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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에서-맛, 공간, 사람일상/book 2017. 8. 11. 07:10
<레스토랑에서-맛, 공간, 사람 / 크리스토프 리바트 / 열린책들>
표면적으로 볼 때 파리의 초기 레스토랑은 시민 계층의 여론이 형성된 카페와 비슷했다. 사람들은 카페에서 만나 토론하고 논쟁을 벌였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교회나 궁정에서와는 달랐고, 엘리트들의 살롱과 아카데미, 또는 교양 있는 계층의 사교 모임과도 달랐다. 자기가 마실 음료나 음식 값만 지불할 수 있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고, 자유롭게 대화에 참여할 수도 있었다. 카페 안에는 신문들이 구비돼 있었고, 신문은 별다른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견을 공급했다. 토론에 개입해 논쟁을 끝내고, 지시를 내리는 권위자는 없었다. 분쟁이 있더라도 언젠가는 이성이 승리하고 결론이 날 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레스토랑은 카페와는 다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토론하려고 레스토랑에 가지는 않는다. 신문을 읽으려고 가는 것도 아니다. 레스토랑에 가는 이유는 원기를 회복하거나 자신의 예민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레스토랑의 테이블에 앉아 개인적인 선택을 한다. 그것은 중요한 정치 문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선택으로, 닭고기나 야생 동물, 소고기 부용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다. 레스토랑에서는 공과 사의 저울이 사적인 쪽으로 기울어진다. 파리의 카페는 한눈에 보이는 넓은 공간을 제공한다. 그에 반해 레스토랑에는 벽 속에 묻힌 자리들이 있다. 레스토랑은 시민 사회의 격렬한 논쟁을 위한 장소가 아니다.
장 폴 사르트르의 사고 구조에서 웨이터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웨이터는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기기만>, 즉 불성실을 대변한다.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속인다. 그는 초월성과 사실성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고, 그 두 가지 존재 방식의 차이를 모른다. 사르트르에게 <자기기만>의 <첫 번째 행위>는 도피할 수 없는 사물로부터의 도피이다. 너무 빠르고, 너무 기계적이고, 너무 웨이터처럼 행동하는 웨이터가 바로 그런 경우다. 그는 웨이터라는 존재의 놀이터로 도피한다. 그는 다섯 시에 일어나서 음식점 문을 열기 전에 바닥을 청소하고, 커피 머신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줄 안다. 또 자신이 팁을 요구할 수 있고 노동조합에 가입할 권리가 있다는 것도 생각할 줄 안다. 하지만 그는 웨이터라는 허구의 일부가 되었고, 자신이 자유롭고 자기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는 감정을 잃어버렸다.
1. 미식학(Gastronomy)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해 칼로리를 섭취하는 일이었다. 이런 식사 행위에서 '영양'보다 '맛'을 중요시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이른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맛에 대한 평가를 업(業)으로 삼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개인의 취향이 영향을 미치는 영역―가령 미술이나 음악처럼―에서 평가의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 늘 환영받는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맛 또는 요리 방식에 대한 선호는 꾸준히 변해왔다. 예를 들어 패스트 푸드에 대한 반작용으로 슬로우 푸드에 대한 관심이 증대한 것처럼. 또는 누벨 퀴진(Nouvelle Cuisine)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음식이 탄생한 것처럼.
음식의 맛에 높은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을 과거에는 미식가(Gourmet)라고 표현했다면, 오늘날에는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사람으로서 푸디(Foodie)라는 표현이 보다 대중적으로 쓰이고 있다. 이는 SNS의 도래와 함께 나타난 현상으로, 맛을 평가하는 영역이 더 이상 전문가의 몫이 아니라, 일반인들 또한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공간임을 의미한다.
2. 사회학(Sociology)
한 그릇의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무대 뒤에서는 요리사들의 협업으로 일사분란하게 각각의 재료들이 손질되는가 하면, 무대의 전면에서는 웨이터들이 공손한 태도로 완성된 음식을 실어 나른다. 최종적으로 레스토랑의 손님은 그들이 지불한 금액에 걸맞는 서비스를 향유한다. 그러나 손님들은 무대 뒤에서 정확히 어떠한 매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들이 시각적으로 인지하는 것은 완성된 음식일 뿐, 그 속의 재료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다듬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때문에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주방을 설계하는 것, 원산지의 출처를 명확히 강조하는 것은 레스토랑의 차별화 전략이다.
'감정노동'은 레스토랑의 생태계를 지탱하는 또 다른 축이다. 음식을 나르는 웨이터는 고된 육체노동에도 불구하고, 성심성의껏 예의바른 태도로 최종고객에게 음식을 전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몸동작을 익히는 수준의 연습을 넘어,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 하는 내면적 훈련이 요구된다. 내면화 과정에서 감정 노동자는 본연의 자아를 망각한다. 하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생존방식이 된다.
9.11 테러로 맨해튼의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을 때, 그 안에 있던 초호화 레스토랑의 웨이터들이 열악한 처우에 놓였다는 것은 또 다른 시사점을 던진다.
3. 기술(Technology)
4차 산업혁명의 도래와 함께 여러 전문직종이 도태될 것으로 예상된다지만, 요리만큼은 여전히 기계가 넘보기 힘든 영역이다. 보기 좋게 재료를 손질하는 일, 재료의 상태에 따라 조리하는 일, 불의 세기를 적당히 조절하는 일, 적당한 비율로 양념을 섞는 일, 완성된 음식을 보기 좋게 그릇에 옮겨 담는 일 등등은 기계가 수행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20세기 괄목할 만한 기계화가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맥도날드는 공격적인 프랜차이즈 확장을 위해 재료의 표준화를 추구했다. 일본의 한 요리사는 포드 사(社)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에 영감을 얻어, 회전초밥이라는 아이템을 개발해냈다. 이들 모두 조리방식이나 서비스 제공방식을 뒤엎은 혁신이었다.
나 자신이 푸디(Foodie)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요리 또는 구르메는 나의 관심사는 중 하나다. 잘 차려진 밥상 또한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요새는 진득히 책 읽을 시간이 많지 않다보니, 무거운 인문학 서적보다는 가볍게 읽을 만한 서적이 더 시선을 끄는 것 같다. 그렇기는 해도 내용이 결코 가볍지는 않았다. 책의 뒷면에 소개되기를 레스토랑에서 꺼내기 좋은 인문학적 지식을 다루는 책이라 쓰여 있었는데, 과연 요리와 관련된 흥미진진한 역사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에프소드별로 딱딱 정리되어 실린 것이 아니라, 쪼개진 여러 에피소드들이 뒤섞여 있어서 더욱 호기심을 갖고 읽을 수 있었다. 단순한 '미식' 또는 '음식' 이상의 인문학적 상식을 넓히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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