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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가 내리던 저녁일상/book 2017. 7. 17. 01:02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창비>
그는 스스로를 경멸하고 업신여기는 데에는 자기가 첫째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스스로를 경멸하고 업신여기는 데에는 첫째가는 사람이라는 말에서 앞부분을 제외하면, '첫째가는 사람'이라는 말만 남으니 자기가 이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도 첫째가는 사람이 아닌가?
누가 그랬다. 어떤 승리자는 적이 호랑이나 독수리 같기를 바라는데 그래야 승리의 기쁨을 느낄 수 있어서다. 반대로 적이 양이나 병아리 같다면 승리가 재미없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승리자는 모든 것을 이겨낸 뒤 죽은 사람은 죽고 항복한 사람은 항복하여 "신은 실로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하여 더이상 적이 없고 상대도 없고 친구도 없어져서 자기 혼자만 남았을 때, 혼자서 외롭고 적막하고 처량해질 때 도리어 승리의 비애를 느낀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아Q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영원히 우쭐거렸다. 그것은 아마도 중국의 정신문명이 세계에서 최고라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원래는 간쑤성을 여행할 때 챙겨갔던 책인데, 지난 2주간 연수를 받으면서 가까스로 완독했다. 이전에 모옌의 <개구리>라는 작품을 읽다가 말았으니, 중국문학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셈이다.
단편집에는 루쉰의 <아Q정전>과 <고향>을 비롯해 작가 8명의 서로 다른 작품 아홉 편이 실려 있다. 한국 근대문학과 꽤 상통하는 부분도 있어서,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우리나라 근대소설을 읽는 기분으로 중국문학을 읽었다.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겪은 후 '우리가 자랑하던 중화문명이란 무엇인가?'하는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하는데, 문학계에서는 이러한 고민이 사실주의와 낭만주의의 두 갈래 양식으로 나타난다.(그런 점도 우리 문학과 비슷하다)
이들 아홉 작품 가운데, 개인적으로 낭만주의 경향을 띠는 스져춘의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 같은 작품보다, 사실주의 경향을 지니는 마오뚠의 <린 씨네 가게>와 라오셔의 <초승달>을 감명 깊게 읽었다. 물론 단편집의 서두를 열어주는 루쉰의 두 작품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들 사실주의적 작품들은 일제의 침략과 지주의 수탈에 대해 자조적인 목소리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중국문학에서 특기할 만한 부분은, 일제통치 뿐만 아니라 자국의 통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라는 점이다. 한국 근대문학에서 일제의 수탈에 따른 시민들의 비참한 일상이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면, 중국문학에서는 이에 더하여 1930년대 국민당의 폭정에 대한 비판이 함께 한다. 예컨대 루쉰의 <아Q정전>에서 소일거리도 구하지 못한 채 아둔한 사고에 빠져 살아가는 '아Q'라는 인물이나, <린 씨네 가게>에서 지주와 부패한 관료의 결탁으로 갱생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는 '린 씨 가족'은 당시 중국에서 횡행하던 잘못된 정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게 한다.
그밖에 중국 내의 소수민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20세기 초반의 어려운 시기에) 소재의 다양화를 꾀한 작가(션충원의 <샤오샤오>)가 있었다는 점 또한 인상적이다.
스스로를 중국(中國)이라 부르던 이들이 더 이상 중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을 때, 그 충격이 어느 정도였을지 어렴풋하게 떠올려 보았다. 오늘날 다시 한 번 대국굴기를 꿈꾸고 있는 중국. 21세기의 중국이 보일 행보를 이해하기 위해 좀 더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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