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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사랑/드라마/프랑수아 오종/클로에(마린 벡트), 폴 메이예·루이 들로르(제레미 르니에르)/107>
프랑수아 오종의 이름은 많이 들어보았어도, 그의 작품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언뜻 제목만 봐선 <퐁뇌프의 연인들>처럼 낭만적이면서도 격정적인 로맨스 영화가 아닐까 기대했지만, 오히려 기괴하고 엽기적이기까지 한 영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프랑스적인 영화였고, 이때 프랑스적이라 함은 정신분석학 관점에서 욕망에 대해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연 라캉의 철학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PAUL MEYER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상징들과 기호를 어떻게 대응시켜야 할지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영화는 클로에라는 신경증 환자가 정신분석 상담을 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녀는 수시로 복통을 느끼거나 꿈에 시달리는데, 존재하지 않는 그녀의 여동생이 있다는 착란에 빠지거나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때 폴 메이예라는 의사의 상담기법이 상당히 특이한데,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다. 클로에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을 뿐이다. 클로에는 자신의 고충을 기탄없이 늘어놓고, 점차 병세가 호전된다. 그리고 이 둘의 관계는 환자와 상담자에서 연인으로 발전한다;;
건강을 되찾은 클로에는 어느 미술관에서 전시요원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이때 전시회의 주제가 잠시 비치는데 바로 <Flesh>다. 순백색의 전시실 벽면을 메우고 있는 것은 살코기를 연상시키는 선분홍색의 색조들 또는 형이상학적 이미지들이다. 중간에는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들을 연상시키는 고깃덩어리들이 허공에 걸려 있는 모습이 등장하기도 한다. 요원답게 검은 정장을 차려 입은 클로에가 거대한 전시실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데, 마치 그녀가 겪고 있는 분열된 욕망이 혼재하는 공간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여하간 그녀는 폴 메이예와 평범한 연애를 시작한다. 안정적으로 발전해가는 듯하던 이 둘의 관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 것은 다름 아닌 클로에가 기르는 고양이 '밀로'에서 기인한다. 폴 메이예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며칠간 이웃에게 맡겨 두었던 '밀로'의 행방이 묘연해진다. 폴 메이예와 클로에가 함께 있는 모습을 집요하게 응시하던 '밀로'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클로에는 어느 순간 다시 복통과 악몽에 시달리며,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한다.
LOUIS DELORD
일을 마친 후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날, 클로에는 낯선 여자와 대화 중인 폴 메이예를 목격한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폴 메이예에게 일란성 쌍둥이인 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상냥하고 신사적인 폴 메이예와 달리 루이 들로르의 말투나 태도는 음험하고 오만하기까지 하다.
라캉의 철학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욕망하는 대상을 소유할 수 있다고 착각할 뿐, 욕망을 완벽히 충족시킬 수는 없다. 클로에는 폴 메이예에게서 향유할 수 있는 쾌락이 부족하다고 여긴 것일까. 클로에는 똑같은 기표(記表;signifiant)를 앞에 두고 색다른 기의(記意;signifié)를 갈망하기 시작한다. 즉, 같은 외모의 쌍둥이 형제에게서 반대지점에 놓인 색다른 욕망을 발견해 나간다.
공교롭게도 동생 폴 메이예와 달리, 형 루이 들로르는 고양이와 친하다. 그가 아끼는 수컷 고양이는 얼룩무늬를 하고 있는 희귀종으로, XXY 유전자를 타고 난 것으로 소개되는데, 생물학적으로 풀어 말하면 배아세포가 일란성 쌍둥이로 분열되는 과정에서 어느 한 세포가 다른 세포에 비정상적으로 결합하면서 발현되는 증상이라고 한다. (실제로 삼색 얼룩을 지닌 수컷고양이는 10,000마리 중 한 마리 꼴로 무척 드물다고 한다)
자신이 채택한 상담법은 동생의 것과 판이하다고 말하는 들로르의 상담원칙은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병으로 나타난다'는 것. 10,000분의 1의 확률로 태어난 고양이와, 판박이 같은 외모에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형제. 심리적 불안정에 시달리는 클로에는 이 둘 사이에서 과연 어떤 선택으로 어떤 변화를 만들어 갈 것인가.
CHLOÉ
<두 개의 사랑>은 영화로는 드물게 실험적인 편집기법을 사용한다. 화면을 두 개로 분할하여 각각 다른 장면을 보여준다든가, 서로 다른 두 화면을 수초 동안 오버래핑하는 것이 그것이다. 정면을 바라보는 클로에와 측면을 바라보는 클로에를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감독은 그녀가 지닌 이중적인 욕망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또한 씬 간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오버랩 기법은 관객이 현재 바라보는 장면이 클로에의 꿈 속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게 만든다.
더불어 영화에는 극중인물들이 거울 앞에 놓인 상황이 매우 자주 등장한다. 이 역시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핵심을 이루는 거울 이론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라캉의 거울 이론에 따르면, 거울 앞에 서 있는 아이는, 자신의 몸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데 반하여, 거울에 비친 이미지 상으로는 통일된 형상의 몸을 눈으로 인식한다. 눈으로 감각되는 현실세계(거울 속 이미지; 상징계)와 개인이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자기자신(거울 속 모습과 달리 외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자아의 불완전함; 상상계) 간의 괴리는 개인의 ‘욕망’을 부추긴다.
달리 말해, 아이가 거울을 바라보는 단계에서 상징계는 상상계보다 우위에 있다. 왜냐하면 상징계는 상상계보다 한 발 앞서 개인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불완전한 자신의 몸보다 완결된 형태로서 몸의 이미지를 거울에서 먼저 발견한다. 이러한 괴리에서 발생하는 결핍으로 인해 개인은 두 세계간의 간극을 좁히고자 하지만―욕망하지만―상징계는 상상계보다 늘 한 발 앞선 우위에 서 있다. 때문에 영화의 끝에, 어둠 속 유리창을 클로에가 응시할 때에 클로에의 이미지를 비추던 검은 유리창이 산산조각나는 장면은 마침내 클로에의 욕망이 완벽하게 해소되는 순간, 또는 욕망하는 주체로서 클로에라는 존재가 소멸하는 순간이라 할 수도 있다.
프랑수아 오종-마린 벡트-제레미 르니에르
Jumeau et deux valeurs
쌍둥이 형제와 사랑의 줄타기를 한다는 기묘한 설정을 통해 프랑수아 오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루이 들로르의 강박적인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클로에는 극단적인 결정을 택한다. 그녀는 루이 들로르를 제거하기로 마음 먹는다. 루이 들로르에게 권총을 겨누는 장면에서 영화의 메시지는 가장 뚜렷해진다. 클로에가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루이 들로르 옆으로 폴 메이예가 등장하자 클로에는 이내 분별력을 잃고 복통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동전의 앞뒤 양면과 같이 그녀가 욕망하던 것은 하나이되, 다른 형상을 띄고 다른 감각을 제공해주고 있었을 뿐이었다.
결말은 돼지 꼬리 달린 아이를 낳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동안의 고독>만큼이나 엽기적이다. 클로에의 배를 가르고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괴생명체는, 그녀를 괴롭히던 또 다른 욕망의 뒤엉킴이자 찌꺼기였다. 그리고 클로에가 애타게 찾던 고양이는 영화의 마지막-유리창이 부서지는 장면-에서야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영화는 마르지 않는 오아시스처럼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결핍과 혼재된 욕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자존감이 부족한 클로에의 모습은 어쩌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민낯인지도 모르겠다. 주인공간의 관계설정이 도식적이고 스토리가 파격적이어서 현실감은 부족했지만, 인간 내면의 불안감과 초조함에 대해 잘 다룬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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