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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스완네 집 쪽으로 I일상/book 2017. 8. 20. 17:07
삶에서 가장 사소한 것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 인간은 마치 회계 장부나 유언장처럼 가서 보기만 하면 알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물질로 구성된 전체가 아니다. 우리의 사회적 인격은 타인의 생각이 만들어 낸 창조물이다. '아는 사람을 보러간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 아주 단순한 행위라 할지라도, 부분적으로는 이미 지적인 행위다. 눈앞에 보이는 존재의 외양에다 그 사람에 대한 우리 모든 관념들을 채워 넣어 하나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전체적인 모습은 대부분 그 사람에 대한 관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관념들이 그 사람의 두 뺨을 완벽하게 부풀리고, 거기에 완전히 부합되는 콧날을 정확하게 그려내고, 목소리 울림에 마치 일종의 투명한 봉투처럼 다양한 음색을 부여하여, 우리가 그 얼굴을 보거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발견하는 것은 바로 그 관념들인 것이다. p.42-43
이 추억, 동일한 순간의 견인력이 아주 멀리서 찾아와 내 깊숙한 곳으로부터 부추기고 움직이고 끌어올리려 하고 있는 이 옛 순간이, 내 선명한 의식의 표면에까지 이를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그것은 멈추었고 다시 가라앉은 모양이다. 그것이 언제 또다시 어둠 속에서 솟아오를지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열 번도 더 다시 시작해 보고, 그쪽으로 몸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온갖 어려운 일이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고개를 돌리게 하느 ㄴ저 비겁함이 이 모든 것을 그만두고 차나 마시며 별 고통 없이 되씹을 수 있는 오늘의 권태나 내일의 욕망만을 생각하라고 권고한다. p.89
내가 독서를 하는 동안, 안에서 밖으로 진리 발견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 중심적인 믿음 다음에 오는 것은, 바로 내가 참여하는 행동들이 주는 감동이었다. 그런 날들의 오후는 평생 동안 경험하는 것보다 더 많은 극적인 사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내가 읽고 있는 책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로, 그 사건들과 관계되는 인물들은 사실 프랑수아즈의 말대로 '실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 인물의 기쁨이나 불운에 대해 느끼는 감정도 모두 이런 기쁨이나 이런 불운에 대한 이미지의 매개를 통해서만 생겨나는 것이다. 초기 소설가들의 독창성은, 우리의 감동을 자아내는 장치 중 이미지가 유일하게 본질적인 요소여서 단지 실제 인물을 제거하는 단순한 작업만으로도 결정적인 완성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아무리 실제 인물과 깊은 교감을 나눈다 할지라도, 그 인물 대부분은 우리 감각에 의해 지각되고, 말하자면 우리에게 불투명하게 남게 되므로, 우리 감성으로는 들어올릴 수 없는 죽은 무게를 제공한다. 불행이 한 실제 인물을 휘몰아쳐도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불행에 대한 우리의 전체 관념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뿐만 아니라 그 인물 자신이 감동하는 것도 자신에 대한 전체적인 관념 중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가의 독창적인 착상은 정신으로서는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부분을 같은 양의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다시 말하면 우리 정신이 동화할 수 있는 부분으로 바꾸어 놓을 생각을 했다는 데 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유형의 존재들이 하는 행동이나 감동이 우리에게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해도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우리가 그러한 행동이나 감동을 우리 것으로 만들었고,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도 우리 마음속이며, 또 우리가 열정적으로 책장을 넘기는 동안 호흡이 빨라지고 시선이 강렬해지는 것도 바로 우리 마음에 달렸기 때문이다. 소설가가 우리를 이런 상태로 몰아넣으면, 다시 말해 우리가 오로지 내적 상태에 있게 되면 모든 감동은 열 배나 더 커진다. 소설가가 쓴 책은 꿈과 같은 방식으로, 그러나 우리가 자면서 꾸는 꿈보다 더 선명하고 더 오래 기억되는 꿈으로 우리를 뒤흔들 것이다. 소설가는 한 시간 동안 모든 가능한 행복과 불행을 우리 마음속에서 폭발시키는데, 실제 삶에서라면 그중 몇 개를 아는 데도 몇 년이 걸리며, 또 그중에서도 가장 격렬한 것들은 너무도 느리게 진행되어 우리 지각을 방해하기 때문에 결코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을 것도 있다. p.153-155
이제까지 나는 스완이 진지하게 자기 의견을 표현하기를 싫어하는 것이 뭔가 우아한 파리 사람답게, 할머니 자매들 같은 시골사람들의 독단적인 태도와는 대조를 이룬다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스완 씨가 드나드는 사단이 보여주는 재치의 형태로서, 전 세대의 서정주의에 대한 일종의 반동작용이며 과거에는 저속하다고 여겨 왔던, 하찬지만 정확한 사실들을 과도하게 복원함으로써 '미사여구' 사용을 금지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물들에 대한 스완의 이런 태도에서 뭔가가 거슬렸다. 그는 자기 의견 말하기를 꺼렸고, 소상하게 정확한 정보를 줄 수 있을 때에만 안심했다. 그러나 그런 행동 자체가 이미 세부적인 것의 정확함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정하고 말하는 태도를 드러낸다는 걸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 나는 이 모든 것이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사물에 대해 마침내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게 말하고, 자기 판단을 인용 부호 안에 넣치 않고 표현하고, 웃기는 짓이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까다로운 예의를 지키는 일에 전념하지 않는 태도를, 그는 도대체 어떤 다른 삶을 위해 남겨두는 것일까? p.177
내 소년 시절을 통해 메제글리즈가 이미 더 이상 콩브레 토양과는 닮지 않은 땅의 기복 탓에 멀리 가면 갈수록 시야에서 사라지는 지평선처럼 접근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면, 게르망트는 현실적이라기보다는 관념적인 것으로, 그 '길'의 종점과도 같은, 적도나 극지방, 혹은 동양처럼 일종의 추상적이고 지리적인 표현이었다. 까라서 메제글리즈로 가기 위해 '게르망트를 통해서 간다든가' 그 반대로 하는 것은, 마치 서쪽으로 가기 위해 동쪽을 통한다고 하는 말만큼이나 아무 의미 없이 들렸을 것이다. 아버지는 늘 메제글리즈 쪽은 아버지가 보아 온 것 중 가장 아름다운 평원의 풍경이며, 게르망트 쪽은 전형적인 냇가 풍경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는 그 두 길을 서로 다른 두 실체로 간주하며 오로지 정신적인 창조물에만 속하는 일관성과 통일성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두 길 중 어느 한 길의 작은 부분도 내게는 아주 소중했고, 그 길의 특별한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한편 이런 것들에 비하면, 어느 한쪽의 성스러운 땅에 도착하기까지의 평원의 관념적인 풍경이나 내의 관념적인 풍경 가운데 놓인 순전히 물질적인 길들은, 마치 연극에 반한 관객 눈에 비치는 극장에 인접한 골목길들과 마찬가지로, 바라볼 가치도 없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나는 이 두 길 사이에 킬로미터가 나타내는 거리감 이상의 것을 두고 있었는데, 그 거리감은 내가 그 길들을 생각할 때 내 머릿속 두 부분 사이에 놓인 거리감 같은 것으로, 단지 멀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분리하고 각각 다른 차원으로 집어넣는 그런 정신적인 거리감이었다. 그리고 그 경계선은 우리가 같은 날 같은 산책길로 한 번은 메제글리즈, 다른 한 번은 게르망트 쪽 하면서 결코 두 방향으로 동시에 간 적 없는 습관 때문에 더욱더 절대적인 것이 되어, 두 길은 멀리서 서로 알아보지 못한 채, 여러 다른 오후들을 소통이 안 되는 밀폐된 항아리 안에 가두고 있었다. p. 238-239
때로 고독이 주는 열광에, 그와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 또 다른 열광이 겹쳐졌는데, 그 열광은 내품에 안길 어떤 농부 아가씨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는 걸 보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이 욕망은 여러 다양한 상념들 가운데서도 그 원인을 정확하게 캐 볼 틈 없이 갑자기 생겨났으므로, 욕망을 동반하는 쾌락도 여느 상념이 주는 쾌락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그때 나는 이런 새로운 감동으로, 내 정신 속에 있는 모든 것들, 이를테면 기와 지붕이 반사하는 분홍빛이나 무성한 잡초들, 오래전부터 가고 싶어 했던 루생빌 마을, 그 숲의 나무들, 성당 종탑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감동을 불러일으킨 것이 바로 그런 사물들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 사물들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고, 그 감동이 내 돛을 미지의 힘찬 순풍으로 부풀리면서, 나를 그쪽으로 보다 빨리 날라다 주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여인이 나타났으면 하는 욕망이 자연의 매력에 뭔가 더 열광적인 것을 덧붙여 주었다면, 반대로 자연의 매력은 여인의 매력이라는 지나치게 한정된 매력을 더 풍부하게 해 주었다. 나무의 아름다움은 곧 여인의 아름다움이었고, 그녀의 입맞춤이 지평선의 영혼과 루생빌 마을의 영혼, 내가 그해 읽은 책들의 영혼을 내게 넘겨줄 것만 같았다. 내 상상력은 관능적인 것과 접촉하면서 힘을 얻었고, 관능적인 것은 내 상상력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어 내 욕망은 이제 끝이 없었다. p. 272-273
그녀(뱅퇴유 양)의 행동에서 죄악이라고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다른 사람 눈에 가려 있었으며, 스스로도 악을 행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그녀 자신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겉모습 너머로 뱅퇴유 양의 마음속에 있는, 적어도 초기 단계의 악에 아마도 불순물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 같은 사디스트는 악의 예술가이지, 완전무결하게 악한 사람과는 다르다. 완전한 악인은 악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이어서 그 자신과 잘 구별되지 않는다. 그리고 미덕이나 고인에 대한 기억, 자식으로서의 부모에 대한 사랑을 찬미하지 않는 이상 그것들을 모독하는 데서 오는 불경한 기쁨도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뱅퇴유 양 같은 사디스트들은 아주 감상적이고 천성적으로 고결해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관능적인 쾌락마저도 뭔가 사악한, 악인의 특권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들이 잠시 관능적인 쾌락에 탐닉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것도 사실은 잠시나마 그들의 소심하고도 다정한 영혼으로부터 탈출했다는 환상에 빠지려고, 악인의 껍질을 쓰고 공범자와 함께 쾌락의 비인간적인 세계로 들어가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탈출에 성공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면서, 나는 그녀가 정말로 탈출을 열망했음을 알게 되었다. p. 284-285
때로는 한 조각 풍경이 오늘날까지도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홀로 떨어져 나와, 내 상념 속에서 꽃이 만발한 델로스 섬처럼 불확실하게 떠돌아다니지만, 나느 그것이 어떤 나라, 어떤 시대에서 왔는지 말할 수 없을 때가 있다. 하지만 나는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을, 내 정신적인 토양의 깊은 지층으로, 아직도 내가 기대고 있는 견고한 땅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 나느 사물들을, 존재들을 믿었다. 내가 이 두 길을 돌아다니며 알 게 된 사물들이나 존재들만이 아직도 내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아직도 내게 기쁨을 주는 유일한 것이다. 창조주에 대한 믿음이 내 마음속에서 고갈된 탓인지, 아니면 현실이란 기억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서 그런 건지, 오늘 처음으로 내 눈에 보이는 꽃들은 진짜 꽃처럼 보이지 않는다. 라일락, 산사꽃, 수레국화, 개양귀비, 사과나무가 있는 메제글리즈 쪽과, 올챙이가 헤엄치는 냇가와 수련과 금빛 미나리아재비가 있는 게르망트 쪽은 내가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고장의 모습이었다. …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은 내게 여러 다른 인상들을 동시에 느끼게 했으므로, 아마도 그 인상들은 결코 따로 떼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하나가 되어 훗날 내게 많은 환멸을 맛보게 했고, 또 많은 과오를 범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 그러나 또한 그 때문에 오늘날 내가 받는 인상들 가운데에는 이 두 길과 연결되는 인상들이 언제나 존재하며, 그 인상들에 토대와 깊이를 주어 다른 인상들보다 더 높은 차원을 부여하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이 두 길은 그 인상들에게 대해 나만이 아는 어떤 매력이나 의미를 덧붙인다. 여름날 저녁 잔잔하던 하늘이 갑자기 짐승처럼 으르렁거려 사람들이 이런 폭우를 원망할 때면, 나는 메제글리즈 쪽에 홀로 머무르면서 비 내리는 소리 너머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오래 지속되는 라일락 향기를 들이마시며 황홀해 한다. p. 316-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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