로 무라카미의 「기사단장살인」에도 이와 비슷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다는 그 어려운 결정이 과연 어떤 '방향'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을까.
'나'와 마리에가 그 고리를 닫아버림으로써 혼란은 일단락된다. 하지만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역시 원천봉쇄되어 버리고 만다. 아니면 무라카미는 그저 우리 자신에 대해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던 것일까. 그런 메시지를 이렇게까지 에둘러 말한 것일까.
소설의 뒤로 갈수록 재미있게 책을 읽었지만, 여러모로 되짚어볼 거리를 던져 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